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7 저녁] 하나님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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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526 목마른 자들아 / 52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본문 이사야55:1-2(구p.1035)
요즘 티비나 인터넷에 등장하는 광고들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 같다. 광고 속에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유명한 연예인들이 나와서 그 광고를 보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아이돌 가수들이나 국내 연기파 배우들이 각종 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여리여리한 몸매, 갸날픈 턱선, 뚜렷한 이목구비, 개성넘치는 표정들을 통해 그들만의 매력들을 발산한다.
그러나 광고의 주 목적은 광고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외모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광고의 주목적은 광고를 통해 상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이다. 이 광고를 보고 있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법한 광고문구를 전달하고, 지금 광고하는 이 제품이 정말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이며, 이 제품이 당신의 삶에 큰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소비를 조장한다.
당장 그 제품이 나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보다 지금 선전하는 이 제품이 훨씬 좋은 제품이니 사라고 한다. 이 제품을 구입하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 윤택함, 삶의 질을 올려줄 것이니 꼭 사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광고마다 경쟁이 치열해진다. 때로는 나의 강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경쟁사를 헐뜯기도 하고, 더욱 유명한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제품을 홍보한다. 그렇다보니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최근 소비지출의 경향이 그 제품의 필요성 때문보다 광고의 퀄리티, 그 광고의 카피문구, 그 광고의 출연하는 연예인 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통계결과도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필요 이상의 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와도 같다. 굳이 내가 필요하지 않아도 남들이 갖고 있으니 나도 가졌으면 좋겠고, 나에게 당장 급하지 않아도 광고를 통해 잘 포장된 모습들을 보니 사지 않을 수가 없으며, 저 제품을 사용하게 되면 내가 더 만족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이 시대에 필요 이상의 소비를 부추기는 그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이 땅에서 만족을 누리고자 하나 영원한 만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요, 기쁨을 누리고자 하나 무한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며, 평안을 누리고자 하나 참된 평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만족은 복지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복지가 좋다고 하여도 모두가 100% 만족하는 삶이 될수는 없다. 인생의 즐거움은 기쁨이 가득하고 웃을 일이 가득하다면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하지만, 죄악이 가득한 이 땅에서의 우리네 인생 가운데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을 뿐더러, 내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불편함, 수고를 겪어야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
또한 세상은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들을 다 누리면 만족을 누린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벌들은 그야말로 한량없는 만족 가운데 살아가야 맞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가진 것들을 누가 빼앗아가지는 않을런지, 내가 가진 주식들이 폭락하진 않을지 매번 노심초사하며 긴장하며 살지 않겠는가.
또한 평안은 걱정거리들이 잘 풀리고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진정 인생 속에 걱정거리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아무 탈 없이 생각하는대로 일이 잘 진행되기만 하던가? 결국 이 땅에서는 인생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유한한 인생이 유한한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일시적인 것들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한하신 분, 영원하신 분, 불변하신 분께 주목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서 말씀은 메시아를 통한 선민의 구속과 회복을 예언하는 장 중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풍성한 구원의 은혜로 만민을 초청하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과 포도주와 우유 등 생명을 위하여 정말 필요한 것들을 다 갖추어 두시고 굶주린 자들을 부르신다. 그것을 먹기 위해 어떠한 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고, 그냥 와서 아무 댓가 없이 그냥 먹으라고 하신다.
마치 이 장면은, 마을에서 최고의 부자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되,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자들까지도 모두 초청하여 마음껏 준비된 음식을 먹으라는 것과 같다. 누구라도 와서 값없이 음식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시라고 초청한다. 그렇다. 방금 읽은 1절의 말씀은 수 많은 은혜의 설교에서 인용된 구절이고,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들어왔던 본문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식탁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도무지 자격없던 우리에게 이러한 성대한 식탁을 차려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괴로워하고 고통 중에 신음하던 가난한 자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초청이 얼마나 눈물겹겠는가.
제가 대학교 복학하고 자취생활을 하던 무렵이다. 흥청망청 노느라 용돈은 다 떨어지고, 주머니에는 딸랑 2천원이 남았다. 당시 학교 구내식당 한끼가 천오백원이었다. 앞으로 몇끼를 더 버텨야 했는데 돈이 없으니 참 서럽고 비참했다. 그래도 마지막 한끼 제대로 된 밥 먹고 끝내자 싶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맛있는 한끼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겠나. 그러다 문 밖에서 똑똑 소리가 난다. 당시 대학교 앞에 몇번 출석하지도 않았던 교회의 어느 가난한 집사님께서 기도하시다가 문득 제 생각이 났다며 우유 1000ml와 라면 2묶음을 사다주신 것이다. 그분도 생활이 정말 어려우셨는데 그런 분에게 은혜를 입으니 얼마나 감동이 되고 감사하던지. 그분의 선행이 저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대한 식탁을 차려주셨으니, 그것도 값없이 와서 먹으라 하시니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상황인가?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초대의 메세지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마냥 즐겁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이스라엘 가운데 쏟아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그분의 진노가 임박한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우상들, 다른 외적 수단들을 의지하며 그것들로부터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찾고자 섬겼을 때, 그래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성큼 다가오고 있을 때, 사회 곳곳에서 멸망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서서히 시작되던 그때에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하여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준엄한 심판을 통하여 저들이 그토록 의지하던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에 얻어맞은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부와 명예와 군사력과 외교력 모두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끼 먹을만한 식량도 없고, 갈증을 해갈할만한 물 한모금 얻지 못하며, 생명을 연장할만한 포도주나 젖을 얻지도 못하고 그저 굶주림 가운데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가 이토록 두렵고 괴로울 것인데 여전히 저들은 하나님의 초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녀석들아! 제발 이리로 좀 와서 생명을 위한 양식을 먹어라! 너희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 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부르짖으시는대도 저들은 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준다고 착각하던 것들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눅14:15-20 을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다. 이 주인은 초청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를 잡고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성대한 잔치상을 마련한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와서 마음껏 먹으라고 초청한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자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이 초청에 거부한다. 이유인즉슨 어떤 이는 밭을 샀으니 그 밭을 돌아보러 나가야 한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소를 샀으니 이놈들이 땅을 잘 가는지 못가는지 시험해 봐야 해서 못간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장가를 들어서 못간다고 한다.
물론 밭도 중요하고 소도 중요하고 장가든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생명의 문제만큼, 긴급할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시고 와서 마음껏 먹으라고 초청하셨는데, 참 좋은 것이 여기 있는데, 초청을 받은 자들은 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시급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 때문에 가장 귀한 이 초청을 거절하는 악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예레미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기 이전의 유다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죄는 두 가지 였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물을 얻기 위하여 웅덩이를 판 죄였다. 그러나 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내었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다고 말씀하신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터진 웅덩이에 제 아무리 귀한 물을 담아봐야 다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생수처럼 보이는 온갖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것들을 자기 속에 부어봐야 그것들이 나의 정욕과 탐욕들을 능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뒷전으로 미뤄둔 채, 스스로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일들이 다 악한 일이며, 그 끝은 허무하고 허망할 뿐이다. 이러한 노력들로 얻는 산물들이 사람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더욱 심각한 갈증과 굶주림 가운데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너무나도 잘 느껴지는 본문임에 틀림없지만, 마냥 즐겁고 기쁜 분위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규이기 때문이다.
사 55:1 를 함께 읽어보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방금 읽은 구절의 시작은 "오호라" 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오호라” 라는 단어를 한글사전을 찾아보면 “슬픈 일이 있을 때나 안타까워 탄식할 때 내는 말" 이라고 설명한다. 히브리어 ‘호이’ 라는 말이 비통하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감탄사인데 아주 잘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대한 자선사업가처럼 성대한 뷔페를 차리시고 “가난한 자들도 와서 배부르게 먹고 가고 돈 없는 자들도 와서 맛있게 먹으렴 ”이런 구제사업을 하시는 장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절규하신다. 소리소리 지르신다. 왜 그분께서 비통한 마음으로 제발 좀 나에게 오라고 외치시는가? 누구도 이 부르심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짜로 와서 그냥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요동하지 않는다. 값없이 와서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다들 여기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셨고, 자격없는 죄인들을 초청하시는데, 도무지 반응이 없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든 와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 누구도 들어오질 않고,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이 잔치에 초청을 하여도 그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이 구원의 잔치상을 펼쳐 놓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셨을까?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이처럼 괴로우신 것은 기껏 준비해 둔 음식상이 쓸모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집에 손님이 오시기로 했다. 갑자기 부랴부랴 음식을 준비한다. 전도 좀 부치고, 국도 끓이고,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모임이 취소되었을 때에 그 허탈감이 얼마나 큰가? 우리의 기준으로, 아주 맛있고 훌륭한 한 상을 차려놨는데, 그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것만큼이나 헛헛하고 실망스러운 때가 어디있으랴.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이 많은 음식들이 아무 소용없어졌기 때문에, 먹을 사람이 없어서 버려질 것이기 때문에 아까워서 상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것들을 다 가지신 능력의 아버지에게 잔치 음식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이 버려질 것 때문에 마음 아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 음식을 먹어서 생명을 얻어야 할 사람들, 마땅히 그 음료를 마시고 기운을 차려야 할 사람들, 지금 도무지 생명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들을 움켜쥐고자 자신의 남은 기회들을 허비하는 불쌍한 인생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초청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 앞에서도 사사로운 일 때문에 시간만 허비하는 불쌍한 인생들,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한 사망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가운데 던져질 것이 뻔한데, 그럼에도 하나님의 탄식어린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한 그들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2절에서 더욱 잘 드러나는데,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은혜의 잔칫상을 외면한 채로 조금도 그들의 배를 만족시킬 수 없는 허망한 것들을 쫓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영혼에 참된 만족을 가져다줄 수 없는 것들, 그들의 영혼에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들, 그들의 영혼에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가?
마찬가지로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눈과 귀가 가리워진 자들은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안개처럼 사라져버릴 것들에 혈안이 되어 그것을 움켜지기 위해 달려간다. 양식이 아닌 것을 사기 위하여 내 소중한 기회를 낭비하며, 우리의 영혼에 아무 도움되지 못할 것을 얻기 위하여 헛된 수고를 한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그들은 임박한 진노 앞에서도 여전히 허황된 것들을 붙잡기 위해, 곧 사라질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기회들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밥상으로의 초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거대한 식탁으로의 초대는 그 누구라도 와서 먹을 수 있다.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돈 없이 먹을 수 있고, 적게 가진 자들도 와서 값 없이 먹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값없이 식탁을 배설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이미 값을 치루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말하는가? 벧전1:18-19 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페밀리 레스토랑에 가면 요즘 주말디너 한끼에 1인당 아무리 못잡아도 1인당 3만원은 넘어가는 것 같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차리신 성대한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를 값으로 지불해야 할까. 그 식탁의 음식들이 진정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주는, 우리의 생명과 관련된 귀중한 음식이라면 그 음식을 먹기 위해 도대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것으로는 결코 이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대한 식탁에 우리를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로서 초청하시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대한 식탁을 베푸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식탁은 우리 영의 만찬이 가득 차려진 식탁이요, 이 잔치는 바로 우리 영이 먹고 마시는 말씀의 잔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그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지고, 이제는 이 땅을 살아가며 성대한 말씀의 잔치를 경험한다. 바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이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진정 귀하게 받고 있는가? 어쩌면 본문속에 등장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하찮고 가벼운 것을 움켜쥐기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잡을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모습들, 곧장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을 움켜쥐기 위해, 우리 영혼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과 기회들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는 아닌가?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대한 은혜의 식탁을 차려두셨는데, 가서 값없이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 귀한 것을 밀어버리고 불량식품과 같은 것들로 우리의 영혼을 채워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성대한 식탁에서 베푸시는 은혜는 무한한 은혜요, 차고 넘치도록 채우시고 부으시는 은혜이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지금도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친히 그분의 말씀의 양식을 먹이신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주님께서는 주의 모든 백성들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하셨다.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은혜의 식탁인 줄로 믿으시길 바란다.
그간 양식이 아닌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였던 우리의 삶을 돌이키자. 또한 우리 영혼을 살찌울 성대한 말씀의 식탁을 준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성대한 만찬을 통하여 더욱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의 은혜를 누리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52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기도하자.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앞에서도 여전히 눈앞의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만 눈이 고정되어 하나님의 절규와 외침을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 나 자신은 아니던가? 내 삶 가운데 점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하는 나는 아닌가?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당장 눈앞의 것들에 눈이 팔려서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아둔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자칫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 우리의 귀를 열어주셔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부르짖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주님께서 배설하신 말씀의 식탁을 통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영혼의 영원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힘과 능력은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임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택하신 교회를 향하여 말씀의 잔치를 배설하여 주시어 영혼의 기쁨과 감격 속에 살아가게 하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과 급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우리의 시간과 기회를 날려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정말 이 순간 우리에게 긴급한 일, 우리에게 중요한 일, 우리에게 최우선인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하사 더욱 더 주님의 말씀의 양식들을 사모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영혼의 양식을 허락하심에 감사드리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