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약설교] 빵집에 빵이 없으므로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3 views
Notes
Transcript
Ruth 1:1–6 (NKRV)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빵집에 빵이 없으므로 입니다.
〈룻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축’이라 불리는 낭송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추수 감사절로 드리는 초막절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룻기〉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 넘치는 사랑(헤세드)에 대한 감격을 고백했습니다.
〈룻기〉를 어떻게 깊게 알 수 있을까요?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핵심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성도는 룻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와 보아스입니다. 비중으로 보면 나오미가 더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의 텅 빈 것으로 1장이 시작되고, 나오미가 가득 찬 것으로 마지막 장인 4장이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라는 인생이 어떻게 텅 비었는지와 그 텅 빈 여인이 어떻게 채워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신을 마라(고통)라 부르던 소망 없는 과부 나오미의 텅 빈 것을 채우시는 보아스라는 이름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시간적 배경이 나와 있습니다.
Ruth 1:1 NKRV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이 시대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룻 1:1)입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만 해도 금방 그 땅을 다 점령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도 죽고 가나안 정복은 후대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호수아 이후의 세대는 가나안 민족들과 갈등하고 협력도 하면서 함께 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토박이들과 그리스에서 넘어온 해양 민족인 블레셋과 함께 살아야 했고 계속되는 이방 민족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가끔씩 사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땅을 회복하는 것 같았으나 곧이어 다시 타락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반복하던 때가 사사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이 시기의 특징을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끊임없이 우상 숭배가 일어났으며, 이방 민족들에게 압제를 당했고, 도덕적인 수준이 땅에 떨어져 짓밟혔던 시기입니다.
〈룻기〉는 바로 이 사사들이 치리하던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음으로, 장소적 배경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촌락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구약의 모든 이야기를 신약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일단은 구약 자체가 가지는 결을 살려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룻기〉에서 베들레헴은 어떤 곳일까요?
아직 아무 곳도 아닙니다.
이후에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께서 태어난 장소이긴 하지만, 당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스라엘의 작은 동네일뿐이었습니다.
그런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요단 강 건너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1:1) 1절 하반부를 보면 “거류하였는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잠깐 그곳으로 피할 목적을 가지고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류는 단순하게 얼마간 기근을 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1:2) 2절 하반부에 보면 “거기 살더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곳에 정착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엘리멜렉이 모압에 가 보니 그곳이 너무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관광 비자, 유학 비자를 내고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서 얼마간 지내니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갔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북부 모압 지역은 유일하게 비가 많이 내리는 고원 지대입니다.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풍성함에 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거류하려 했던 그 땅에 정착하기를 결정한 것입니다.
이민국에 들어가 영주권 신청을 한 것이지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1:3–5)
이렇게 이민을 결단한 엘리멜렉, 그의 결정 때문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거기 살더니”라는 단어가 등장한 직후인 3절에서 엘리멜렉은 죽습니다.
여기에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에는 없는 접속사 하나가 원어 성경에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n, 의역하면 ‘그때에’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거류에서 이민으로 바뀌는 ‘그때에’ 엘리멜렉이 죽은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때’ 남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모압을 떠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직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10년쯤 살며, 아들들을 모압 여인들에게 장가보냈습니다.
남편은 없지만 두 아들이 있고, 이제 두 아들을 통해 또 손자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좀 괜찮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민 10년 차 되던 해에 장성하여 결혼까지 한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주해 온 네 식구 가운데 단 한 명 나오미를 제외하고, 모두 죽은 것입니다.
과부요, 자식마저 없는 나오미, 소망 없는 늙은 나오미만 남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의 귀에 들려온 소문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1: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 땅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귀향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10년 만에 완전히 망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나오미의 마음은 어떨까요?
남편도, 두 아들도,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돌아가는 이 늙은 여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는 과부 나오미가 되어,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의 비참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텅 빈 것을 공감하지 못하면 그녀의 텅 빈 것을 채우는 나머지 이야기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독백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베들레헴에 심한 기근이 찾아왔어요.
이사를 하고 정착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저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두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든 이방 땅에서 10년을 버티며 아이들을 키워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뒤 자식들도 모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내 모든 소망, 내 모든 기대…….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이 땅을 떠나렵니다. 모압의 어떤 것도 보기 싫습니다. 삶에 지친 이 몸이라도 고향 땅 베들레헴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 묻히고 싶습니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 하니 그곳에 가면 당장에 굶지는 않겠지요.
이제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오미는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됐을까요? 이 집안은 왜 이토록 비참하게 몰락한 것일까요?
남편은 왜 모압에서 정착하기로 결정하자마자 죽었으며, 두 아들은 왜 10년이 지난 후에 갑작스럽게 자녀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죽었을까요?
그리고 죽음과 죽음의 이야기들, 이 ‘비극적 이야기’가 왜 〈룻기〉의 가장 주요한 배경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많은 설교자들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갑자기 죽는 이유를 그들이 ‘약속의 땅’을 떠났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나오미의 비극의 이유를 ‘약속의 땅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이 본문의 결론이나 적용도 함께 정해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너에게 주어진 이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로 말입니다.
이 결론에는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떠나면 이토록 참혹한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이죠. 이 부분은 몇몇 설교자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 아니라 신학자 대부분이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자신의 뜻을 떠난 백성을 완전히 망하게 하시는 집요하신 하나님”이 룻기의 배경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본문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놓인 한 집안의 몰락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해석과 적용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설교를 해야 하는 제가 그런 설교에 도무지 순종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자들이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적용할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설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약속의 땅에 찾아온 기근”이라는 말씀의 무게 때문입니다.
1장 1절은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흉년’은 원어로 ‘라아브’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배고픔, 굶주림, 결핍, (광범위한) 부족’을 의미합니다.
흉년이 많았던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흉년을 지칭하는 단어가 많이 있는데 그 다양한 단어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흉년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이 ‘라아브’입니다.
그저 먹을 것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참아도 되는 수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기근이 아닌, ‘처절한 굶주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기근이 무엇입니까?
현대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기근’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오늘날에도 지구 어느 편에서는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땅에서 무른 흙을 골라서 그 흙을 물과 함께 진흙 파이를 만들어 먹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아이와 아이 옆에서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콘도르(독수리)의 사진도 있습니다.
기근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자에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고 그 기근을 견디라”
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냥 성경 속에 있는 남의 집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며 편하게 읽지 마시고, 정말 우리 집 이야기로 이 사건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배고파 울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믿음을 붙잡고 약속의 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상황에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이 죄일 수는 있지만, 한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날 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엘리멜렉이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고 또 자식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손에 죽임 당했다면,
저는 솔직하게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너무너무 배가 고팠고, 힘들었고, 지치고, 견디다 못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인데 그런 엘리멜렉을 죽이시고 자식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면,
저는 도무지 그분을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일까요?
저는 엘리멜렉이 문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그 땅을 떠나게 만든 베들레헴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에 생길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특히 베들레헴은 더욱 더 중요한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사사들이 다스렸던 어두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은혜가 남아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율법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기였음에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이삭 줍기라는 사회 보장 제도로 율법이 여전히 운용되던 공동체였습니다.
또 기업 무를 자라는 고엘 제도가 시행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친족의 고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과 법은 남아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베들레헴은 사사 시대라는 영적 어둠의 시기에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구약의 교회, 은혜가 있는 신앙 공동체, 믿음 좋은 신앙 공동체(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룻기〉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1:1). 베들레헴에 흉년이 임했다고 합니다.
가장 신실했던 베들레헴 땅에 기근이 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데려간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계절에 맞춰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 의지해서 농사와 목축을 해야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런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제대로 된 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 년 내내 넘실거리며 흐르는 강이 없습니다.
넘실거리는 강이 있다면 기근이 와도 그 강에서 물을 끌어오면 됩니다. 물을 끌어오면 애쓰고 수고한 만큼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천수답으로 이스라엘을 보내셨을까요?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면 때를 따라 내리는 비를, 불순종하면 가뭄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땅(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라”(1:1)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들레헴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베들레헴마저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를 해서 그 결과로서 ‘비가 그쳤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가장 충만했던 교회 공동체 마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빵’을 의미하는 ‘레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빵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장 1절 “그 땅(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라”라는 말은 “빵집에 빵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빵집에 빵이 없는데, 사람들이 빵집에 남아 있어야 합니까? 빵이 없는 빵집에서 떠나는 것을 사람들의 잘못이라 말할 수 있나요?
어찌 보면 빵이 없는 빵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닌가요?
성경 어디에도 엘리멜렉이나 말론과 기룐이 특정한 죄를 지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 이주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베들레헴에 그들이 먹어야 할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빵 없는 빵집에서 인간이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진짜 문제는 빵집에 빵이 없었다는 것, 하나님이 계셔야 할 거룩한 땅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로 가져와 보도록 합시다.
아프고 슬픈 이야기지만 빵이 없는 빵집인 베들레헴 이야기가, 어쩌면 바로 오늘날 우리와 우리네 교회에 대한 선언일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는 일련의 힘든 사건을 통해 함께했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잘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새롭게 잘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를 정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시거나 교회 자체에 출석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들을 보고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2014년 ‘가나안 성도’에 대한 목회사회학연구소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를 떠난 성도들 가운데 67.1퍼센트는 ‘언젠가 다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는 중이고, 적절한 교회를 찾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교회 활동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33퍼센트는 ‘나가고 싶지 않지만 불편하다’와 ‘나가고 싶지 않다’를 선택했습니다.
신앙은 갖고 있겠지만, 교회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해마다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뉴스를 접합니다.
간추린 뉴스가 그 정도라면 개교회들 안에서 실제로 듣는 이야기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부정적인 이야기 때문에 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났고, 되돌아오지 않기를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 남아 있는 성도 입장에서 교회를 떠난 성도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교회 안에서 헌신하고 수고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가 가장 고통하는 순간 이 짐을 함께 지지 않고 떨어져 나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같이 보이는 ‘가나안 성도’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충분히 부정적인 마음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너희는 약속의 땅인 교회 공동체를 떠나 버렸어.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실 거야. 하나님께서 치시기 전에 빨리 교회로 돌아와!’라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각 성도의 비참한 상태를 교회를 떠난 개인의 문제와 죄였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약함과 이기심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죄가 ‘여기’(베들레헴=교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빵집에 빵이 없다”는 죄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빵집의 간판은 달고 있지만 막상 빵을 먹으러 온 사람들에게 진짜 빵을 내주지 못하고 냄새만 풍겼던 빵 없는 빵집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빵집에 있어야 했던 빵, 지금은 잃어버린 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빵집에 있어야 할 빵이 무엇인지 신・구약 성경에서 각각 한 본문씩 살펴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구약입니다.
Numbers 4:7 NKRV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성막 안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성막 안에 있던 열 개의 둥그런 떡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성막 안에 있는 떡을 “진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얼굴의 빵’이며, 의역하면 ‘앞에 있는 빵’입니다.
즉 이 떡은 ‘하나님의 면전(얼굴)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진설병이 없는 성막’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하나님 임재가 없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베들레헴에 빵이 없다는 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다는 말이고,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교회, 이가봇(영광이 떠남) 상태를 의미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것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가?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 사람이 변화되고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이 기근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요? 다음으로, 신약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빵’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 떡(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님의 찢기신 살에 대한 두려움과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성찬식을 행했지만, 막상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요?
성찬식은 했는데, 막상 성찬식 중심에 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지 못한 건 아닌지요?
오늘도 생명의 떡에 굶주린 배고픈 이들에게, 이 땅의 교회는 과연 먹을 것을 전하고 있을까요?
목말라 찾아온 사람에게 소금물을 주어 더 목마르게 하고, 배고픈 이들을 향해 빵은 주지 않고 빵 굽는 냄새만 맡게 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새롭게 한 주를 살아 낼 힘과 은혜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교회에 왔고, 교회에 무언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막상 와 보니 그곳에 그들의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할 빵이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같이 메말라 있고, 기근으로 배고파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교회에서 예수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갔습니다.
산으로, 골프장으로, 요가 수련원으로, 인터넷으로, 알코올이나 유흥으로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을 해결하려 그들은 또 다른 중독에 자신을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과연 그들만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 줄 수 없었던 교회,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예배의 문제이며, 우리 섬김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빵,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베들레헴에 있었고, 바로 교회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최근에 숨이 막힐 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에서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까?
최근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신다’는 그분의 임재를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근래에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앞에 두려워 떨며 죄를 회개한 경험이 있습니까?
“화로다 내가 죽게 되었노라”라고 외쳤던 선지자들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인인 우리가 만날 때 생기는 필연적인 탄식을 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는 차고 넘치는 은혜의 강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확연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인가?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린 텅 빈 나오미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1:6상)
지나가는 사람이 들려준 이 소식은 나오미를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켰습니다.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1:6하)
나오미가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빵집에 다시 빵이 돌아왔다”입니다. 나오미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 빵집으로 돌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마저도 영적인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결국, 교회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교회 안에 적극적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만 맴도는 사람들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도무지 배를 채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보며 필립 얀시가 쓴 유명한 책(《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처럼 “아,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과격하다고요? 맞습니다. 과격한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흔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 정리된 지식도, 귀한 간증들도 있습니다. 간혹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것 같은 그런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금 남은 잔향으로는 결코 세상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빵집에 막상 가장 중요한 빵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만약 빵집에 빵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예배에 빵을 구하러 온 사람들을 충분히 먹일 만한 빵이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하나님께서 저 대신 강단에 서시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진리를 선포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빵집에 빵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제껏 배고팠던 사람들, 빵이 없어 굶주렸던 사람들이 서로 교회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배경을 가진 목사가 있는지, 건물 인테리어는 어떻게 했는지, 음향 장비와 피아노는 어떤 메이커인지, 차량은 운행하는지, 이와 같은 것을 물어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빵이 있는 빵집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면, 빵집 주인의 외모나 의자의 편안함, 세련된 인테리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껏 배고팠던 사람들이 빵집으로 밀려들 것입니다.
룻기〉라는 책을 통해 우리가 굶주렸던 생명의 떡, 잃어버린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빵으로 만족하며 우리가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빵이 넉넉한 교회를 꿈꿀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께서 우리의 갈급한 마음에 단비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