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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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16:13-20
제목 : 나의 교회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외친 그 구호대로 비성경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로 얼룩진 중세 시대의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구호를 따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는 목회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들 역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표현이 친숙합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구분 없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자 그런데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 초대교회를 향한 회귀만이 현대교회의 활로가 된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예컨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집이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비유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의미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다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현대의 방식을 모두 부정해야 하는가, 초대교회의 원시적인 상태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초대교회의 방식과 현대교회의 현실을 상황에 맞게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대의 문화적인 혜택을 유지하면서 초대교회가 시행했던 방식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취할 부분만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다양성에 관한 고민도 필요한 것이죠.
따라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한두마디의 말로는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인 것이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의 본질인 교회에 대한 개념이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개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성도로서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마땅한지 함께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19절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본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이해되어왔죠. 본문 내용을 깊이 살펴보기 전에,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게 된 경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 13절 말씀을 보세요. (in)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표현하실 때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인 인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out) “인자”라는 단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이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자”라는 단어는 예수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이며,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메시야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인자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는 이미 정답이 내포되어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 칭호의 의미를 풀어서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어서 14절 말씀 보세요. (in)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인자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라는 것이었죠. 이에 대해 제자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out)
인자를 누구라고 말하는지에 관한 질문의 반응으로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 등의 대답은 명백한 오답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백번 양보해서 이 사람들이 진지하게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대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피상적인 것이었으며, 변덕스러운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일반 사람에게 적용하면 극찬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 담임목사님께 아이고 우리 목사님, 엘리야 같으세요. 이렇게 표현하면 극찬이 되지만, 예수님께 엘리야 같다고 표현하면 틀린 표현이 되는 것이죠.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과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out)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만 나서서 대답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죠. 이 대답이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이 지금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최초의 고백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의 서두에서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사용됩니다.
(in)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 보세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장 16절.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장 17절.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1장 2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out)
이렇게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을 복음서의 서두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저자의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밝힙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마태가 성경 저자로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한 것이었고, 사람의 입으로,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가 최초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고백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점만 고백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도 덧붙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내용 역시 최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최초였다. 이 점만 부각시키고 있는데요. 그 이유인즉슨,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고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초의 고백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베드로가 불완전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고백했다고 해서 우리도 이 당시의 베드로와 동일하게 다소 부족하게 이해해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이를 마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한 이상, 우리는 성경적인 올바른 이해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자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간결하면서도 기독론적으로 핵심적인 고백이되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16절이 대단히 중요한 구절로 조명받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주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in)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 번째 말씀,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시다. 두 번째, 너는 베드로이다. 세 번째,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네 번째,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다섯 번째, 내가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의 말씀이 등장하는데요. 시간관계상 세 번째 말씀까지만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in) 우선 첫 번째 말씀,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서 이것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 내용이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이시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명제를 깨닫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계시를 택자에게 수여하시고 택자로 하여금 그 계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죠. (out)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은혜를 받는 것이 나의 나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워진 것 같다고 해서 본인이 영적으로 남들보다 더 간절하고 뜨겁고 탁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반대로 본인이 영적으로 무뎌졌다거나 차가워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지체 때문에 상처받아서 은혜 못받고, 목사님이 말씀을 이상하게 전해서 은혜를 못 받고. 이러저러한 환경 때문에 은혜 못 받고 이런 것은 사실상 핑계에 불과합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 속담과 정반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은혜를 못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돌짝밭과도 같은 본인의 비참한 영적인 상태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in) “너는 베드로이다. 너는 페트로스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뭔가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이 신앙고백 이후에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베드로는 베드로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in)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베드로는 베드로였습니다. 그의 장모 열병을 고치러 가실 때에도 베드로는 베드로였으며,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될 때에도 베드로는 베드로였습니다. (out)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새로운 이름 부르시는 것처럼 불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베드로의 이름이 다음 구절,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은, (in)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어 보이죠. 하지만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in) 그 문제는 바로 베드로와 반석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직역한 내용을 보시면, 헬라어로 베드로의 이름은 페트로스이고, 반석은 페트라입니다. 페트로스는 남성명사이고 페트라는 여성명사에요. 의미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페트로스와 페트라를 똑같다고 볼 것이냐, 다르다고 볼 것이냐, 베드로가 반석을 의미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out) 대표적으로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이러한 베드로의 권한을 교황이 이어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교황 수위권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수위 조절을 잘못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베드로가 반석이냐 아니냐에 관해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in) 첫 번째 경우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베드로가 반석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반석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을 해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칭찬받은 것은 그가 신앙고백한 것 때문이다. 신앙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신앙이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그리고 칼빈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거룩한 일치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도록 신령한 건물을 형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이 전체 교회를 위한 공통된 기초가 된다고 선언하심으로 주님은 이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신자들을 베드로에게 결합시키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두 분의 설명에 따르면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in)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인데요. 페트로스와 페트라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로 성만 다를 뿐 의미는 동일하기 때문에 언어유희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성은 강도사님, 성은이 망극하시죠. 하나님의 은혜가 한이 없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 한강도사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지만, 미리 허락받았습니다. 네.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생각했는데,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었듯이 베드로가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에서 마태복음을 전공한 다수의 학자들은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한국교회에 친숙한 학자들, 예컨대 카슨이나 헨드릭슨, 레온 모리스, 헤르만 리델보스, 데이빗 터너와 같은 학자들은 모두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자, 이렇게 베드로가 반석이냐 아니냐에 관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요. 교리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반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본문만 놓고 보면, 반석이 베드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확실하게 결정하려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 다시 말해 문맥을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되었죠.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이 과정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그냥 일반적인 대화처럼 보이지만, 원어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구조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in) 빨간색과 파란색 글씨를 보시면, 생긴 게 똑같죠? 영어로 표현하자면 베드로가 주어+be 동사로 말하고 예수님도 주어+be 동사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라고 말해서 뭔가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냥 you라고 말한 거예요. 당신은 ~입니다.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고백하자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십니까?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너가 그렇게 말했으니,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는 거예요. 무엇을 말한다는 것입니까? (in) 예수님의 두 번째 세 번째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이 신앙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in) 예수님께서 교회를 친히 건축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건축하신 교회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라는 신앙고백과 진리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둘째로, (in)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헬라어는 영어와 동일한 어순을 취하는데요. A of B라고 하면 B의 A라고 해석하지 않습니까? 수식하는 단어가 보통 뒤에 위치하게 되는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순을 바꿔서 말씀합니다. 의도적으로 “나의”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예수님의 소유라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in) 교회는 예수님께 부르심 받은 구별된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르죠. 합성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라고 볼 경우에 교회의 의미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미래 일처럼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본문에서 교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무형의 존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70인역 성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in) 물론 70인역 성경은 개역개정과 같은 번역본에 불과합니다만, 헬라어 의미를 연구할 때 참고 자료로 사용됩니다.
자 그래서,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 우리말로 교회라는 단어가 무려 75회씩이나 사용되는데요. 이때 교회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하면 (in) 이스라엘의 총회를 가리키는 단어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 9장 10절 너희의 총회, 신명기 23장 1절 여호와의 총회, 신명기 31장 30절 이스라엘 총회, 시편 67편 28절 대회.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총회와 대회와 같은 단어가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구약에서의 교회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서 예수님의 에클레시아, 나의 에클레시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두에 제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에 대해 말씀드렸죠. 초대교회가 무엇이냐. 또 돌아가자고 하는 그 귀환의 의미가 무엇이냐.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의 핵심은 교회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바에 따르면, 교회의 본질은 세 가지입니다. 교회의 본질 세 가지를 정리하면서 적용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 첫째,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건축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교회의 정의는 우리 화평교회와 같이 개별적인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그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교회의 터만 남고 무슬림 사원이 들어온다거나, 이단 교회가 들어온다거나, 술집이 들어오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학적인 명제에 의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만, 비록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개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하나님께 택함받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속해 있는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교회를 예수님의 손으로 친히 건축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으며,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의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 둘째,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의 소유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저도 교회가 예수님의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역하는 모든 순간마다, 저의 생각과 제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목회자만 그럴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화평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 예수님 눈치를 좀 봐야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월세나 전세 살아본 적 있으십니까? 네. 저도 신혼 초기에 월세 생활 좀 했었는데요. 월세나 전세 모두 집주인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잠도 내가 자고, 물건도 내 물건 가져다 놓고 쓰는데, 못을 박는다거나, 뭐 어떤 변화를 주려고 할 때,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상황이 오게 되죠. 아마 겪어본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자 그렇다면, 월세나 전세를 살 때, 한 집에서 뭐 50년 정도 솔선수범하면서 주인의식 가지고 깨끗하게 쓰면서 살면 본인이 그 집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유주가 변경되는 일은 없습니다. 백년 천년 살아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죠? 제가 왜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할까요?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한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했고,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헌신했고. 뭐 그런 역사 자체는 대단히 귀하고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 수고와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갚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이지, 그렇게 본인의 신앙생활을 공로로 삼아서 본인이 교회의 안주인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의 실세라고 생각하거나, 본인의 죄악된 본성으로 교회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모든 악한 생각들, 공동체 내에서 악한 영향을 미치는 행동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소유주 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행동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본질 세 번째, 교회는 예수님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주님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타인의 믿음을 함부로 의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다소 부족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지체라고 하더라도, 그 지체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어떠한 상황이든지 지체를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됩니다. 어떤 지체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내가 그 지체보다 더 윗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부디 교회에서 누군가를 구제하거나, 선교헌금을 하거나, 물질적으로 헌신할 때, 눈꼽만큼이라도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면, 즉시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놓쳐선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우리의 영혼은 죄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교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부디 반석 위에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소유하신 이 교회 안에 거하시면서 아름답게 신앙생활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시며,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상에 교회를 세워 주시고, 주님께서 부르신 공동체, 거룩하고 구별된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세우시고 소유하신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기를 원하오니,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 의와 교만과 허물과 죄악됨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바라옵기는, 주님 다시 만나는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으며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오니,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교회와 공동체에 영적인 유익을 끼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해 풍성한 열매 맺게 하시며, 주님께만 영광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10장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 축도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교회의 본질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교회를 온전히 섬기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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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서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의 구호. 여러 교회들이 이러한 구호를 흉내내고 있음. 목회자도 성도들도 할 것 없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표현이 너무나도 익숙함.
“이 때문에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내세우며, 대부분의 현대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초대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자신들의 목회와 신앙생활을 정당화한다.”
“초대교회로의 회귀만이 현대교회의 활로가 된다는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의 형태는 성경이 원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회론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은 백번 옳은 주장이다. 특히 신약성경에 진술된 교회의 참된 형태는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우리 시대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원칙적인 모범을 제시함.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귀환하려는 몸짓? 운동? 등은 정당한 노력임에 틀림없음.”
그렇다면 21세기의 현대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의미를 깨달으려면, 1)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 것인지, 2)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음. 이는 마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집에 대한 정의에 따라 귀환의 의미가 달라지며, 귀환에 대한 정의에 따라 집의 의미가 달라짐.
그렇다면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에서 이 운동이 추구하는 다양성을 살펴봐야 함. 1) 초대교회의 방식을 따르기 위해서 현대교회의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는가? 교회가 현대의 모든 문화를 무조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원시적인 상태를 고집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2) 아니면 초대교회의 방식과 현대교회의 현실을 어떤 비유로든지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대의 문화적 혜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초대교회가 시행했던 방식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취하는 것을 가리키는가? 3) 초대교회에서 이상만 가져오고 방식은 현대교회가 시대에 맞게 제조하는 것인가? 내용은 초대교회를, 형식은 현대교회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는가?
이 운동이 추구하는 세 가지의 다양성이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본질에 주목해야 함. 초대교회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
2. 본론
1) 배경
(1) 예수님의 질문 1.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1)’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
(2)
2)
3. 적용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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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바른성경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셔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마 16:14 그들이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마 16: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마 16: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으니, 음부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 16:19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주겠으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20 그 후에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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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 마태복음의 교회론
교회는 시작점과 최종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친히 세우시며, 그리스도께서 세앙의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심.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심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을 하시면서 부활 이후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해 미래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심. 베드로가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교회가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계성은 암시적으로 표현됨. 이 단락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에만 있고 마가,누가복음에는 없음. 마태는 교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육과 혈”이(요 1:13, 고전 15:50, 갈 1:16; 엡 6:12; 히 2:14) 아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말씀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 강조점은 베드로의 고백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있음. 예수님께서는 이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자신의 것을 선언하심. “그리고 나도”(카고)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함(마 16:18).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예수님의 선언도 없음(하나님이 너에게 계시하셨다..그리고 나도 너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네 가지 말씀이 나옴(마 16:18-19).
(1) 너는 페트로스(돌)이다.
(2) 내가 이 페트라(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3)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4)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
- 매는 것과 푸는 것의 권세.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미래적인 성격(세울 것이다, 이기지 못할 것이다)과 함께 마태의 교회론을 정리해야 함.
(1) 베드로와 반석
if) 베드로와 반석이 다르다면?
예수님께서는 “너의 위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반석 위에”라고 말씀하심. 여기서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할 것(칼빈, 4.6.4.)
if) 베드로와 반석이 같다면?
페트로스와 페트라는 언어유희일 수 있기 때문(벧전 2:8 리또스, 페트라).
ex) 한성은 강도사님, 성은이 망극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작은 돌 같은 베드로를 큰 반석과 같이 여기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은혜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것. 베드로는 반석의 기능을 할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라고 불림.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생각했음(사 51:1).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기초였듯이, 이제 베드로는 새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것.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교회의 단일함을 나타내는 통일성을 의미한다는 것.(베드로를 기초로 교회는 하나이다!)
또 다른 가능성, 반석 = 하나님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용어상의 차이는 있지만 구약에 널리 퍼져있는 사상임(신 32:4, 31; 삼상 2:2; 시 18:2, 31, 46; 19:14; 31:3).
그렇다면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분의 계시를 의미할 수 있음(마 16:17).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인한 뒤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결국 예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음. 문맥상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임.
(2) 예수와 교회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임.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소유하는 분은 예수님이심.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심.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함(마 1:1, 16, 17, 18; 2:4; 11:2; 16:20; 22:42 / 막 12:35 / 눅 20:4; 23:10; 24:5, 23 / 막 13:21; 26:63/ 막 14:6 / 눅 22:67; 26:68; 27:17).
교회에 관한 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예수가 중심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든 일에 첫 번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함. 교회에서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을 앞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음. 교회는 인간사 이전에 예수사임. 교회론에 있어서 기독론이 인간론보다 앞섬.
(3) 반석과 교회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짐. 반석 위에 세운다는 말은 마 7:24-25를 참고.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음.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무너지지 않음.
(4) 교회와 음부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문들이라는 표현이 겹겹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다면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음. 어떻게 사용되었든 음부가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 음부의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된 카티스퀴에인은 전쟁 용어임. “~보다 힘이 세다”라는 의미를 가짐. 이 단어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때 “~보다 힘이 세지 못하다, ~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을 갖게 됨. 이 구절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씨가 그의 대적자들의 문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과 깊은 관련이 있음(창 22:17, 24:6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다시 주심.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들을 가지고 방어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 사탄의 나라는 교회의 세력 앞에 방어할 힘이 없음. 이는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할 것을 알려 줌.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임.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뒤흔듦. 이렇게 교회는 영역을 꾸준히 확장시킴(겨자씨 비유 마 13:31-32; 누룩 비유 마 13:33).
(5) 교회와 천국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여기서 “너에게”라는 말이 베드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인가?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일성을 의미함. “너”라는 말로써 교회의 단일하며 통일된 전체를 지시함.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받음. 교회는 음부에 대해서는 문들을 파괴하는 전투적인 모습을 가지지만, 천국에 대해서는 문을 순조롭게 여는 자격을 가짐. “천국의 열쇠들”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마 23:13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닫는다는 말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음.
이들이 천국을 닫는 것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임.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는 역할을 함. 열쇠들은 교회가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해야 할 것을 암시함.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는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갖는 것.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킴.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능력있는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함. 또한 교회에게 땅에서 하늘을 결정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면 교회는 선교와 치리를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선교와 치리를 진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함.
3. 교회와 세상
1) 세상에서 불려진 교회
교회는 세상에서 부르심 받았음(마 22:9). 세상이 악한 자와 선한 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마 22:10),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혼합성을 지닌 (불완전한) 혼합체로 묘사됨.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교회는 세상 안에 있음(마 5:13-14). 그러나 이는 교회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교회를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 대해 책임을 가짐.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함.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교회는 세상과 마주섬(마 5:14-16). 교회는 산들 위에 우뚝 선 도시이며, 등경 위에 높이 달린 등불임.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임. 문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에 있음(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에 달려있음(마 7:24). 참된 교회의 표식은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만들 동기가 되는 착한 행실임(마 5:16).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 받음(마 28:16-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창 12:1), 예수님께서도 교회에게 “가라”고 명령하심(마 28:19).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름. 교회는 예수님 제자들의 전체이기 때문.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 중에 제자들을 만드시고, 이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제자 삼게 하심. 제자 삼기 위해 세상으로 가는 교회는 먼저 예수의 제자로서의 따름을 전제로 함.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구성함.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파하고(마 4:17; 10:7), 예수님으 고난에 동참함(마 10:38-39; 16:24-25).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며, 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임. 선교는 순교를 전제로하며 순교는 선교를 결과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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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데일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은 이보다 훨씬 진전되었음(물론 이어지는 16:8–11에서 질책을 받지만).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굉장히 높게 평가하게 함(8:27; 14:33).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군중들에게보다 그의 제자들에게 온전한 계시를 하도록 맞춰져 있었음(13:11–17). 따라서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더 적합한 대답을 기대하였고 또 받았음. ‘시몬 베드로’는 그들 중에서 가장 초기의 확신을 분명하게 표명하였음(‘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본서의 서론을 보라). 이 칭호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태의 편집 해설에만 나왔음(1:1, 16, 17, 18; 2:4; 11:2). 11:2에서는 이 칭호가 세례 요한이 표현한 ‘오실 자’와 연결됨.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으로 이 칭호가 공개적으로 표현됨.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첨가되었음(17–19에 있는 베드로에게 길게 말하는 부분도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오해시키는 부분도 있고(본서의 서론을 보라), 또 베드로가 그 실제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22, 23절), 마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베드로 고백이 가지는 심층적 의미를 이해하기 바랬던 것 같음.
즉, 이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단순한 민족적 열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형용사 ‘살아계신’(이것은 물론 구약의 사상을 계승한 의미이다)은 아마도 하나이신 참 하나님과 다른 지역 신들을 대조하기 위해 기록된 것 같음. 빌립보 가이사랴는 목신, 판(Pan) 숭배의 중심지였음.
〈17〉 베드로에게 말한 내용(17–19절)은 로마 주교직의 우월성을 지지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져 왔음. 이 구절들이 실제로 그것을 지지하든 안하든, 복음서 원본에 추가 삽입이 이루어졌다는 어떤 사본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음. 이 구절들 전체에 걸쳐 있는 강한 셈족 언어 특성은 이 말의 팔레스타인 기원을 가리킴.
예수님의 축복(참조, 5:3–10의 주석; ‘복이 있도다’의 의미)은 베드로에게만 주어졌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통찰을 공유했을 수 있지만, 오직 베드로만 특징적으로 그것을 표현했음. 마태는 자주 베드로가 제자 공동체에서 리더 역할을 한다고 묘사함(참조, 10:2; 14:28이하; 15:15; 17:24–27; 18:21). 그는 대변인이었고, 개척자였고, 리더였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통찰은 그의 핵심 위치를 강조하며, 18, 19절에 나오는 엄청난 선언을 위한 토대가 됨.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에 있는 헬라어 대명사는 강조를 나타내는데, 베드로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뒤에 나오는 말들을 강조함. 베드로는 예수님의 참 의미를 선포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역사에서 베드로가 차지하는 위치를 계시함. 베드로의 고백이 “메시아”라는 칭호로 요약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그의 중요성을 요약함. 그의 이름이 여기서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님. 마태는 이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속 사용해왔음(시몬이라는 이름은 17절까지 ‘베드로’ 없이는 사용되지 않았다). 마가복음 3:16과 요한복음 1:42은 이 이름이 아주 일찍부터 주어졌다고 함. 예수님이 여기서 보여주시는 것은 그 이름의 의의임. 이것은 확실히 예수님이 처음 쓰신 것. 왜냐하면 개인적인 이름으로써 ‘페트로스’(Petros, 혹은 아람어 게바, kêpā’)의 다른 용례가 이전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왜 그 이름을 택했는지 말씀하심. 이것은 베드로의 성격을 그렇게 많이 묘사하지 않고(마태는 듬직하다는 뜻으로 ‘바위’를 말하지 않았다),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춤. 여성명사 페트라(petra, 바위)는 남자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명사 페트로스(petros)로 바뀌어야 함. 그러나 말을 주고 받는 것은 분명함(아람어는 특히 더 그렇다. 왜냐하면 두 군데다 같은 형태의 케바[kêpā’]가 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대한 개신교의 과민반응임. 로마 카톨릭은 여기 베드로에게 말해진 것은 또한 후대의 로마 주교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함. 이에 개신교에서는 여기서 ‘바위’는 베드로가 전혀 아니고, 그가 고백한 믿음이라고 함. 말을 주고 받는 전체 단락의 구조는 이 구절이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이라는 것을 보여줌. 이것은 16절이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인 것과 대비를 이룸. 물론 예수님이 그의 역할을 교회의 기초로 선언한 것은 그의 신앙고백에 토대를 두고 있음.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이 은유가 적용됨.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초기에 교회를 발전시킨 정평이 난 리더였음. 기초석의 이미지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지만(고전 3:10이하; 벧전 2:6–8 등), 에베소서 2:20과 요한계시록 21:14은 기초로서의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음.
이 단락의 역사적 확실성에 대한 주요 반대중의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이 사역하는 시대에는 불가능한 교회적 관심이라는 것. 그러나 이 ‘에클레시아’(ekklēsia)라는 단어는 구약적 배경과 관련하여(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할’[qāhāl]의 번역으로 사용함), 예수님 제자들의 메시아 공동체를 묘사하기에 아주 적절함.
게다가, “메시아 공동체 없는 메시아는 유대인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음”(AB, 195). ‘세움’이라는 은유는 베드로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는데, 어떤 수직적인 구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이것은 또한 메시아가 와서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기대를 반향함). 하나님의 정결케 된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는 세례 요한의 선교의 핵심이었고, 예수님 사역의 필연적인 결과였음. 왜냐하면 예수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으로 나뉘어져, 결국 예수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 놀라운 것은 ‘공동체를 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이 공동체를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동체보다, ‘나의’ 공동체로 묘사하는 대담함에 있음.
‘음부의 권세’(the gates of Hades)는 이사야 38:10에 나온다(히브리어로는 ‘gates of Sheol’이다). 지혜서 16:13과 다른 유대 문서에서는 이 단어가 ‘죽음의 문’(시 9:13; 107:18 등), 죽은 자들의 장소를 뜻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공동체가 음부의 권세에 의해 죽거나 갇혀있지 않을 것이라는 뜻. 이 말씀은 죽음의 권세의 공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이야기함. 더욱이 이 본문은 교회가 죽음의 권세를 공격하는 사상을 지지함(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교회의 ‘음부강하’를 말하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회복된 백성으로서,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기초석이 되며, 이 공동체는 영원할 것.
〈19〉 베드로는 앞장서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악한 권세를 극복하는 역할도 함(18:18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듯이, 비록 그 혼자 가지고 있는 권위는 아닐지라도). 열쇠의 이미지는 집의 출입을 통제하는 문지기의 역할보다,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역할을 암시함(참조, 사 22:15과 연결지어, 22:22). 따라서 이슈는 교회의 출입을 허가하는 문제가 아니라(이것은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권위에 있음. 그 권위는 ‘매고’, ‘풀’ 때 행사됨. 이 매는 것과 푸는 것은 무엇이 허락되었고, 허락되지 않았는 지를 선언하는 랍비적 용어임(매는 것은 금지를 뜻하고, 푸는 것은 허락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마도 교회 안에서 법을 제정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 같음. 물론 이 구절은 용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암시를 나타냄에 틀림없지만, 이것은 18:18에 더 구체적으로 적용됨(또한 이 용서의 관점은 요 20:23에 비슷하게 등장함). 베드로가 이 권세를 사용했던 실제 예는 그가 솔선하여 이방인 회심자들을 교회가 받아들이도록 할 때였음(행 10–11; 참조, 행 15:7–11). ‘매일 것이요’와 ‘풀리리라’는 문자적으로 미래 완료임. 미래완료시제는 영어에서처럼, 헬라어에서도 과장의 의미가 있음. 따라서 이 미래완료시제는 다분히 의도적임. 이 경우 하늘이 베드로의 독립적 결정을 비준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하늘에서 이미 결정된 것을 전달하는 것.
〈20〉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4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의 주제는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임. 21–23절은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님의 사명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줌. 그 사명은 인기나 승리보다는 거절과 고난이었음. 일반 백성에게 이런 오해의 위험은 훨씬 더 컸음(참조, 14:22의 주석). 민족적으로 이해된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용어는 잘못된 열정을 더 촉진시킬 수 있었음.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사명이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음.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그리고 잘 이해된 고백이었음. 그러나 21절의 해석없이, ‘그리스도’라는 칭호 자체는 굉장히 부적절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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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 R.T.프랜스 (pp.719-)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 자신도 사용하지 않았음. 다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특별한 권세를 나타내심으로 무리와 제자들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게 만드셨음. 제자들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구를 자발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름(8:29, 14:33). 또한 우리는 분봉왕 헤롯(안디바, 14:1-2)의 기이한 추측과 세례 요한의 더 직관적이면서도 조금 조심스러운 판단도 듣게 됨(11:2-6). 따라서 이 갈릴리 사람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명확하게 할 때가 온 것. 예수는 누구인가?
베드로는 처음에 메시아에 대한 통찰력 있는 고백을 통해 칭찬받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쏟지 못해서 크게 질책 받게 됨(23절). 베드로는 13-20절의 중심인물임. 질문은 모든 제자에게 주어지나 메시아로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이며, 이어지는 칭찬은 베드로에게만 2인칭 단수로 주어짐. 역사적으로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자로 행한 것으로 보이나, 마태는 17-19절을 통해 그가 베드로를 단순한 대변인 이상의 역할을 한 인물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함.
그러나 모든 초점은 교회의 설립과 관련된 그의 개인적인 역할에 맞추어짐. 이런 식으로 마태는 사도행전과 이후 기독교 전승에서 제시하는 부활 후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예수의 제자로 구성된 공동체를 유대 전통과 구별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자라는 베드로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기회로 삼음(나의 교회. 이례적인 헬라어 어순). 18절에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관련된 언어유희도 바로 이렇게 베드로가 초석을 세운 역할에 초점을 맞춤.
그러나 21-23절에서 베드로의 실수는 메시아라는 호칭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됨. 그의 고백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아 사역의 본질에 대해 전파할 수 있을만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베드로가 잘못 깨달았다면 일반 대중의 오해는 어느 정도이겠는가?
하지만 베드로가 잘못 깨달은 것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님. 1세기에 메시아라는 호칭은 자기 백성에게 보낸 인간 구원자를 뜻하는 희망적인 호칭으로 사용되었음.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이 호칭에 대해 옛 다윗처럼 나라의 독립과 영광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으로 생각했을 것. 따라서 메시아라는 호칭은 피지배 민족의 정치적인 열망을 떠나 설명하기 어려운 민족적인 용어임. 우리는 22-23절에서 베드로가 예수가 선포한 고난과 죽음을 메시아와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게 됨. 베드로에게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영광과 성공을 뜻하기 때문. 예수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베드로의 깨달음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 그러나 예수의 실제적 사역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이 아무리 제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통찰은 예수를 선지자로 제한하고 환호하는 대중들보다 앞서 있으며, 예수를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과 같은 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결정적인 인물로 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매우 중요한 호칭임.
**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는 사람들의 “모임”(종교적-정치적)이라는 뜻임. 유대적 상황에서 이 단어는 특히 70인역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 백성의 “총회”로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를 나타내는 용어로 생각하기 쉬움.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나의 에클레시아라는 대담한 표현을 사용하심. 이 이례적인 헬라어 어순은 “나의”에 초점을 맞춤. 이 구절은 예수와 예수의 교회가 이스라엘과 갖는 관계에 대한 신약 성경의 이해에 나타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역설적인 조합을 담고 있음. 총회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랑스러운 구약 성경 단어임. 그러나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와서 이러한 총회는 재구성될 것이며, 이 모임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메시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출 것임. 이것이 바로 그의 모임임. “나의 에클레시아”는 마태가 그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범국가적 하나님의 백성을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제시함.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매는” 은유의 초점은 죄에 대한 판단에 맞추어짐. 두 동사의 목적어는 중성임. 매고 푸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문제라는 것.
미래완료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이례적이며 사실상 부자연스러운 표현. 만일 마태가 매일 것이라, 풀릴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면, 단순 미래 수동태라는 훨씬 자연스러운 구문을 사용했을 것.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미래완료 수동태임. (다른 경우는 70인역)
본문에 미래완료형이 반복된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임. 단순미래인 경우 베드로가 주도권을 쥐고 하늘이 따랐을 것. 그러나 미래완료는 베드로가 결정한 내용이 이미 하늘에서 결정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를 교회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주도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결정을 이루는 신실한 청지기로 제시함. 본문은 신적 보장에 대한 약속이 아닌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에 합한 결정을 하게 하는 신적 인도하심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음. (카슨, Davies and All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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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 데이비드 터너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를 세례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음(마 14:2).
예수가 엘리야라는 생각은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말하는 말 4:5로부터 비롯되었을 것. 아마도 예수의 기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엘리야의 기적에 대한 성경 기사들을 상기시켰을 것. 예수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임(21:11). 아마도 이러한 연관성은 예레미야의 심판 말씀 및 그 당시 성전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을 것(예레미야는 유다와 성전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격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음). 예수에 대한 모든 대중적 견해들이 긍정적이긴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음. 무리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여겼더라도, 그들의 이해는 피상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었음(27:15-26).
* 두 번째 질문과 대답(16:15-16)
16:16에서 베드로는 제자 집단을 대표해서 대답함. 베드로의 주목할 만한 대답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정체성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과 관련시키는 것에 있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의 연결에 대한 가능성이 있는 성경적인 배경은 삼하 7:14; 대상 17:13; 시 2:6-8, 12; 89:27-29에 나옴.
역설적이게도 예수가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라는 대제사장의 요구는(마 26:63)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주요 주제들을 되풀이함.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거짓 이방 신들을 암시적으로 구분함.
* 예수님의 대답(16:17-19)
예수는 우선 베드로에게 복을 선언함. 대중적인 혼란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고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때문. 예수는 자신이 세울 교회에서 베드로가 기초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함. 에클레시아는 마태복음에서 이곳과 18:17에서만 등장함. 어원적으로 ‘밖으로 불러낸 사람들’에게서 기원했다기보다 모인 공동체라는 개념이 에클레시아가 가진 의미의 핵심임. 예수가 제자들의 미래 공동체를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모으신 언약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풍부한 유산을 생각나게 함(고전 10:1-11; 히 12:18-24).
반석은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하는 것이 선호됨. ‘음부의 문’은 사탄과 죽음의 영역으로서 성경의 스올을 암시함. 예수는 대형을 갖춘 악한 권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질 교회를 파괴하지 못할 것이라 약속함. ** 많은 성경 본문들이 하나님의 백성(집)을 건축하는 것에 대해 말함. ex) 렘 12:16, 18:9, 31:4, 33:7, 42:10; 암 9:11; 고전 3:9-15, 14:4-5, 12; 엡 2:19-20; 딤전 3:15; 히 3:1-6; 벧전 2:5, 4:17.
베드로에 대해 예수가 대답한 세 번째 진술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도인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줌으로써 교회를 천국과 연결시킴. 이는 교회가 이 땅에 대해 천국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을 암시함. 열쇠는 권위를 상징할 수 있으며 그 권위는 금지하고 허용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논란이 많은 주제임. 이 권위는 귀신 축출, 영원한 운명, 주석적 및 교리적 선언, 혹은 교회의 권징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왔음.
예수는 자신을 건축자로 묘사함. 이러한 점에서 예수는 자신을 교회로 기초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또한 베드로의 사도적 고백도 교회의 기초가 아님. 고백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바로 교회의 기초임. 그러나 문맥상 베드로는 전체 사도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홀로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서 교회의 기초가 된 것. 오늘날 마태복음에 대한 복음주의 주석 학자들 대부분이 이에 동의함.
(J. Broadus, Blomberg, Bruner, Carson, France, Hagner, Hendricksen, Keener, Morris, Ridderbos)
열쇠와 매는 것과 푸는 것
기초와 열쇠 은유들을 관련시키는 것은 우리가 교회와 천국을 분리시킬 수 없으며 또한 교회는 땅에서 천국을 확대시키는 기관임을 보여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열쇠를 관리하고 천국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함(사 22:15, 22; 계 1:18, 3:7, 9:1-6, 20:1-3). 이 권위는 매고 푸는 것을 통해 행사됨. 사도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조절하여 그들의 죄가 용서받도록 함(마 10:7, 13:19-23, 24:24, 28:18-20).
다른 사람들은 16:19와 18:18을 비교하면서 매고 푸는 것이 교회의 권징을 묘사한다고 결론 내림. 이는 매고 푼다는 주제가 특정 행위들을 허용하고 금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성경 율법의 할라카적 해석을 가리키는 랍비 본문들을 언급함으로써 지지를 받음. 이 해석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 천국에 들어가는 개념과 공동체 내에서 용인되는 삶을 유지하는 것을 결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음. 그렇다면 교리와 권징은 실제로 하나이며(Brnuer),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써 권한을 부여받은 대리인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문을 열거나 닫는 것.
그러나 이 문제는 문맥을 통해 해결해야 함. 16:16-19의 이미지는 주그하살인 예수에 대한 사도적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들어감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과 관련이 있음.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지도자들이며 천국을 이 땅에 확대하는 기관으로서의 베드로와 사도들은 천국의 문지기들임. 그들은 16:16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권위 있게 선포하도록 안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통해 예수를 고백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함. 예수를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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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삼 – 긍휼의 목자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의 변방 끝자락에 위치해 있음.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심. 그것은 바로 베드로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나의 교회”임.
구약에서의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음.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교회, 나의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함. ‘나의’라는 말은 ‘나로 인해, 나로 말미암은’ 또는 ‘내가 소유한, 나와 언약한’ 또는 ‘나를 위한’ 등으로 해석이 가능함.
예수님은 자신이 새로운 언약의 핵심이고 본질임을 시사하심.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 그분을 통해 성령이 주어짐. 그분이 곧 종말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처소임.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라고 주장했음. 이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밝힘.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은 세 가지임.
1)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인자임. 단 7:13-14를 배경으로 한 ‘그 사람 같은 이’이심. 세상 끝에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분을 섬기게 하신다는 그 인자임. 그 천상적인 존재인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사하는 권세를 가짐(9:6).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받았음(마 11:27).
그러나 지금 이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 여기에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왔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그 사람의 아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자의 모습이 드러남.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인자가 되심으로 드러나게 된 계시의 사실임.
2) 메시아
예수님은 종말에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열방을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요, 왕인 메시아이심.
3)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옛 이스라엘의 실패를 친히 담당하시며,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순종과 율법의 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심(4:1-11). 예수님은 실로 불순종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한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임. 예수님 안에서 구약에서 바라보았던 인자,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의 기대와 이상들이 모두 실현됨.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는데, 반석은 무엇인가? 채영삼: 반석은 베드로의 고백임. ->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 위에 교회를 세운 반석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임(마 7:23-27, 심화 적용 : 교회의 영적인 시험이 난무해도 교회는 쓰러지지 않음). 마태는 베드로가 흔들림 없는 반석이라고 제시한 적이 없음.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배신을 기록함. 흔들림 없었던 분은 예수님뿐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유대와 이방 지도자들의 멸시와 살의에도, 십자가 처형에도 흔들리지 않았음. 음부의 권세도 예수님을 흔들거나 무덤에 가두어 둘 수 없었음.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설 때에만 흔들리지 않음.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뜻은 이 교회가 세워진 신앙고백의 내용,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임을 의미함. 교회의 본질은 예수 자신임.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임. 예수님께서 자신이 불러내신 자들, 새로운 종말의 공동체를 자기 자신 위에 세우시는 것. 자신이 그 기초 돌이 되시고, 반석이 되심.
설사 베드로가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라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베드로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결국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능력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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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리델보스 – 마태복음
16:13
가이사랴 빌립보는 분봉왕 빌립이 확장하고 미화했으며, 로마 황제의 영예를 위하여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였음. 여기에 빌립이란 이름을 덧붙인 것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더 유명한 도시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함이었음. 그 도시는 헤롯이 건설하였음.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대중들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음. (이미지 메이킹에 휘둘리는 것 x)
누가복음 9:18은 예수님께서 이 대화 전에 기도하셨다고 기록함. 예수님께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음이 분명함. 메시야로서 이 땅에서의 여정을 끝낼 시점이 다가왔기 때문. 또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수치스러운 비하에 자신을 내맡겨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 제자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만 했음. 따라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제자들의 불확실함은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16:16 주 그 살 하 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상과 대조됨. 예수님의 메시아직분은 인간의 환상이나 망상으로 표출된 공허한 과시나 가식의 위험이 아님.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터를 둔 살아있는 실체임.
16:17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의 축복이 따랐음. 축복의 동기는 베드로의 깨달음이 아닌 그 비밀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음. 인간의 본성과 본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
육과 혈(사람)은 본성으로의 인간, 하나님의 간섭을 떠난 인간을 신적인 것과 대조시킨 말이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16:18
네가 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에, 너는 베드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베드로의 고백이 그의 강건함의 원천이 되었음. 이 구절이 베드로라는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받은 때라고 암시하지 않음. 요 1:42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셨음. 이 반석 위에 라는 말씀은 명백히 베드로를 지칭하는 것(헤르만 리델보스).
엡 2:20과 계 21:4에서 다른 제자들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위한 기초로 부르심 받았으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권세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어졌음(요 20:21-23). 심지어 교회에게도 주어졌음(마 18:18-20). 베드로는 그의 고백 때문에 홀로 선발된 것.
그러므로 주님께 받은 베드로의 축복과 위치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표식이 되었음.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일을 그와 함께 하게 될 때,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의 모든 사역을 위한 조건과 지침(지도 원리)이 되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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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반 – 그랜트 오즈번
반석은 베드로이다! (그랜트 오즈번)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교회”(에클레시아)가 등장하는 3회의 경우 중 첫 번째임(18:17에서 두 번 나타남). 어떤 이들은 이 단어의 두 구성 요소(에크 + 칼레오)를 근거로 밖으로 불러낸 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이 단어는 일반적인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을 뜻함.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
16:19
열쇠는 고대 세계에서 하늘의 영역으로 가는 문을 여는 권세와 능력을 얻는 것을 의미했음. 열쇠를 갖는다는 것은 상당한 권세를 의미함. 계 3:7에서 예수님께 반복됨(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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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스윈들 **
베드로의 대답의 의미 두 가지
첫째, 베드로는 그가 신학적으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실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음. 그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음.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이 과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존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았을까?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사람보다 위대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며, 메시아로 등극할 자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았음.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베드로는 그 말의 의미를 미처 다 알지는 못했을 것.
둘째, 베드로는 동료들 앞에서 위험을 무릎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음. 확신이 없어서든 두려움 때문이든 나머지 제자들은 침묵했음. 아마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과감하게 의견을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의 몸짓이나 반응을 보고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 어쨌든 나머지 제자들은 안전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그러나 베드로는 진실되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음.
그런데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은 혈과 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것. 그의 통찰력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음.
요 6: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반석을 베드로의 확고한 신앙고백으로 보고 말씀하신 것. 고백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교회의 견고한 기초가 될 수 있는 것.
이러한 교회의 기초, 반석은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할만큼 견고함. 죽음과 지옥의 권세, 사탄, 마귀, 죄인들까지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스도는 음부의 권세를 쳐부수는 극강의 정복자이심. 전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살아남을 것.
두 번째 약속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는 것. 찰스 스윈들: 베드로가 오순절에 믿고 회개한 유대인들을 신앙 공동체로 초대할 때 교회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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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 주석 **
마 16:17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통찰이나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짐.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았다면, 우리는 믿음의 공로를 거기에 돌릴 수 있었을 것.
만일 믿음이 우리 내부에서 온다면, 우리 자신의 공로가 인정 받아야 함. 그런데 만일 믿음이 우리 외부로부터 온다면, 하나님께서 공로를 인정 받으심. 소경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듯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영적인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함. 예수님께서 그러한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만약 당신의 믿음에 대해 자랑할 기회가 오면, 하나님에 대해 자랑하라.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 마카리오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정에 의한 호의를 의미함.
16:17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를 부추겨서 예수님께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시라고 말하는 반면(16:23), 오늘 본문에서는 아버지께서 이 진리를 베드로에게 계시하셨다고 강조함. 16:18에서 베드로는 반석이지만, 16:23에서 그는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됨. 이 대조적인 이미지는 베드로의 우유부단한 특성을 보여줌.
16:18
베드로는 반석인가?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반석은 네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음.
1. 반석은 예수님 자신(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에 의한 구원 사역)을 가리킴.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신적인 건축가이시며, 그분 자신이 모퉁잇돌이시라는 의미임.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님. 초점은 베드로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에 있음.
2. ‘반석’은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 혹은 첫 번째 감독인 베드로임.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학자들에 의해 장려되었음. 이 견해는 그들 교회의 교권 제도에 권위를 부여하며,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 각각을 교회의 최고 교황으로 여김. 그러나 이 구절들에는 계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초대교회가 베드로에 대해 큰 경의를 표혔으나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 역시 전혀 없음. 이러한 견해는 그들의 기원을 베드로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교회들을 배제시킴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킴.
3. 반석은 베드로가 먼저 했고, 또 이후에 모든 참 신자들이 하는 믿음의 고백을 가리킴.
이 견해는 2번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장려되었음. 하지만 베드로의 고백을 존중하고 그의 지도력을 도외시함으로써 이 구절을 불필요할 정도로 추상적으로 만들고 있음.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여겨졌음. “너는 베드로라”에서 “너”는 강조어구로, 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함.
4. 반석은 제자들의 지도자와 대변인(기초석)으로서의 베드로를 가리킴.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 보였듯,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신분과 역할을 드러내셨음. 이 문맥이나 어떤 서신서에서도 사도직의 계승을 발견할 수 없지만, 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베드로의 역할은 도외시되어서는 결코 안 됨. 이 견해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은 사람이고 그리스도를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선구자라는 점에서 2번 견해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사복음서 모두에서 두루 발견됨.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함. 베드로의 권위는 사도행전에서 젲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대변인이 되었을 때 명백해졌음. 대변인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음.
후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것을 상기시켰음(벧전 2:4-8, 고전 3:11).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즉 베드로가 여기서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에 의해 이 교회에 결합됨(엡 2:20-21, 계 21:14). 베드로와 같은 참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여기며, 기꺼이 그분을 공적으로 고백함.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에 대해 칭찬하셨음. 베드로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그리스도 나라의 기초가 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불멸성과 자신을 믿어 자신의 교회에 속하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심.
16:19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주리니’는 미래 시제인데 그 시점은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가 예수님과 교제를 회복한 요 21장 이후의 시간일 것. 권세의 매고 푸는 측면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되었음(18: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신자들과 오순절 이후 교회에 대해 그가 취했던 지도력에서 보인 제자들 그룹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권위를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음.
어떤 이들은 천국 열쇠가 교회의 징계, 입법, 행정을 수행할 권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열쇠가 죄의 용서를 선언할 권위를 준다고 말한다(요 20:23). 가장 그럴듯한 것은 열쇠 자체가 교회에게 주어진 천국의 권위라는 것.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기회가 포함됨(행 15:7-9). 이 열쇠들은 매고 푸는 열쇠들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건물의 기초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 그 건물의 열쇠들을 받았음. 열쇠는 그가 그 건물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통제하는 문지기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건물을 관리할 청지기를 묘사하는 것.
땅과 하늘은 공간적인 연관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지상 행동들 배후에 있는 신적인 하늘의 권위를 가리키는 것. 매는 것과 푸는 것은 규칙을 정함이나 징계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랍비적 개념. 제자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움에 있어 어느 정도 규칙 제정에 관여할 것이었고,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징계할 권위도 갖게 될 것이었음. 그러므로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선포자로서 제자들의 영감을 가리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천국문을 열거나 닫아놓는 것을 결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내면의 그 길을 찾도록 돕는 데 우리를 사용하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 문은 활짝 열려있음.
[문맥상 16:21-28 예수님의 첫 번째 죽음 예고 / 베드로 책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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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pp.439)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니 시몬이 신령한 반석이라고 칭찬 받게 된 이유는 그의 본래 인격이 견고해서가 아니고 그가 이제 고백한 신앙 그것 때문이다. (중략) 이 신앙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이 신앙이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그러니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이 신앙)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신앙이 반석이라는 명칭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신앙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였다(고전 3:11). 교회의 견고한 터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가리켜(그 신앙 때문에) “산 돌”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기도 하였다(벧전 2:4-5).
6:19 천국 열쇠
천국 열쇠는 베드로만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도들도 받은 것이다. 열쇠는 주관하는 권세를 의미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신으로서 교회를 치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권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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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주석
마 16:17 혈육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람이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구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찬양하도록 권면하고 계신다. 혈육은 하나님의 특별한 빛을 알지 못한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볼 때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는 하늘의 지혜에 관한 신비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함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까지 인간의 모든 지각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통찰력을 믿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의 어두운 지각을 밝혀 주시도록 겸손하게 빛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게 해드리자. 믿음을 얻은 자들은 자신의 우매함을 알고 자신이 받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도록 하자.
마 16:18 이 반석 위에... (반석 = 신앙고백)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거룩한 일치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도록 신령한 건물을 형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이 전체 교회를 위한 공통된 기초가 된다고 선언하심으로 주님은 이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신자들을 베드로에게 결합시키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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