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에 참여하기

사도바울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3 views
Notes
Transcript

타인의 삶에 참여하기

지난 주 설교가 참여였다. 이 참여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고 우리안에 예수가 참여 한다는 것
결국 개인이 복음을 통해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개인적인 구원을 통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복음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주의 설교였다.
다른 사람들을 복음에 참여하게 하는 일이 선교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대한 물음으로 말씀을 보도록 하겠다.
바울이 자랑할 것은 오직 복음이었다.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울은 16절에서 말한 것 처럼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대가나 누가 맡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당연하게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돈이 없으면 교회가 안됩니다. 만약에 제가 교회사역을 하면서 월급을 받으면서 해야 되고, 건물을 짓거나 해야 된다면
지금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규모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는 삶으로 복음을 말하는 교회가 되자고 강조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일보다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가 됩니다. 이것은 복음하고 상관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 보다 의무로 감당해야 될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합니다. 포기를 하게 된 배경은 마태복음 10:42 이하로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참여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낮아져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참여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도리어 낮아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낮아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속에 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진 많은 모습들을 포기해야 한다.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1.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공감"하는 것이다.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다.

20절, 유대인과 율법아래 있는 자는 같은 말이다. 바울이 유대인이 되고 율법아래 있는자가 되는 것
21절에 율법없는 사람처럼 되는 것
22절 약한자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 이 모든 것에 자신이 맞춰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공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공감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처지나 감정을 가여워하거나 똑같이 되거나 단지 함께 울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수용하고 이해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 공감이다. 여러분의 공감능력은 어떤가?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4가지 요소가 있다.
관찰(내가 그때 말한 그 영화 봤어, 너도 그 영화 봤지?
느낌(내가 그 영화를 봤는데 … 느껴지더라고, 너는 그걸 보면서 어떤게 느껴져?
욕구(그 영화보면서 나도 정말 여행이 가고싶어졌어, 여행하면서.....너는 어때? 무엇을 젤 해 보고 싶어, 무엇때문에?
부탁(그럼 나하고 언제 여행한번 가 줄 수 있겠니? 너는 나한테 원하는 거 뭐가 있어, 나도 들어줄께)
이런 요소로 대화할 때 공감하는 대화라고 소개를 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모습을 다 포기하고 맞춰줄 수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바울은 디아스포라,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다양한 나라, 지역에 세웠던 회당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하기위해서는 공감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21절,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 율법없는 자가 되어서 만났다. 율법없는 자는 이방인을 말하는데, 이 이방인은 다른 종교인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율법이 필요없어, 다 소용없어...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22절, 연약한 자 같이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가 신앙이 아주 부족한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말 할 때가 많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너무 싫어 절대 안만날거야" “나는 그런 사람 절대 상대하지 않을거야"
타인을 공감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내린 평가와 편견이 그 사람의 삶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람의 대해 이런 편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을 공감해보면 의외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또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자신은 기도 오래했고, 뭐도 오래 했고, 뭐도 많이 했고..... 만약 이제 교회 나오거나 신앙생활을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아 나는 너무 부족해서 어울릴수 없겠구나", “나는 저렇게는 못되겠는데”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 저도 너무 부족해요. 이제 시작했어요.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우리가 사람의 대해 내린 평가가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사도바울은 왜 이토록 모든 사람들에 공감하려고 하고 편견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했을까. 23절에 복음을 위하여,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의 복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렇다.
스피노자가
의견이 비록 옳아도 무리하게 남을 설득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사람은 모두 설득당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참된 복을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에 편견을 버리고 공감하면서 참여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는 저와 여러분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선교의 첫 단추가 되는 것이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