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8. 새벽예배. 왕답게 사십시오.
찬송가 436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예레미야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1)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말하다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서론
〈13–14〉 화 있을진저(woe)라는 말은 선지자의 고발이나(23:1)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곡을 도입할 수 있다(22:18을 보라. 여기서 이 말이 4회 사용되고 슬프다![Alas]로 번역된다). 13절은 이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즉 왕은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을 것이며, 죽임을 당하고, 애도될 것이다. 13절에서 문자적 독법은 ‘그의 집’(왕궁[TNIV])이다.
이 단락은 긴장감을 높이고, ‘그’와 ‘그의 집’을 언급함으로써 시작한다. ‘그’가 누구인가? 그것이 누구의 ‘집’인가? 이것이 몇 절 뒤에는 분명해진다. 여호야김 왕은 아주 비싼 백향목으로 왕궁을 지었고, 붉은 색(왕조의 색)으로 칠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을 착취함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의 신하들(TNIV) 혹은 ‘그의 동포’(NIV)는 문자적으로 ‘그의 이웃’(NRSV를 보라)이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 백성들이요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신명기 24:14–15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각각의 일한 날 마지막에 공정한 보상을 받도록 되어 있다. 여호야김은 바로에게 조공으로 금과 은을 바치기 위하여 유다에서 세금을 거두었다고 알려진다(왕하 23:35). 백성들이 무거운 재정적인 짐 아래서 고생한 반면, 여호야김은 사치스럽게 살았다. 이는 율법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다(신 17:14–20).
〈15–17〉 여호야김에게 있어서 왕권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백향목을 모으는 것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야김과, ‘선한’ 왕이요 공평하고 의로운 다윗 계열의 진정한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야 사이의 완전한 대조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소송을 변호하는 것은(16절) 하나님의 요구 사항들 가운데 하나(3절)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그 땅에서 형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16절)은 그의 뜻을 인정하고 순종하면서 그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9:3 참조). 17절은 요시야와 그의 아들 사이의 커다란 대조를 강조한다.
〈18–19〉 슬프다(Alas, 4회)는 말을 반복하면서, 고소는 ‘애곡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히브리어로 이것은 대재앙의 사상을 강조하면서 위협하는 것으로 들린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곡하지 않으며, 그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귀같이 매장 당하여 전혀 매장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루었다(26:23). 그에게 심지어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36:30을 보라). 장사되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종종 심판의 문맥 속에서 언급된다(렘 7:32–8:3; 9:22; 신 28:26; 왕하 9:36–37을 보라).
의미
부유한 통치자와 가난한 나라는 오늘날 친숙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여호야김은 이스라엘의 왕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대조되는 다윗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산다(신 17:14–20). 그는 수치스러운 종말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왕의 장례가 아닌 당나귀와 같이 매장됨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