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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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28-38
오늘 본문은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모습입니다. 이 권면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또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28〉 바울이 청중들을 향한 권면이 시작됩니다. 앞으로 바울이 함께 하지 못하기에 교회에서 장로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전합니다. 그들에게 영적 상태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는 바울이 딤전 4:1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을 고려하여 전달했다고 보여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성경의 친숙한 은유인 양떼로 묘사되는데, 바울은 장로들을 여기서 감독자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감독’의 의미로 전달하여 몇몇 교회 안에서 지도자들에게 권면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14:23에서 그들이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서 (바울에 의하여) 기도와 금식 속에,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어떻게 임명되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장로들의 의무는 교회를 보살피는 일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주시지만, 장로들이 그 교회를 잘 보필하면서 균형을 잡고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늘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29-31〉에서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는 이어집니다. 사나운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파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나운 이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바로서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즉, 이단적인 행위를 하는 자들이 교회로 들어와 교회가 가야할 길을 잃게 하는 세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외부 인사들이 교회 안에서 회중을 미혹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어느 교회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합니다. 롬 16:17에서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건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오늘날 한국교회를 둘러보면 바울의 이 경고가 바울이 살던 시대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통용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대형교회의 모습들을 보면 바른 방향으로 가는 곳도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따르기보다 기업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의 논리로 운영하는 모습을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위험에 직면한 가운데 교회 지도자들은 밤에 약탈하려고 돌아다니는 이리들을 감시하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영과 육을 성장시키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이 바르게 성장하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장로들, 리더들에게만 한 말이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바울이 열정적으로 밤낮으로 회중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경고한 것을 기억하며, 모두가 리더가 될 순 없지만 선교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 리더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32〉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교회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배워온 학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드는 우상행위를 너무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기준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며 그 분에게 전적으로 우리의 삶을 드려야합니다. 이러한 기준이 섰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의탁행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를 양떼의 감독자로서 그들의 직책에 대한 일종의 위임 되었다는 것만 간주하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지고 있던 책임을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그 분의 말씀을 가지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되었고 그분의 은혜의 말씀, 즉 은혜의 복음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복음을 전파하며 삶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24절).
그리스도인들을 든든히 세우고 그들을 성숙시키며 그들에게 그분의 모든 거룩한 백성들 가운데서 유업을 주시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향유할 그분의 왕적인 통치의 축복 안에서 받게 될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몫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들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위탁하신 일들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33–34〉 바울은 마지막 호소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회적 수고로부터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진실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부를 추구하지 않았던 바울은 자립하기 위하여 손수 일하는데 만족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교회들에게 온 지원금에 대해서는 감사할지라도, 기존 교회들로부터 온 지원금은 자신의 수입과 함께 그가 사역하고 있는 개별 교회들에 짐을 지우는 일을 피하게 해 주었다. 오늘날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네덜란드에서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등이 나타나지만, 유럽에서는 이러한 예배가 없기에 주일에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평일에는 평신도들과 같이 자신의 일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33-34에서 보여준 모습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나타나게 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좀 더 미뤄질수 있겠지만, 미국과 유럽을 따라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이 바울의 모습이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35〉 바울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에 따라 사는 모본을 보여 주려 하였습니다. 이는 살전 5:14에서 약한자를 격력하고 힘 없는자를 붙들어 주며 오래 참으며 기다리라는 것과 연관하여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 보려고 합니다. 어릴적부터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하든 예체능을 하든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만 쳐다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한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교회에서 낮은 모습을 보는것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높은 곳만 추구하는 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과연 그것이 바르다고 볼 수 있을까요? 높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낮은 곳도 함께 바라보며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며 그 함께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실수 할 수 도 있고 넘어질수도 있지만,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했으면 좋겟습니다.
〈36–38〉 끝으로 바울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뒤따랐습니다. 그 장면에서 남겨진 마지막 인상은 바울이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바로 바울의 이어질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마지막이 전제되었다.
바울과 헤어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바울은 참 바르게 살았다? 바르게 목회를 했다라고 보여집니다. 누군가와 작별인사를 하거나 헤어질때에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잘 헤어졌다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의 바울은 서로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며 헤어집니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졌다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심이 많고 배려할 줄 모르며, 예절은 더더욱 없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젊은 이들이 자라온 환경이 경쟁을 위한 환경이었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을 가정에서 바로 케어하지 못한 결과를 오늘날 보고 있는데, 가정에서 하지못한 것을 교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복음만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삶을 살아내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복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가진 이들의 이별 모습을 보며 오늘날에 저런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아보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헤어진다는 것을 알고, 헤어진다는 것을 다시 만날 그 날을 고대하게 하는데, 오늘날에는 잠시 잠깐 그 순간만을 넘기기 위한 일들을 하다보니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모르며 살아가기에 바울과 성도의 이벼모습이 오늘날 드물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연락망 sns가 발전함에 따른 부작용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이렇게 변화한다고 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상의 적응하는 것 만큼 우리의 삶의 본질을 붙잡거나, 삶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기준과 본질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했습니다.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며 우리가 앞으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까지 이 본질과 기준을 지혜롭게 전수할 수 있길 기도하며 축원합니다.
433, 436, 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