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5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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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00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
본문 창 17:1
Genesis 17:1 NKRV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험한 인생길 가운데 다닐지라도 늘 주의 백성들을 은혜로 붙드시고 말씀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고난보다 더 크시고 환난보다 더 강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늘 은혜입은 자로서 합당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늘 우리를 만져주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는 사실 길눈이 밝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몇 번 가본 길이라 할지라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종종 헤맬 때가 있다. 또한 자주 다니던 길이라 할지라도 네비게이션에 의존할 때가 많은 편이다. 저와 비슷한 분들이 더러 계실런지 모르겠다. 결혼 전에 타던 차를 10만키로 정도를 탔었다. 오래된 차여서 매립된 네비게이션이 아니었고, 흔히 말하는 사제 네비게이션을 달고 다녔는데, 좀 많이 구형이었다.
제가 경남 하동에서 사역하던 어느날, 초행길을 나서게 되어 한창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무렵, 아직 갈 길은 멀었는데 네비게이션이 갑자기 먹통이 된게 아닌가. 길이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네비게이션이 갑자기 멈춰버렸으니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평소 길이 쉬워도 네비 없으면 잘 못움직이는데 길도 모르는대다가 네비게이션도 먹통이 되니 어찌 할 바를 몰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 성도의 신앙은 세상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때문에 때로는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가 있다. 우리가 설령 어려움 가운데, 더 나아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때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따듯한 사랑의 빛이 우리의 인생길 가운데 비췬다면 우리는 그곳이 어디라도 하나님만을 붙잡고, 하나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 어렵고 힘들고 쓰러질 것 같은 벅참이 있겠지만은 그때그때 하나님 능력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에 한발 한발을 내딛을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인생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끊겼을 경우이다. 네비게이션 소리만 멈춰도 당황하고 곤혹을 치루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멈추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던 집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갔으며, 그 여정 가운데 조금씩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신앙의 기복이 있었고, 영적 미성숙 혹은 여러 위험으로 인해 믿음에서 미끄러지기도 하였다. 특별히 오늘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인 창세기 16장을 보면 성경기자는 아브라함의 집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음을 매우 우울하게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6장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비극 그 자체였다.
가정의 끊임없는 불화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갈이 아들을 낳자 사래와 하갈의 관계가 깨어져 갈등의 관계가 되었다. 사래는 하갈을 그저 아들을 낳는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아이가 생기자 하갈은 교만해져서 사래를 멸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래는 아이를 잃더라도 하갈을 내쫓기로 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되었고, 쫓겨난 하갈의 마음에도 사래와 아브라함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녀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사래는 그 여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상황과 타협한 사래의 선택은 예기치 못한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암담한 신앙의 여정을 겪게 된다.
그가 본토 친척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갈 수 있었고 신앙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5장에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자기와는 비교되지 않은 큰 제국의 왕들과 전쟁을 하였고, 그 와중에 하나님은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기에 그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던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이었고, 오늘 본문인 창17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가 그의 나이 99세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13년 이라는 기나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인생의 암담한 신앙의 여정을 지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히 반응하던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 속에서 자그맣게 13년 동안이나 이렇다할만한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양들에게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의 순간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과 타협한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사래와 아브람이 그리 크게 잘못한 일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는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사래와 아브람의 인간적인 결정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겼다. 무려 13년이나 말이다. 초행길 운전하다가 한 5분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되어도 불안한 것이 우리의 인생이거늘, 13년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중단되었더라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얼마나 근심과 염려할 것 투성이었을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설령 폭풍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내 귀 가운데 들리고 있다면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인생의 위기나 역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기이자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인생의 풍파가 없어도, 인생의 고난이 없어도, 그야말로 잔잔한 물가를 지나는 것 같아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더라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분의 말씀을 주신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고 하신다. 전능한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샤다이’ 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는 구약에서 48번이나 등장할 만큼 자주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와 비교될 수 없을만큼 강하고 능하시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록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신바를 이루신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대로 만물을 운행하신다. 설령 폐경이 한참이나 지난 사래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를 정하시고 계획하셨다면 약속하신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의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브람에게 뭐라고 요구하시는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다. 개역성경에 ‘완전함’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타밈‘인데, 이것은 ‘온전한’, ‘흠 없는’ ‘손상되지 않은’ ‘올바른’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흠없는 상태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가꿀 수 있겠는가? 죄인인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율법적인 완전함을 갖출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는 말씀은 제의적인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새번역성경에서는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 라고 번역하고 있고, 우리말성경에서는 “내 앞에서 온맘으로 순종하여 깨끗하게 행하여라" 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명령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하라!” 혹은 “너 스스로 거룩해져라!” 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시금 믿음을 갖춰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합당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완벽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올곧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런 요구를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왜? 그분의 은혜를 아브라함에게 많이 부어주셨으니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요구를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위치와 자격이 있으시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그분의 많은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던 자로서, 이제는 은혜를 입은 자 답게 하나님의 말씀에 바른 믿음, 바른 순종, 바른 행실, 바른 신앙생활로 반응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요구하셨다. 이를 그에게 요구하셨다는 것은 이 영역이 아브라함에게 맡기신 순종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억만죄악 가운데 건지심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을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장차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지극히 영광중에 들어올려지게 될 은혜를 이미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크신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바 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실 것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주님은 말씀하시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때로 인생의 환란이 임할 수 있어도,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의 지극히 어두운 밤이 될 수 없다.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기를 바라시는가?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라. 은혜입은 자답게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며 험난한 인생길을 은혜로 인도하실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경험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님, 은혜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숙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며, 더 주님만 붙들고, 더 주님께 순종하는 복된 인생 되게 하셔서 늘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시는 말씀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 살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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