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새순교회 여름 수요강론(4)_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제사장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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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세 직분을 주셨다. 이 세 직분은 왕, 제사장, 선지자였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 세 직분을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 직분을 통해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셨고, 이스라엘은 이 세 직분을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그런데 이 세 직분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거의 없다시피 보인다. 신약성경을 보면 왕, 제사장, 선지자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세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은 이 세 직분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이 세 직분 중 ‘제사장’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특별히 히브리서 4:14-5:10을 통해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제사장보다 더 뛰어나신 제사장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본론
2.1. 히브리서 4:14-5:10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앞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더 뛰어나시고(1:1-2:18), 모세와 여호수아보다 더 뛰어나시다고 하였다(3:1-4:13). 이제 기자는 4:14-5:10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주장의 핵심에 이른다.
이 서신의 처음 세 문단을 구성하는 공통된 주제들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경우마다 율법에 초점을 맞추는 옛 언약과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새 언약 사이의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들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중개자들이었음을 말하였고(1:5-2:18), 모세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그들을 위한 언약 규례들을 포함하는 시내 산 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말하였다(3:1-4:13). 또한 4:14-10:18까지의 방대한 내용에서 이러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시내 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실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동일한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자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맡으신 일들이 더 탁월하다는 것을 통해 제사장직 또한 더 탁월하시다는 주장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기자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렇기에 기자가 “그러므로”라는 말로 14절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러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에서 기자가 인간으로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참 신이신 분이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자는 이 고백을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앞장인 2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만물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자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과 같은 ‘피와 육체’를 공유되셨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15). ‘동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공감’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공감하실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이 공유되었지만, 예수님 외에는 다 죄인이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동시에 말한다.
15절의 ‘연약함’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병약함, 육체적인 연약함, 육치와 관련된 일반적인 연약함 또는 도덕적 연약함이라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죄의 성향에 대한 연약함이다. 죄인인 인간은 매번 죄 짓기를 좋아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만 죄에 대한 우리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시지는 않았다. 1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공감하신다는 말의 뜻은 단지 시험을 받는 우리의 경험, 즉 너무도 자주 죄로 이끄는 삶의 힘든 양상을 공감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짓는 경험이 아니라 왜 죄를 지으려고 하는지, 그리고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경향을 공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가장 뛰어남을 히브리서가 보여주는 것 중 한 부분이다. 이전까지의 제사장들은 죄인의 모습으로서의 제사장이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려고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면서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시기에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대제사장이시다.
그래서 다시 기자는 “그러므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15절을 근거로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움’이라는 명사는 2장 18절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시험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동사의 반향이다. 다시 말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 중 하나는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4장 14-16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통해 고난을 당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신 대제사장이시기에 우리가 담대히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4:14-16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고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5:1-10은 그렇다면 왜 신자들이 자신들이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기자는 먼저 1절에서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말한다. 이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대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대표해 죄를 속하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도록 사람들 중에 택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다뤘듯이 천사들은 이 일에 합당하지 않다. 오직 인간에게만 제한된 직분이기에 대제사장들은 인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로 섬기는 특권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라고 해서 인간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대제사장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하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너그럽게 대하다”라는 동사는 자신들 역시 죄인들임을 아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에 대해 분을 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동사는 4:15의 “동정하다”라는 동사와 동의어는 아니다. 이 절의 초점은 대제사장이 백성들과 갖는 동일성인데 반해, ‘동정하다’라는 동사는 돕는다는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과 같이 동일한 조건을 가진 죄인인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절에서 기자는 대제사장의 제사는 자신을 제외한 백성들을 위한 것 뿐 아니라 대제사장 본인을 위해서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속죄일 때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3절은 레위기 16장 6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레위기 16장 6절에서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라고 말하였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5장 3절과 레위기 16장 6절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첫 번째 대제사장인 아론 또한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다. 아론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집례할 제사장인 동시에 그도 속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제사장직은 아무나 맡을 수 없음을 4절에서 기자가 말한다.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야만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서 기자는 이러한 아론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서 그리스도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스스로를 높여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대제사장을 세우셨기에 대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수용하신다. 만일 대제사장이 사람에 의해서 임명이 되었다면 그의 능력이나 권위가 언제나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기자는 이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앞에서 1장 5절에서 이미 인용한 시편 2편 7절을 인용한다. 2편 7절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하는데, 이 본문과 시편 2편 7절이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편 2편 7절은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한다. 하지만 저자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왕이기 때문에 시편 2편 7절을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아론과는 다른 특별한 제사장이신 것이다. 멜기세덱과 같이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이다. 기자가 앞에서 계속 ‘예수’라는 호칭을 쓰다가 5절부터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바꾼 것 역시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바꿔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구약의 제사장들과의 차이는 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제사를 드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기에(4:15)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였다. 또한 제사장은 ‘동물’을 바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셨다.
기자는 이것을 6절에서 이어서 논증한다. 기자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이 증언하셨다고 말하면서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한다. 110편 4절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기자는 이 시편을 인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순서에 따른 제사장직이라고 주장한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 18-20절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이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그가 아브라함을 위해 복을 빌 때 처음 등장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러다가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한동안 등장하지 않아 사라진 것처럼 보이더니 시편 110편 4절에서 다시 갑작스레 등장한다. 시편 110편의 문맥을 따라 볼 때,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통치하실 장래의 왕을 다윗이 예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4절은 또 다른 측면으로, 이 왕이 왕일 뿐 아니라 제사장이심을 덧붙인다. 그렇지만 그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반차’(개역개정), 즉 ‘순서’라는 의미는 멜기세덱 이후에 제사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갖는 본질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핵심인 것은 분명하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다윗의 후손이시며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는 왕인 동시에 대제사장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 제사장직을 ‘영원히’ 섬기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음과 동시에 다른 것들보다 완전하기에 더 좋은 제사장은 없고 그 효력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4장 1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다고 했다면 7절에서는 대제사장이 인간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것처럼,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을 아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혈과 육”에 속하셨고, 인간 존재의 슬픔과 비통함을 경험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바라셨다. 이것의 절정은 겟세마네에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다(마 26:39). 하지만 겟세마네에만 “심한 통곡과 눈물로”를 적용시키면 안되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삶 전체에 적용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기자가 말하듯이 “날들”이라는 복수형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경험하시고 보신 것은 “심한 통곡과 눈물” 속에 있는 일상 속의 백성들이었다.
이어서 기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그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셨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에서만 발견되고(12:28), 구약성경에서는 단 두 차례만 등장한다(수 22:24, 잠 28:14).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불안함’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니라, 12장 28절을 미루어 봤을 때 “경외하는 마음”이나 “숭경”의 의미를 내포하는 “헌신”이거나 “경외함에서 비롯된 순종”이다. 쉽게 말해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간구를 들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의 간구를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구와는 달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간구에 하나님의 응답은 십자가를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을 때, 사망에서 단번에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활과 승천에 대한 언급은 영광을 취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와도 아주 잘 어울린다.
더 나아가 8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아들되심은 하나님과 같은 고유한 관계와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배웠다”라는 이 말은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전에는 불순종했기 때문에 순종을 배워야 하기라도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분이 순종을 배우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고난이 닥치면 인간은 그것을 면하고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서, 그것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할지를 배우셨다. 그리스도에게 제일 되는 목적은 자신의 기쁨과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9절에서는 완전하게 되셨고, 이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고 말한다. “완전하게”라는 말은 자신의 고난과 순종을 통해 그분이 완전하게 되셨기 때문에 8절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완전하게 되다”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하는 2장 10절에서도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심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완전하게 되셨다. 그분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성취하셨고, 지금은 하나님의 왕이신 제사장으로 왕관을 쓰셨다. 시험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뜻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는 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역할에 완전히 부합하는 소명이기도 하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2장 10절에서도 “근원”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원천”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2장에서 그리스도는 다윗 계열의 왕과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에게 속한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구원을 주셨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그들의 형제와 왕과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순종이 그들의 순종이 되고, 그분의 완전이 그들에게 수여된다.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에 이어 10절에서는 그분이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6절에서 이미 기자는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을 다시 언급하며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직분을 자의로 취하신 것이 아니다. “칭함을 받으셨다”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부르셨듯이 이 직분으로 그리스도를 부르신 것이다. 이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어떻게 성도에게 구원을 이루는지는 7장에서 다룬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론 계통, 즉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을 따르지 않으시고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왕인 동시에 제사장직으로 부르심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심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5장 1-10절에서 말하는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신 일이다.
2.2. 적용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에게 이 본문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문을 해설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인간, 더 나아가 성도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성도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만드시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그분은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부르심을 우리가 알게 될 때 교회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우리의 개인적인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타인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공감하시는 대제사장이시기에 우리에게 긍휼과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짓진 않으셨기에 우리와 같은 죄에 대한 경험은 없으시지만, 시험을 받으시고, 왜 인간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물론 예수님 당시와 지금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들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죄의 현대적 수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기들과 관련된 죄들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폭탄을 사람에게 떨어뜨리고, 화학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 등의 죄를 짓는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행하도록 시험을 받으시지는 않으셨다. 또한 사람들은 보험사를 사기 쳐서 돈을 뗴먹을 수 있고, 소득세를 속일 수 있으며, 전자 은행 사기를 통해서 자금을 횡령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죄들을 행하도록 시험을 받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음란물을 사진으로, TV로, 영화로, 인터넷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유혹을 받지는 않으셨다. 이런 것들은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죄에 대한 ‘표현’이나 ‘도구’가 지난 2천 년 동안 바뀌었을지라도, 죄의 핵심적인 본질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증오, 살인, 욕심, 거짓, 탐욕, 이런 것들이 인간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어느 때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죄의 모양과 방식이 바뀌었을지라도 죄의 핵심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긍휼과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짓고 싶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긍휼과 도움을 구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며 교회도 이 직분을 수행하는 곳이다.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인 동시에 왕의 직분을 수행하셨다. 그분이 자신의 몸을 바쳐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신 것은 죄의 종노릇하고 있던 인간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따라서 만물을 통치하게 하시기 위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으신 그분의 교회는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이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교회에는 많은 고난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통해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고난당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동시에 간구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시면서 고난당하셨지만, 이 예수님의 고난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알게 될 때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바랄 수 있게 된다. 사람은 고통이 찾아오면 자신을 챙기기 바쁘다. 이런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 속에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이라는 선한 길로 인도하셨듯이 교회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바라게 된다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라는 피난처에서 안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결론
이상 히브리서 4:14-5:10을 통해 히브리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뛰어나시고, 멜기세덱보다 뛰어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인간이 만물을 통치할 수 있도록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으셨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으셨고, 그리고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기쁨과 위로를 위해 기도하는 죄인인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간구하신 것처럼 그분의 일생 전체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것을 버리지 말고 굳게 붙들고 살라고 수신자에게 권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