요2:13-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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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하나님이시다
성전은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예수께서 유월절이 가까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지난주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요한복음에는 세 번(6:4, 11:55)의 유월절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납니다.
유월절에 이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사진9장) 여러분 잠시 지나간 시간동안 들었던 내용을 떠 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장면) 1:1- 18에 창조에서 부터 예수님의 오심를 다뤘다면 19절부터 <장면 보면서> 지난 주 살폈던 유월절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시간의 흐름 위에 저자인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사건의 잔치와 변해버린 유월절 잔치를 성전과 연결하는 것이죠.
혼인이 이루어지는 잔치, 그리고 이어지는 유월절 잔치는 2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모여 듭니다. (장면- 유사한 이스람의 정기 순례 하지) 이때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잡은 양의 수만 27만마리라는 기록은 상상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재물로 바치기 위한 소, 양, 비둘기까지 말 그대로 엄청난 가축들도 예루살렘 주변으로 모여 듭니다. 타지에서 모이는 유대인들은 성전에 내야 하는 성전세(성전을 위해 매년 내는 두 드라크마/ 1/2세겔)가 필요한데 이런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요. (장면) 당시 네로에게 보고한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46년 동안 성전을 헤롯이 증축했다고 해서 헤롯 성전이라고 부르는 데 축구장 20배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을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의 1/6 면적이니 즉 사방 1킬로가 되지 않는 예루살렘은 인구가 많아야 최대 12만명인 이곳은 말그대로 발디딜 틈 없는 한달을 보내는 곳입니다. 완공 후 불과 7년만에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곳을 몰락 시킬때도 3백만명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 비록 승전한 장군의 과장이라고 할지라도 잠시 생각해보면 전쟁과 함께, 유월절 시기의 수많은 사람이 좁은 동네에서 서로 탈출하기 위해 얽히고설켜 압사로 죽은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죠.
(2번째 토픽)2. 그렇다면 왜 성전일까요? 성전이라는 말 자체로도 아 중요하겠구나 생각이 들겠지만 유월절만큼이나 왜 성전이 중요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오랜시간동안 한국교회에는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큰 건물을 자랑할 때 1성전, 2성전 이렇게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집,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상징이며 정체성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창세기부터 시작해야지만 출19:20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얼마지나지 않. 그리고 십계명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관련된 규례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고 피로써 언약한 후 모세뿐만 아니라 존귀한 자들까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시는 놀라운 장면이 24장에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를 불러 성막을 만들고 그안에 들어가는 모든 기물과 제사장의 옷까지 세세한 전체 설계도를 모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5장부터 31장까지 그리고 명령대로 모세는 모든 것을 마무리 합니다. 출39:43 “43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이렇게 회막이라고 불리는 성막이 만들어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출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만들었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천지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려 임재하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광야의 시대를 지나 가나안의 시대가 되고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왕을 세웁니다. 다윗 왕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실제로 성전을 지은 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그리고 왕국은 두 나라로 분열하고 결국 두 나라 모두 멸망하게 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붙잡혀 갑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찬탈 당했던 우리나라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포로로 잡혀갔던 스룹바벨이라는 인물이 바사 왕 고레스라는 이방 왕의 도움으로 70년 만에 잡혀갔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새롭게 성전을 짓게 되는데 이를 스룹바벨의 성전(bc 516)이라고 하는데(에스라, 느혜미야, 학개, 스가바) 하지만 다시 로마가 패권을 잡고 마카비 혁명과 같은 일들로 성전 일부가 훼파 되었다가 헤롯대왕이 이스라엘의 민심을 얻고자 하여 증축한 것이 헤롯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은 이렇게 시대를 거치며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중심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은 과연 언제까지인가 싶습니다. 분명 솔로몬이 성전을 짓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하7:14-16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성전은 14절과 같이 되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고 16절 ‘비둘기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성전은 장사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모든 경제의 중심)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솔로몬 때의 하신 말씀대로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행동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15절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고, 다 내쫓았습니다. 돈을 쏟았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공관복음과 다르게 특이한 것은 성전을 향하여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인간이 만든 처소에 자신을 두셨습니다. 비록 그곳이 절대로 거룩한 영역이었음에도 하늘 보좌가 아닌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계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14 함께 읽겠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 ‘거하시매'라는 표현이 바로 ‘성막'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는 말이 저자 요한의 첫 번째 증언이 됩니다. 이 부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집중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실제 예수님의 활동 시기가 아닌 그보다 한참을 지난 시기입니다. 학자들은 4복음서를 기록한 순서를 마가,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으로 보는데 요한복음은 대략 90-100년즘으로 봅니다. 그때는 어떤 때인가 하면 가장 중요한 연도가 70년인데 이때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다 싶이 한 역사적 사실이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죠.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이스라엘의 자즌 혁명 활동 즉 독립(간도 토벌대 등) 운동에 대해 확실하게 유대인의 구심점이 되는 이스라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곳의 모든 보물을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그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1948년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흩어져 나라 없는 백성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주변에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금 잔치, 성전 이야기를 할때 이이야기를 듣던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가 좋았지 라고 할까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유월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태워 전체가 동물 태우는 냄새로 진동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까요? 잔치에서 나오는 양고기와 쓴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출했던 기억이 이제는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탈출시켜줄 그런 강력한 통치자 모세와 같은 아니면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리더를 원했을 그때를 생각하며 요한이 쓴 글을 들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계속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19. 그러나 너희가 마음이 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나의 율례와 계명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겨 숭배하면 20. 비록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지만 내가 너희를 여기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고, 비록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였지만 이 성전도 내가 버리겠다. 그러면 너희는 모든 민족 사이에서 한낱 속담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것이다. 21. 이 성전이 지금은 존귀하지만 그 때가 되면 이리로 지나 가는 사람들마다 놀라서 ‘어찌하여 주님께서 이 땅과 이 성전을 이렇게 되게 하셨을까?’ 하고 탄식할 것이다. 22.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을 이집트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주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미혹되어 그 신들에게 절하며 그 신들을 섬겼으므로 주님께서 이 온갖 재앙을 내리셨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성전을 잃고 나라를 잃고 유리하는 백성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무엇일까요? 다시 세우질 수 없는 축구장 20배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고 그분이 33년을 사셨고 27만 마리의 양으로 태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는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요한복음 3:18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의 메시지를 동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먼저,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합니다. 네가 그런 사람이라면 표적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니냐 하는 것이죠. 이 말은 요한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달라고 조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 연결됩니다. 19절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20절에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듣는 게 육신의 귀니, 답하는 것도 그에 따른 답을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무엇을 시키든 그대로 하라’는 말씀 기억나시죠.
마찬가지로 요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70년에 무너진 자신들의 성전을 보았거나 들었죠.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오셨고, 공생애를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으며 하늘로 승천한 이야기도 이미 들었거나 직접 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22절에 요한은 미리 안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말씀은 지금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에게 너희가 보았지 않느냐 그렇게 믿은 사람을 알지 않는냐 .
잠깐, 성전 이야기를 했으니 조금 선행 학습을 해볼까요?
요한은 14장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이 곧 성령 하나님의 오심과 연결된 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성령은 성막에 거하신 하나님, 육신에 거하신 예수님, 성령은 어디에 거하실까요? 14장에는 ‘너희'라는 단어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3:16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 하나님은 ‘너희' 가운데 입니다. 그래서 고전6:19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의 거룩함 때문에 거하시는 ‘너희 자신'이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저자 요한은 23절에 유월절 예루살렘의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여러가지 기적을 보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는데 이유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