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6)
평소에는 그리스도인다운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옛 삶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되 우리의 소원만을 간구했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까?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주님의 그 길, 주님의 그 말씀, 주님의 그 생명에 동여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내 마음을 못박아 동여매지 아니하고 어찌 나의 옛 삶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사도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기도한다고 해서 시몬의 마음이 절로 주님께 동여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부가 스무 마리의 말들을 물가로 몰고 갈 수는 있지만, 단 한 마리의 말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시몬에게 자신을 주님께 동여매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줄 수는 있지만, 그 실천 여부는 철저하게 시몬 개인 소관이었습니다.
기도란 ‘데오마이’, 나의 마음을 주님께 붙들어 매는 노동입니다. 기도는 그분의 깊은 호흡으로 호흡하면서, 그분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생각하며,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적 시간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도 그리스도인답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기도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묶어 두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동여매는 것임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을 주님께 동여맨다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붙들고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환난 속에서도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끔 항상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동사가 ‘데오마이’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는 ‘데오마이δέομαι’인데, 이 단어는 ‘묶다’, ‘붙들어 매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데오δέω’의 변형입니다. 즉 베드로가 시몬에게 ‘주께 기도하라’고 말한 것은 ‘너 자신을 주님께 묶어 두라’, ‘네 마음을 주님께 동여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는 베드로가 임의로 사용하거나 지어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21장에서 미구에 임할 큰 환난에 대해 말씀하시며 이렇게 끝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말 ‘혹’으로 번역된 원문 ‘에이 아라εἰ ἄρα’는 그 앞에 선행된 조건절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말은 회개하고 기도하면 혹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모호한 의미가 아니라, 회개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사해 주실 것이란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에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주께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보다 돈의 힘을 더 신뢰하여 성령님의 임재마저도 돈으로 사려 하였으니, 만사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슨 분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죽음 이후를 책임져 주지 못할 돈의 힘만 믿다가 그 돈 때문에 결국 공동묘지에서 영원히 망하고 말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이렇듯 옛 삶을 청산하지 못한 시몬에 대한 베드로의 질타는, 실은 중요한 순간마다 옛 삶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질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는 말이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은의 가치가 금과 거의 동일하였고, 또 은의 구매력이 대단히 높아 ‘은’이란 말은 항상 돈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시몬을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질책한 것은, ‘네 돈과 함께 네가 망할 것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하사하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도 가나안의 구닥다리 세간을 들고 가는 야곱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옛 삶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시몬은 본래 마술사였습니다. 마술은 사람을 교묘하게 속이는 기술입니다. 시몬은 뛰어난 마술사로서 그의 마술에 필요한 기술이나 기구라면, 금액 고하를 막론하고 지체 없이 사들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를 보는 즉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옛 성품, 옛 습관, 옛 사고방식, 옛 삶의 태도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현장에 급파하였고, 사마리아에 이른 두 사도는 소문이 사실임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마술사 시몬의 입장에서 본다면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난 셈이었습니다. 시몬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몽땅 앗아 간 빌립과 사생결단을 벌여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시몬 역시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스스로 ‘큰 자’라 자처하던 그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빌립을 통해 참된 진리를 접한 그에게는 그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시몬은 마술사였습니다. 그의 마술이 얼마나 신통했던지 그 자신이 스스로 ‘큰 자’를 자처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사마리아 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적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추앙하고 추종할 정도였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모든 것을 책임져 준다는데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 몽땅 들고 가는 이 미련한 야곱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영적 실상인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옛 성품, 그릇된 언행, 이기적인 마음과 욕망을 고스란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 말입니다. 미련 없이 버려야 할 것들을 지니고 사느라, 주님께서 주신 새 삶의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 말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삶의 굴레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