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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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서론]
오늘 말씀은 시편 90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편이 모두 5권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매우 의도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5권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시편 90편은 제 4권에 나오는 첫번째 시편입니다.
제 3권의 마지막인 시편 89편을 보십시오.
1-37절까지는 하나님이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38절부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다윗의 언약을 깨뜨리셨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다윗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언약인데 그것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때 아마도 시편 89편은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다룬 유다의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더러운 이방민족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실망스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잘 표현한 시편이 바로 89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시편이 제 4권의 첫번째 시편 90편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제 4권의 첫번째 시편은 과연 무슨 말을 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어떤 찬송과 기도를 할수 있을까요?
[본론]
우선 이 시편의 제목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이 시편이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나온다는 점에서 모세는 참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리의 신앙목표도 바로 이 단어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람, 은상이의 기도
이런 수식어가 남는 우리의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엄청난 수식어에 비하면 모세의 일생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처음 40년은 화려한 이집트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또다른 40년은 이집트에서 도망쳐 양을 치는 평범한 목자로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께 부름받아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모세가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자 기도라는 점에서 이 시편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을 유튜브에서 인터뷰를 하면 최소 100만뷰는 찍지 않을까요?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의 단맛, 쓴맛, 피맛 다 본 그가 하는 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을 우리가 한번 잘 들어봐야 겠습니다.
1절입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여기서’거처’라는 단어는 원래 안식처, 피난처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을 보면 dwelling place, 즉 사는 곳이라고 번역합니다.
보통 집이 안식처, 피난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세의 거처는 어디였을까요?
우선 그는 평생 자기 집이라고는 찾을수 없던 사람입니다.
이집트에 있을때 그는 왕자였지만 입양된 유대인이었기에 화려한 왕궁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항상 긴장하며 살아가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아갈때도 도망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곳도 그에게는 안식처, 피난처로서 거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한후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거쳐야 했습니다.
광야의 삶도 백성들의 불순종과 도전에 직면해야하는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그곳도 그에게는 거처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안식처이자 피난처인 거처는 과연 어디였을까요?
그는 어디서 안식과 보호를 얻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의 거처임을, 자신의 안식처이자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 되셨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의지하고 안식할 집, 피난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때로 사람을 의지하기도 하고, 물질이나 지위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존재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나를 떠날까봐 두렵고, 잃을까봐 두려워 우리의 내면은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불안하기만 합니다.
과연 내가 피할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텔레비전을 보며 바닷가 방파제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파도가 거센 날이었는데도 방파제 안은 고요했습니다.
주님이 마치 우리 삶의 방파제같은 분이시구나라고 묵상했습니다.
이처럼 시편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만을 우리의 거처로 삼아야 할까요?
2절입니다.
2절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산과 땅을 보십시오.
우리의 짧은 인생에 비하면 이런 자연물들은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관광지같은 곳에 가보면 수백년 수천년된 유적지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모든 것들보다 더 오래 계시는 분을 말합니다.
그것들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것들을 낳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산과 땅보다 더 오래 계신 영원한 분은 누구일까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결국 사라질 운명이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영원하십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할수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삶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3절입니다.
3절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이 비교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흙으로 돌아가야하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영원히 살것처럼 욕심내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저 연약한 인생일 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건강을 지키더라도 결국 병과 죽음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하와이 산불을 보십시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때로는 자연재해 앞에 무력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하와이 산불때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거기에는 재난 경보 시스템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또한 인류 최강의 도구인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강풍은 눈깜짝할 사이 불을 옮겨놓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4절입니다.
4절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연약할뿐 아니라 유한합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지나보면 우리의 삶은 마치 밤의 한순간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밤의 한순간같은 짧은 인생인데도 우리들은 아등바등 살아가기 바쁩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잠깐 덧없는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다가도 금새 잊어버리곤 합니다.
다시 주어진 일상의 패턴 속에 빠져 망각이 작동합니다.
나이들어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보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싶습니다.
누구말대로 나이가 마치 자동차 주행속도같이 느껴지기만 합니다.
지금 제 나이가 40대니까 40킬로미터로 시간이 흘러가는듯 합니다.
20대에는 그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서 시간이 많은줄로만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에게는 천년도 지나간 하루와 같습니다.
천년이란 세월이 우리에게는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는 때로는 무력함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계속해서 5절입니다.
5절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또다시 우리의 짧은 인생을 한 순간의 꿈이자 풀 한포기에 비유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지나간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질때가 있으신가요?
저도 과거의 어느 순간들은 내가 꿈을 꾼것인가 싶을때가 있습니다.
군대시절이 2년이었는데 마치 꿈꾼것만 같습니다.
30대에는 외국에서 지낸 시간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진짜 거기서 살았나 싶기도 하구요.
나중에 나이들면 지금의 순간이 그럴수도 있겠지요.
누구나 힘든 시간이지만 나중에는 지나가는 꿈처럼 느낄수도 있습니다.
6절입니다.
6절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금새 시드는 꽃과도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건조해서 풀과 꽃이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마치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의미없는 것처럼 보이는 꽃과 같이 우리의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 백성들이 이러한 시를 4권의 시작부분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의 기도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게 아닐까요?
모세 역시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사라진 1세대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 왜 인간은 이토록 무력하고 허무한 삶이 되어 버린 것일까요?
7-9절입니다.
7절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8절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9절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인간의 삶이 무력하고 허무하게 된 이유의 뿌리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노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죄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한것도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들의 죄때문입니다.
그칠수 없는 죄악으로 인해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가요?
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건강해도 80살 정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100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어느 나라든지 80살이면 장수한 사람에 속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이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인생인데도 그 인생이 수고과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주변에는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최근에 장례식장 갔더니 그 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수고하시다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갔더니 암 4기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1년을 거의 병원에서 보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도 가족들도 모두 수고와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또한 제 친한 친구중에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수고와 슬픔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저 또한 좋은 친구 하나를 잃어버릴까봐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모릅니다.
특히 코로나 시절 우리는 주변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수고와 슬픔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만약 여기서 이 시편이 마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있습니다.
이런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11-12절입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세상의 처세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사는 법을 배운다고 인생의 수고와 슬픔에서 과연 벗어날수 있을까요?
오히려 남보다 더 잘살려다가 더 수고하고 더 슬퍼하는 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수고와 슬픔이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삶이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죽음을 알때 우리는 오히려 삶의 진실을 더 분명히 깨달을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국 전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니까 성경을 읽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다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런 정보는 다른 책에서 더 많이 얻을수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법, 대학입시에 합격하는 법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다이어트 성공하는 법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생의 모든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믿음이 아닌 미신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모든 문제가 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리 인생에 수고와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이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13절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짧은 인생,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찬 인생에 필요한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떠나신 주님을 다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에 필요한 것은 구원의 밧줄을 던져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때마다 모세가 구한 것은 주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때에도 그들이 구할 것은 주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떠나신 주님께 다시 돌아와달라고 간절히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되는 고난가운데 있을때에도 결국 의지할 것은 주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14-15절입니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 변함없으신 사랑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멸망으로 수고와 슬픔의 날수만큼 회복과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시드는 것과 같지만, 주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침마다 새롭고 영원합니다.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찬 인생에 이 영원한 주님의 사랑이 부어질때 인생은 달라집니다.
아침에 눈을 뜰때 더이상 고통과 괴로움의 하루가 시작되는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실 일을 기쁨가운데 기대하게 됩니다.
마지막 기도인 16-17절입니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삶의 지혜와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으로 시인이 두번씩이나 언급하며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손으로 하는 일을 견실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중요하니까 2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견고하게 세워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모세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짧은 인생가운데 이 땅에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일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길 원하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삶을 수고와 슬픔으로 허비하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당하며 소명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저는 이 기도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일에 은총을 베푸셔서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교회를 위해 하는 일에 은총을 베푸셔서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내 삶의 거처로 삼아 덧없는 인생 속에서도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님 안에서 견실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