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7-26

사도행전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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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7-26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관계 뿐 아니라 회사, 학교, 유치원 등 우리가 속해있는 많은 조직들도 마차가지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사회로 가는 이 시기에 우리는 교회는 어떻게 이 다양성을 포용하는지, 그리고 선교지에서 어떻게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7-18〉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교회에서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날 야고보를 찾아갔는데 장로들이 함께 모여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교회를 조직화된 종교 기관 정도로 생각합니다. 건물이 교회의 전부인 줄 압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인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생활이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지요. 교회는 결코 단순히 조직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고 야고보에게 찾아갔는데 장로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교회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셔서, 그분의 피로 죄를 씻어 정결하게 하심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한 몸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체 간에 교제가 가능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런 교회로 성장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19-20〉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을 교회에 보고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이방인들 가운데 행한 자신의 사역을 도우셨는가를 상세히 진술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14장 27절, 15장 4, 12절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역하셔서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인도받고 계획되었으며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교회에 알렸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졌습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어느 국가에서는 다른 나라 선교사들은 모두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교제를 나누는데 한국 선교사들은 그 무리에 절대로 끼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선교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 들어보면 쉽게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사명을 가지고 나가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단기사역을 나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끝맺음 해야한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열매가 바로바로 나타난 경우와 늦게 나타난 경우로 나눠집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열매가 바로바로 나타나게 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겠지만, 열매가 지금 이 순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선교를 나갔을 때의 역할을 그만두면 안 되며 우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선교지에 가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또 그 인도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올려드리는게 선교의 목적 중 하나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보고한 이 선교보고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는지 기억하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주며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말입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성경이 가장 먼저 전해진 곳을 찾아가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것은 성경이 전해졌을 뿐인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몇 십년이 흐른 뒤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 성경이 들어왔을 뿐인데, 그 곳에서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선교사들을 2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에 우리는 초점을 맞추길 기원합니다.
〈21-22〉 율법에 대한 열성주의자들은 그들이 바울에 대해 들은 소문을 기꺼이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공동체들 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포기하도록 충고했다고 비난받았다.
갈라디아서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로마서 2:25–29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에 있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발언을 진지하게 고려한 유대인은 율법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릇된 소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 안에서 무엇이 말해질지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23–24〉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자신에 대한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실제적인 어떤 행동을 제시하였다. 교회 안에는 서원한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서원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가 수반되면서 종결되는 형태였는데, 바울이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제사의 비용을 지불할 것이 제안되었다. 이는 유대적 경건의 표본으로 수용되는 행위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들과 함께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고 지시받았다는 점입니다.
〈26〉 바울은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다음날 그는 성전에 가서 자신의 제의적 부정함을 정결케 하는 자신만의 시간을 시작하고 제7일에는 자신의 정결례와 함께, 네 사람의 나실인 서원이 만기되었다고 신고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모습에서 복음이 전하여 질 때 자신이 받는 오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복음은 전하기 전에 아이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고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에 맞게 전하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 나라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어디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안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떳떳하게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염병이 돌았을 때 전염병 현장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며 그 전염병이 마쳤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우리의 행동을 통해 복음이 전해질 것인지 복음이 막힐 것인지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만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전하여 질 수 있도록 우리는 고민하고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사도바울이 25-26에서 보여준 이러한 모습을 우리도 오늘날 현실에 맞게 행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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