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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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욥이 시험을 받고 자신의 세 친구와 담론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본 뒤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욥의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욥 1-2장은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 욥을 시험하는 내용입니다. 욥 3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욥 4-28장은 욥이 자신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논쟁하는 내용이며, 욥 29-31장은 욥이 자신은 무죄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이후 욥 32-37장은 엘리후라는 자가 욥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자임을 말해주며, 욥 38-41장은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 자신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욥 42장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뒤,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욥기는 마치 전래동화와 같습니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인내하다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자세히 보면, 인간의 비극을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욥기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비극이 무엇인지, 이 인간의 비극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지 같이 나누기 원합니다.
욥 1:1 을 보면 욥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문장이 성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붙여졌을까요? 적어도 이런 많은 수식어를 붙인 성경인물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온전한 자이다, 그는 정직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자이다, 그는 악에서 떠난 자이다 등 한 문장씩 설명하는 구절은 많아도 이 4개의 수식어가 한번에 붙은 성경인물은 아마 많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욥을 시험하려는 사탄에게 욥 1:8 절처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세상에 욥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욥은 당대 최고 의인이었습니다. 아니 그 당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최고의 의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욥을 사탄이 시험합니다. 사탄이 욥에게 주는 첫 번째 시험은 자녀와 재산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욥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자녀들과 재산을 다 빼앗았습니다. 이때, 욥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 1:21 절에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욥의 신체적 고통입니다. 온몸에 종기가 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내는 참다 못해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욥은 말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습니다. 인내했던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욥은 이 불행과 시험을 통해 ‘교훈’을 얻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 불행만 지나가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교훈”을 알게 될거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점점 웃음을 짓습니다.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시간은 점차 흐릅니다. 시간은 점차 흐르고, 욥은 그 안에 있는 ‘교훈’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무의미하지만 끔찍한 고통’만 계속됩니다. 아무런 ‘교훈’은 발견되지 않는 육체의 고통이 계속되고 소중했던 가족과 재산이 채워주었던 기쁨은 공허함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욥 안에 있던 솔직한 마음이 나옵니다. 욥 3장에서부터 욥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내가 태어난 날에 세상이 멸망했더라면,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내가 낙태되었다면, 차라리 지금 죽었더라면, 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평온도 안일도 휴식도 없고 불안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욥의 내면에 있던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이 나에게 무의미합니다.”, “나는 아무 ‘교훈’도 없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왜 나를 계속 살려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는 희망이 없고 절망만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욥 1장 1 ,8절을 생각해 봅시다. 욥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무의미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을 내가 버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희망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와 담론을 보면, 세 친구는 욥에게 잘 답변해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욥이 죄인이라고, 얼른 회개하라고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직한 분이다. 그런데 너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욥을 시험하게 해달라고 말했고,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에게 죄가 있어서 욥이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욥은 더 화가 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의 자존심을 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은 세 친구와의 논쟁에서 결론을 이렇게 짓습니다. 욥 31: 6, 욥 31:35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이것은 결국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사탄의 시험입니다. 단순히 2개의 시험을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가족과 재산을 빼앗는 것, 육체의 고통을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렇게 간단하게 우리를 꾀지 않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외부적인 요소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내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욥의 자존심을 긁게 만듭니다. 욥의 아내가 그러하였고, 욥의 세 친구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욥의 내부로 침입합니다. 쟤네 말 사실 아니잖아. 쟤네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 너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저렇게 말하는 거야. 너가 옳아. 너가 무조건 옳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욥이 결론을 이렇게 짓게 만듭니다. ‘너가 무조건 옳아, 하나님도 너한테 죄 있다고 말할 수 없을걸?’ 이게 바로 자기 의입니다. 사탄이 욥에게 주는 모든 시험의 결국은 자기 의를 높이는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신학자는 그의 저서 ‘신과 악마 사이’에서 ‘시험에 든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인류 타락 사건을 인용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험한 것은 뱀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다. 밖에서 오는 것은 인간에게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오직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험스러워진 것이다. ‘밖에서’ 오는 것은 인간을 더럽히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을 건드리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그 마음 때문에-자기 때문에!-죽을 수도 있고 무자비한 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는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시험의 원인이다. 어떤 계기가 있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언제나 그런 존재로 살아간다.’
즉, 그가 정의하는 시험에 드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시험 드는 것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이었으며, 독일의 히틀러가 신무기 원자폭탄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때입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독일의 히틀러, 나치보다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들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미국이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면, 그 원자폭탄의 가공할 폭발력이 분명 두려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폭탄의 두려움으로 인해 평화가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원자폭탄이 개발된 후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련에서도 폭탄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미국 내 어떤 세력들은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수소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폭탄만 많이 늘게 되었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국가의 대립이 이어졌고, 사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인간의 내면을 바꾸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탄이라는 ‘외부적 요인’마저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의 더러움’, 시험에 들게 만드는 자기 자신의 마음 때문에 오히려 전쟁의 위험성만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 내면이 결국 탐욕을 갈망하게 만들고, 인간 내면이 자신과 국가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국이 폭발과 세계 멸망이 될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울은 로마서 10: 3 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욥기를 보고 가끔 욥의 인내를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가 보여주는 욥은 인내하는 욥이 아닙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욥은 자기 의를 세우는 욥입니다. 즉,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욥도 결국 자기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를 저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말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평가한 욥입니다. 그런 욥이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의를 세우지 않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안에 있는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욥의 첫 1-2장의 인내도 자기 의가 되었고, 3장에서의 고통의 토로도, 4-28장까지의 논쟁에서의 말도 자기 의가 되었고, 그렇게 욥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갑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말로입니다. 욥기에서의 욥의 끝은 자기 의를 세우는 죄인이고, 모든 인간은 자기 의를 세우는 죄인들입니다. 그렇기에 로마서 3:23 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기 의를 세우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목회자라서,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어서, 내가 봉사를 하고 있어서, 내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내가 찬양팀을 하고 있어서, 내가 헌금을 많이 해서, 내가 구제를 많이 해서 등등. 이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의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도 있고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해줬어.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었으니까 나는 의로워. 나는 당당해.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나는 다 옳아. 라고 점점 자신의 마음을 굳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나의 의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나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모습이요, 율법주의자의 모습이요,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가운데에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38-41장에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하나님은 언제나 의롭다라는 사실입니다. 욥기 38장 4절을 보면 이렇게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창조주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네 주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르고나서 자신이 뭘 잘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그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7:10 에 나와 있는 종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 주인에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말할 뿐입니다. 이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아, 내가 너 주인이다. 너가 나에게 말해야 할 것은 너의 의가 아니라 나의 의다. 인간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욥기 40:8 절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묻습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고 인간의 의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악하다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이때,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욥기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실마리를 시편 46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시편 46:1 절에는 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 뒤에는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다가 넘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어떤 천지재변에도 그들의 주인됨이 변치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 주인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렇기에 내가 너의 피난처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이사야 41:10 에도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그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2가지 사실을 보고 욥은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고, 주님의 이치, 주님의 도를 깨닫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의를 거두어들이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욥의 인내가 아니라 그의 회심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되돌렸습니다. 진짜 주님의 뜻이 뭔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회개’라는 구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의 업적을 통해, 외부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내가 봉사를 해서, 내가 구제를 해서, 내가 하나님 잘 믿어서 등으로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인간 내면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인간 내면이 바뀌면 나오는 행동은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욥처럼 말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한다.’ 이 구절은 내가 그토록 세운 나의 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의가 그렇게 높아 보이고, 무엇이라도 된 줄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구나를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보다 훨씬 높고 깊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표현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행동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정말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우리 의만 높이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생각하는 성경인물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다윗 왕도 이러한 회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시편 32:1 에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자신의 의를 높이려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가 바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께로 돌아간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행동을 항상 드려야 합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도 하나님을 원래 믿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죄에 빠지게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다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의 과정을 우리는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욥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비극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항상 시험에 들게 하는 존재, 자신의 의를 높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자 우리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의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런 그분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 잘못했다고 회개를 하며, 더욱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성화의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이렇게 고백합시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는 해야할 것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나의 의를 내려놓고 그분의 의만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