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 그리스도
Notes
Transcript
회복
회복
은혜를 받고 주님께 헌신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학생이 공부를 더 잘합니까? 사업가가 돈을 더 많이 법니까? 모든 면에 형통합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 사건의 의미
오늘 본문 사건은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뿐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오병이어 사건 직후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이 왜 오병이어 사건 뒤에 이어지는 겁니까? 먼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신 사이에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보십시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6-17절)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시면서 그 사이 무리를 해산시키시는 동안 제자들로 하여금 북동쪽인 벳새다에서 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배를 타고 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막 6:45).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과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앞서 날은 어두워졌는데 무리에게 먹일 것이라고는 고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던 암담한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8절)
제자들 중에는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것은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조금 전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치 계산 전문가들인 빌립과 안드레의 상식을 깨셨습니다. 이번에는 항해 전문가들의 상식을 깨뜨리십니다.
마가복음은 이때가 ‘사경’, 즉 새벽 3-6시 사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는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의 어느 시점에 이 사건이 벌어졌는데, 제자들은 저녁때부터 이때까지 적게 잡아도 최소 8시간 정도는 갈릴리 바다(호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폭풍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분명히 함께 하시며 놀라운 기족도 베푸셨지만, 지금은 예수님도 안 계십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을 일부러 허락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수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이 없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을 왜 여기서 한 번 더 만드십니까? 오병이어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 한 명이 먹고 배가 부를까 말까 한 정도의 음식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십니까?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우리를 평생 먹여살려줄 수 있는 분이다. 이런 분이 왕이 되어야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의 심리가 비슷합니다. 어떤 훌륭한 인물이 나오면 전혀 정치와 다른 분야의 사람이라도 ‘이분을 대통령으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이 사람들은 더 심각했습니다. 진짜 먹을 것을 받아서 먹고 보니까 ‘이런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라면, 이런 분이 왕이 되어야 한다. 지금 왕과 지도자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이렇게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바로 해산시키시고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여기는 기도하셨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시면서 영적으로 재충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그와 비슷한 시간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고독의 시간, 자기들만 있는 시간, 정말 주님을 사모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여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때 제자들도 자신들의 어떤 사람들인지 그 실체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진짜 누구이신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시간 직전에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나누어주시는데, 그것을 정확히 어떻게 나누어주신 건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바구니에 담아서 주시는데 계속 늘어나는 겁니다. 제자들이 받아서 나누어주는데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나오니까 나누어주는 그들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얼마나 의기양양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야, 내가 저분의 제자야라고!’ 하며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서 ‘더 주세요, 더 주세요.’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니 얼마나 뿌듯합니까? 그래서 자기들은 ‘야, 이제 내가 뭔가 됐구나. 역시 저분을 왕으로 모시면 위로 올라가는구나.’ 하면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렇게 서로 싸운 겁니다.
그 능력을 맛보고 그 능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위치에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너희들의 실체를 깨달아라.’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슨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왜 이렇게 될 수 있었는가? 나 때문에 너희가 이렇게 된 것이다. 너희 스스로 된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무슨 신적 능력을 통해서 인기를 끌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으키신 사건이 절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뭔가 작은 것이라도 드려야 주님이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뜻도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작은 것을 드리면 역사하신다는 것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게 초점이 아닙니다.
굳이 오병이어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한복음에서는 ‘보리떡’이라고 밝히고 그것도 아이가 가지고 있다고 밝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먹어도 배가 부를까 말까 한 그 정도라는 겁니다. 보리떡은 풍성한 떡도 아니고 작은 빵입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안드레의 말까지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6:9) ‘요 까짓 것 갖고 어따 씁니까?’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드려서 뭔가가 된다는 게 아니라 어떤 걸 드려도 안 된다는 걸 강조하는 겁니다.
결국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오병이어 사건의 초점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우리 스스로가 가진 필요와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사실 다 이 세상의 것인데, 그것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배고픔이라는 육신의 필요뿐 아니라 구원이라는 영적 필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범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피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다 지옥으로 갈 존재이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제시해주는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하라고 하면, 교회에 안 다니는 분들이나 처음 나온 분들은 ‘왜 교회는 자꾸 회개부터 이야기하나? 불편하게.’ 그러나 불편한 게 아닙니다.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도 전혀 없고 능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사건은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에서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부분을 없애줍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니까 이 갈릴리 바다는 그들에게 가장 자신 있는 곳입니다. 눈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아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큰 바람을 만나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제자들이지만 풍랑 앞에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내 인생을 나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인생에 풍파가 닥치면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속수무책입니다. 내 인생인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보여 주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먼저 이 현실을 철저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의 의미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19-20절)
항해 전문가들인 제자들은 힘겹게 자기들의 힘으로 노를 저어 갔지만 좀처럼 갈릴리 바다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뭔가 허연 것이 오는 것을 볼 때 ‘유령이다!’ 하면서 심히 두려워했습니다(막 6:49).
그러나 그것이 꼭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누가 여기를 오겠습니까? 누가 물 위를 걸어오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저쪽에 뭔가 허연 게 나타나니까 ‘유령이다!’ 하면서 혼비백산 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물 위를 못 걷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1절)
그들은 기뻐하며 반갑게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때 안도감을 느끼며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 배는 원래 ‘그들이 가려던 땅’ 가버나움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밤새 수고해도 겨우 십여 리밖에 나아가지 못하던 배가, 이제는 예수님이 타시자마자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니까 아무리 해도 안 나갔는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곧 도착합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이시거든 저에게 오라고 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물 위로 걷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라’ 하시니까 실제로 잠깐 물 위를 걷습니다(14:27-30). 그러나 바로 빠집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어부라고 해도 배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도 없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풍랑이 심한데 예수님에게는 배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아, 내가 저분만 따르면 더 이상 배가 없어도 되겠구나.’ 하고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저도 그런 능력을 갖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요청한 것인데, 그가 기대했던 것은 이제 물에 안 빠지고, 파도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는 능력, 신통력, 멋지게 보이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바다 위에 올라섰지만 바람이 계속 불고 파도가 치는 겁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이 오라고 허락하셔서 바다 위에 올라섰지만, 그치지 않는 바람과 파도를 보자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맙니다.
앞에 나온 오병이어 사건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쳐주십니까? ‘너희가 나를 믿기만 하면 굶주릴 일이 없고 거센 파도도 잠잠해져서 아무 문제없이 살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오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것이다. 영적인 문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며 살면 세상에서의 삶은 탄탄대로이고 평안할 것이라는 약속은 놀랍게도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 믿어서 얻게 되는 진짜 복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믿으면 돈을 잘 법니까? 사업하시는 분들, 예수를 믿어서 돈을 잘 법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나보다 돈을 훨씬 더 잘 법니다.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세상의 재벌들을 보십시오. 그 중 예수 믿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최고 재벌이 엄청난 상속세를 낸다고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으면 내 자녀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자녀보다 공부를 더 잘합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이 잘 해결되면 분명히 기도 응답을 해주신 것인데, 기도를 하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꼭 성공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게 이겁니다. 꼭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꼭 사회에서 높아져야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거냐고 주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꼭 똑똑해야 하고 권세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성공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는데, 그 자체로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말일 것이고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꼭 높이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높이 올라가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나의 최선을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라.”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왜 기도합니까? 기도해서 얻는 것은 뭡니까? 기도할 때 얻는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자(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채 살다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고서 지옥에 떨어지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도대체 거기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를 흘려가면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나 성공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시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야,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분이 여기 오셨다. 왕으로 삼자. 이분만 있으면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분에게 붙어 있자. 이분의 백성이 되자.’ 구약에서도 왕을 세운 이유가 그런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분을 따르면 뭔가 한 자리 하겠다. 이분이 왕이 되시면 우리가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릴 수 있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너희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섬기러 왔고 목숨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병이어를 경험하니까 먹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저 영원한 나라에 속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고통을 해결하고 세상적인 성공을 통해 이익을 보는 것으로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표적’이 무슨 의미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계속 예수님의 기적을 묘사하는 까닭은,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게 해주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 배만 채우는 기적이나 내 필요만 채우는 기적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도록 해주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표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때문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정말 생명을 주는 메시아(그리스도, 구세주)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가 채워지니까, 필요가 채워지니까 ‘아, 저분만 따르면 내 필요가 채워지겠다.’라고 하여 예수님을 따른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부자가 된다니까 따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뭡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지금 이 땅에 내가 천국을 끌고 내려왔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뭡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도 아직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은 상태 가운데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분명히 끝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이 땅의 것은 다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만 구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파도가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가 혹시 바다에 빠져서 죽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소망과 영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진짜 복이며 자랑거리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아무리 최고의 것을 얻어도,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바꾸지 못합니다. 또 아무리 우리가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아무리 낮아져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3.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당연히 평안하게 거할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또 우리의 건강, 사업, 직장, 자녀, 재정적 부분 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뭐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구하면 그것은 진정한 신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으로 복을 판단하면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되느냐 못 되느냐를 판단하면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한 것으로 자랑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의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순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겁니다. 그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잠시 지나갈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과 우리의 행복이 다른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잘살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중 부자도 많이 있었습니다.
부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런 것들이 잘 사용되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높이 올라가고 권세를 부리라고 그렇게 해주시는 게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의 방법대로 올라가고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보다 앞서야 하고 남들을 밟으며 올라가야 합니다. 또 사람들을 속여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를 죽여서 옆 사람을 올라가게 해주고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잘돼야지. 내 자녀가 잘돼야지.’라는 사고방식으로 살 때 안 믿는 사람과 무슨 구별이 있으며 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뭘 기대하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말씀에 순종해도 폭풍을 만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러한데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그런 상황에서 교회를 나옵니까?
사실은 진짜 가치가 뭔지를 아는 겁니다.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아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사실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는 삶을 통해 우리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쌓아놓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을 지금 우리는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참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와 이렇게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6장 전체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친 것이 적은데 크게 부풀려서 돌려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물질을 우리가 적지만 드렸다고 뻥튀기해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의 헌신과 열심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드리고 그냥 끝나는 겁니다. ‘주님, 이게 제가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것입니다.’ 하고 드립니다. 그러면 크게 뻥튀기해서 가지라고 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드릴 뿐입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우리의 삶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마자 배가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21). 주님을 소유하자마자 제자들은 세상의 파도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파도가 계속 쳤을 것이지만 예수님이 오시니까 금방 갑니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게 아닙니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주님과 함께 가려던 땅에 곧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 순간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살전 4:16) 오는 그때만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왜 교회에 나가십니까? 왜 예배를 드리십니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또 다가오는 영원한 나라를 정말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어떤 풍파가 나에게 닥쳐오더라도 그것이 별로 상관없는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인생에 바람은 불고 파도는 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것을 극복했다고 좋아하고 실패했다고 괴로워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살 수 있는, 아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 자신은 진짜 누구냐? 또 내가 너에게 누구냐?’ 스스로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배부르기 원한다면 그것이 영적 배부름이기를 원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주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위해 신령한 것을 심으며 나아가리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파도, 세상의 오해, 세상의 조롱이 계속 오겠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