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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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1-4)
INTRODUCTION:
(Image) 물이 2/3 가량 찬 유리컵에 막대기나 숟가락을 넣어두고 컵을 바라보면 막대기나 숟가락이 마치 구부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구부러진 것은 아니지만 빛이 한 물질에서 투명한 다른 물질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굴절현상(refraction of light)에 의해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빛의 굴절은 빛이 통과하는 물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물보다는 유리에서, 유리에서보다는 다이아몬드에서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물리적인 현상을 규명한 네덜란드의 수학자 빌러브로어트 스넬리우스(Willebrord Snellius, 1580-1626)의 이름을 따라 ‘스넬의 법칙(Snell’s law)’이라고 부릅니다.
(Need) 그런데 이런 굴절은 영적 세계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실제와는 다른 많은 굴절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많은 매개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은 우리의 삶에 대한 왜곡된 전망을 부추겨서 하나님 없는 세속적인 문화가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을 더 주목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 굴절을 일으켜, 마치 우리의 믿음이 문제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굴절시키는 왜곡된 세상이 문제인 것입니다.
(Subject)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4은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굴절된 ‘땅의 것’(the things on earth)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위의 것’(the things above)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고, 함께 부활했으며,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성도들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Text & Preview)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4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소유한 우리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함께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과거).
둘째, 이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현재).
끝으로, 궁극적으로는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미래).
BODY:
(Background)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골로새서 3:1~4:1까지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삶이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3:1-4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3:5-11은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12-17은 새로운 삶의 모습을 옷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끝으로, 3:18-4:1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성도들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Exegesis)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4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연합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굴절되고 왜곡된 ‘땅의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왜곡된 눈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을 해석해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seek, zhte,w)”, “위의 것을 생각하라(think, frone,w)”라고 말씀하는 골로새서 3:1, 2의 ‘위의 것’(ta. a;nw)은 ‘땅의 것’(ta. evpi. th/j gh/j)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의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누리고 계시는 영광스러운 모습과 지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것은 장차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누릴 것들이기도 합니다.
2절의 ‘생각하라’(think, frone,w)는 헬라어 동사는 신약성경에 모두 스물여섯 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바울의 글에 무려 스물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즐겨 쓰던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그저 지적이거나 의식적인 어떤 과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 내면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결심하라, 열망하라(set your minds on)’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분 좋을 때 한두 번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며, 천국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이 위의 것을 가장한 환상을 보았다고 거들먹거렸지만, 성도들은 그런 유혹에 속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신 천국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것’은 직접적으로는 골로새교회 안에 있던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칭합니다.
음식, 종교적인 날, 거짓 겸손, 천사숭배나 신비한 환상 등에 대한 저들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 또는 규정들이 사람들을 죄와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는커녕(골 2:22-23) 오히려 모든 성도들의 머리이시며, 영적인 성장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도들을 분리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결과적으로도 땅의 것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는 과연 무엇이 땅의 것이겠습니까?
만약 우리도 세상의 굴절된 눈으로 우리의 믿음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땅의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방정식을 교회와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것이 또한 땅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땅의 것입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내 방식대로의 삶이 땅의 것입니다.
공동체적 가치보다 자기사랑에 붙들려 사는 것이 땅의 것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모습이 더 포용력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다시 죄와 사망 아래로 끌어가는 ‘땅의 것’은 더 이상 찾지도 생각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스럽고 영원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생각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해서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땅의 것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하늘의 신령한 것만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땅도 하늘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의 본향이고, 땅은 우리가 순례자와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 살아가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명령에 따라 이 땅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풍성하게 소유하기 위해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이 땅의 잘못된 주장들에 속지 않아야 하고, 또한 이 땅이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천국 시민 곧 하늘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우리가 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지 그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과거의 경험과 관련된 것으로,
I.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1, 3a).
오늘 본문 3:1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3:3은 ‘너희가 죽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시간적인 순서상으로 보면 3절이 먼저이고 1절은 나중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우리가 이미 죽은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13).
그리고 골로새서 2:12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믿음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우리가 다시 살림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 사람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2:12-13, 20; 롬 6:1-11).
거듭 말씀 드리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손등 밑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기록한 죄의 증서도 함께 못박혔습니다(골 2:14).
세상의 초등학문 또는 세상을 지배하는 영적 세력이나 원리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2:20).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3:1).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고, 천국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까지 확보하게 되었습니다(빌 3:20).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천국 백성이 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당연히 천국을 지향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천국 백성이라는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힘겨운 삶의 여정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늘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관련된 것으로,
II.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3).
오늘 본문 3절에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로 “이는(for, ga.r)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위의 것 곧 하늘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국 시민권을 소유한 우리의 영원한 신분이 오늘 이 땅 가운데서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와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비슷한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주목 받을만한 점들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 잘되고,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성공을 안겨주실 만도 한데, 성공은 여전히 나를 이리저리 피해가기만 해 참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믿음의 삶을 포기하고 나도 세상의 방식으로 살면 얼마든지 성공할 것 같은 잘못된 기대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것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이 오히려 예수를 믿는 우리를 향해 더 큰 소리를 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자주 화려한 세상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까지나 세상 때문에 주눅들거나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화려함이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영광스러운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표현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확실한 안전(safety)과 보호(security)를 보장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성도들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우리를 향한 구원이 결코 흔들림이 없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또는 ‘구원의 확신(security of salvation)’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얻게 된 새 생명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인지를 고린도후서 4:8-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다시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생명을 저와 여러분이 소유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영원토록 안전하고 보호받는 그 생명을 우리가 소유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늘 찾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미래와 관련된 것으로,
III. 장차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4).
오늘 본문 4절은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그 때에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대해 숨겨져 있었고,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안전과 보호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나가는 것 같았던 세상이 틀렸고,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4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 지금은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지 못했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성공보다 더 영광스럽고 더 위대한 성공을 성도들이 거두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지식할 정도로 믿음을 굳게 붙들고 달려가는 우리를 세상이 비웃고 있지만, 그 때는 우리가 세상이야말로,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미련했다고, 정말 어리석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반드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옳았고 세상이, 세상에 속한 저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 우주 가운데 임하는 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이기에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의 믿음을 굴절시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이 땅의 것의 노예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에 살아도 늘 위의 것,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그것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우리의 삶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반드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꼭 닮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을 자기 안에 감추어 두신 하나님께서 실패가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케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늘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Application)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굴절된 세상의 눈이 아니라 똑바른 믿음의 눈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빛이 물질을 통과하면서 굴절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도 시험(test)과 시련(trial)과 유혹(temptation)을 만나면서 굴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마치 바보 같고, 뭔가 모자라는 사람 같고, 찌질이(loser)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들면 오늘 이렇게 힘겨운 삶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인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도무지 이해해 주지 못할 만큼 초라한 나의 삶까지도 다 하나님의 통제와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험(test)을 통과(pass)한 것이 아니라 실패했고(fail),
시련(trial)을 참고 견딘(endure) 것이 아니라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고(give up),
유혹(temptation)을 물리친(reject) 것이 아니라 그것에 푹 빠져버리기(indulge)까지 했어도,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 때문에, 그 위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삶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우리를 영원한 승리자로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끝까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
둘째, 이번 한 주간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일제 식민시대의 시인 김소월은 우리가 잘아는 ‘초혼’(招魂)이라는 시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미 이 땅을 떠나가버린 사랑하는 여인 또는 일제에 빼앗겨버린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시인의 애절한 마음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떠나간 여인, 빼앗긴 나라를 생각하며 죽을 만큼 슬퍼하며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간절히 불러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지나며 우리의 생명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그 소중한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이름을 간절히 불러보기 원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아픔과 눈물 속에서, 때로는 우리의 기쁨과 감사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삶에는 큰 변화가 없어도, 세상의 눈에는 여전히 우리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중에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요 하늘 백성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CONCLUSION:
(Closing Image) 지금 미국에서는 Stephen Curry가 이끄는 Golden Gate Warriors와 LeBron James가 이끄는 Cleveland Cavaliers 사이에 미국프로농구 곧 NBA 결승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5년에 이어 금년에도 이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6월, 미국프로농구 결승전 6차전에서 제가 살던 지역의 팀인 Dallas Mavericks가 Miami Heat를 꺾고 4승 2패의 전적으로 팀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Dallas는 결코 Miami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Miami에는 LeBron James, Dwayne Wade, Chris Bosh라는 크고, 젊고, 실력도 걸출한 세 명의 스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달라스의 승리로 끝나버렸습니다.
NBA 타이틀을 획득한 후 달라스의 코치인 릭 칼라일(Rick Carlisle)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Dallas Mavericks야말로 진정한 팀입니다.
사실 Mavericks에는 온통 나이든 선수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 선수들에 비해 더 빨리 달릴 수 없고, 더 높이 뛰어오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선수들은 각자의 부족함을 서로 보충해줍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경기를 펼 수 있습니다.
특히 공을 주고받을 때는 언제나 서로를 신뢰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Dallas에 NBA 우승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걸출한 스타가 있어서 우승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선수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고, 서로 믿어 주며 시합을 하다 보니 어느덧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Closing Repetit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세상은 예수를 믿는 우리를 보고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더 빨리 달리지 못하고, 더 높이 뛰어오르지 못하고, 힘도 없어 보이는 우리가 마침내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자신들의 굴절된 눈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창조의 주요, 구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함께 무덤에 묻혔으며, 함께 부활했고, 함께 영광의 나라에 참여할 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했고, 지금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저와 여러분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우리가 온 인류가 벌이고 있는 모든 경기의 결승전인 그 때에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전히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시민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힘겨운 오늘의 삶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도 자주자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삶 위에 하늘 위로가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위에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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