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예수님의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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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나심
[눅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지난 주 설교내용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2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제 앞으로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인데요,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지난주 설교 내용을 잠시 리마인드 해보면 좋겠습니다.
PPT 1p 지난주 설교 리마인드
지난 주 설교는 예수님의 나심이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예고되는 ‘수태고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PPT 2p 수태고지(受胎告知)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사실을 미리 알린 사건
수태고지(受胎告知)의 뜻은 받을 수/ 아이 밸 태/ 고할 고/ 알 지/ 자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사실을 미리 알린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만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뜻을 보이시고,
일을 맡기신 다는 것입니다.
PPT 3p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 = 구원
예수님의 나심이 세상 가운데 예고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주님의 구원이 예고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기시는 일을 큰 틀에서 보면 ‘구원’의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PT 4p 삼위일체 하나님의 결정 = 우리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합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있는 인류를 면밀히 살펴 보신 후 “우리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합시다.”라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PPT 5p 예수 그리스도 =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
그리고 그 구원의 결정, 곧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으로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예고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예수님을 그저 바라보는 신앙을 갖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아는 것, 그 탄생에 감격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난 주 설교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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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역사성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역사성 탐방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 역사 이야기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해보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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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과 2절입니다.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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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지금 전도사님이 이야기한 이름 안 틀리고 말하는 친구 선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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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황제는 후대에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구스도’라는 칭호는 ‘존엄자’, ‘신성한 자’라는 뜻으로 로마의 원로원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한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개토대왕, 장수왕, 세종대왕 같은 왕의 칭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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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 아구스도는 B.C. 27 – A.D. 14년까지 약 41년간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이 숫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역사가 예수님의 실존과 탄생을 증명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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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구스도의 로마 통치기간 중 태어나셨는데,
더 구체적인 시기는 본문 2절에 기록된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실시한 호적’이라는 단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구레뇨의 로마 발음은 퀴레니오스이고,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뜻합니다. 같은 뜻인데 발음과 표기법이 다른 겁니다.
퀴레니오스, 즉 구레뇨는 재임기간 동안 두 번의 호적을 실시했는데, 그 처음은 BC 4년, 두번째는 AD 6년에 실시했습니다.
따라서 결론을 지어보면 인류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구레뇨가 처음 호적등록을 실시한 BC 4년,
즉 before Christ 4년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BC 4년~3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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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와 AD가 뭐냐고 묻는다면, 전지구의 역사를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이고, AD는 (Anno Domini)의 약자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기원전, 기원후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우리 실생활에 가지고 오면 이런 것입니다.
올해는 2023년이죠? 그럼 AD 2023이라는 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후 2023년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역사와 흐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실로 엄청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겠습니다.
역사는 예수님이 구레뇨가 실시한 첫번째 호적 시에, 즉 BC 4-3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단 BC라는 말 자체가 before Christ라는 뜻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예수님 이전 시대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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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역사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점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나 과학이라는 게 일정한 증명의 과정을 거쳐 우리 앞에 놓여지지만,
증명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인류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산출한 결과값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얼마만큼의 유효성과 실효성을 갖는지는 미지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성과 역사성은 지극히 사실적이지만,
우리가 공유하고 배우는 역사가 밝히는 예수님은 실제 사실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정보와 문헌의 디테일은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 과학이라고 하는 것 또한 무수히 많은 이론으로 존재해 오는 모든 것들은 그 사실을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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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아’다르고, ‘어’다른 시시콜콜한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이것 하나만 정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세계사와 성경은 동일하게 예수님을 로마제국 초기에 태어난 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사와 성경은 동일하게 예수님을 매우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찌 되었건, 정치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또 종교적으로도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드러난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공통의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과 기독교를 바라보겠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관찰해보면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실존과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만나게 됩니다.
무시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 감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예수님의 실존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역사와 상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치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화 속 존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나폴레옹과 같이 예수님도 역사속에 실제 존재했음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인 것이고,
예수님은 역사성 뿐만 아니라 전지구의 기준을 제시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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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예수님은 세상 가운데 실로 엄청난 능력을 보이셨고, 세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예수님 역시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전지전능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예수님과는 조금 다른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본문 속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겠습니다.
함께 본문 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모습은 참으로 미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갓난 아기, 심지어는 쉴 공간도 누울 곳도 없는 그냥 응애응애 우는 애기, 이것이 예수님의 첫 시작입니다.
세상의 역사를 반으로 나누시고, 모든 기준과 근거를 제시하시고 더 나아가 세상 그 자체가 되신 분이
사실은 초라하고 힘 없는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진실로 마음 깊이 새겨지길 원합니다.
2. 질문
그래서 오늘은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져보고자 합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왜 구유 위에 누워있는 보잘 것 없고 능력 없는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조금 더 우리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면, 아니 나는 진짜 이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기는 한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만약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면, 이렇게 태어나실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황금 마차를 타고 거룩한 성전에서 태어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누울 곳은 있었어야죠.
남들보다 월등히 쾌적하고 좋은 환경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조금 더 낫거나 비슷하기라도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예수님, 꽤 능력 있는 분인줄 알았는데, 이게 뭡니까?
능력도 없고, 힘도 없고, 보잘 것 없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재력이 있기를 하나, 권력이 있기를 하나, 학력이 높기를 하나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마치 혼외자식처럼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배고파서 울고, 볼 일봐서 울고,
춥거나 더워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 아기가 세상을 구원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5,000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엄마 젖을 먹지 않으면 배가고파 죽고, 어른들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한 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요
진짜 말 그대로 ‘하나님’이 ‘애기’가 되셨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이 그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사람이 되신 신의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그냥 우는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 아무 능력 없는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두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3. 증명
오늘 우리는 정직해 져야 합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사실 나의 사랑은 철저히 조건적이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뿐이지, 예수님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만약 / 그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을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면,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의 감정은 / 사랑스러운 새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감격이 아닌,
드디어 날 위해 죽어줄 희생제물이 제사상에 놓였다는 치졸하고 이기적인 감정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대상입니다. 존재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다 아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하고, 그렇게 구원을 이루셔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셨을 겁니다.
그런데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죄악 가운데 거하며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놓인 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기적이게도 예수님이 날 위해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제가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한번도 아기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구나
아기 예수님이 그저 생명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답고 선하기 때문에 사랑한 일이 없구나,
아, 나는 십자가가 없더라도 그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고, 하나님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랑한 일이 단 한 순간도 없구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던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혹시 여러분도 과거의 저처럼 예수님이 우릴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어줄 제물이기 때문에 사랑했다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도 지난날의 저처럼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저 ‘구원’, ‘그저 ‘십자가’만 떠올리고 있었다면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선한 한 생명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아기입니다. 말씀 속 예수님은 그냥 아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의 구원을 이룰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한 생명이라는 이유로, 존재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라는 이유로
그냥 그렇게 아름답고 선한 이유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4. 복음제시
말씀 속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그 시작이 참 구슬프고 안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난민 인생으로 시작하여, 누울 곳이 없이 짐승의 먹이를 담는 사료통에서 잠이 드신 예수님,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죄송하면서도 동시에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인데, 우릴 위해 그 모든 인간의 삶을 겪으시고 공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그렇잖아요 누울 곳이 없는 인생이고, 기댈 곳이 없는 외로운 삶인데,
하나님께서 가정을 허락하시고, 친구를 주시고, 공동체를 주시고, 건강과 안전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이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 인생이 변했잖아요
예수님이 수료통에 누워 잠드신 덕분에 죽음 가운데 있던 삶이, 온전하고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졌잖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없는 사랑을 아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겁니다.
[요일3:13-14]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너희 인생이 막장이었는데, 예수님 만나서 회복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제는 너희도 그 사랑을 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한 절이라도, 여러분 인생의 한 순간만이라도, 일말이라도 예수님 닮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얻게 되었고, 희망을 보게 되었고, 꿈을 꾸고, 비전을 품고 오늘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소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작은 삶을 세워가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그저 생명이시기에 사랑스러우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신 피조세계와 생명을 사랑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방을 내어주지 않고, 아무도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았던 이기적인 세상으로 들어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완악하고 굳은 마음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던 우리의 삶을 기억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어쩌면 우리가 우리 마음의 빈방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인생이 무겁고, 버거운 이유, 어쩌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두 손 가득 세상의 짐을 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 우리의 구원이자 소망되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 마음을 비워내어 방을 만들고 주님을 초청합시다.
그래서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웃과 형제, 자매를 사랑함으로, 사랑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증거를 쟁취합시다.
5. 적용
우리 모두 그렇게 결단하며 이제 우리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따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사랑함으로 세상을 예수님의 향기로 물들이겠습니다.”
다시 따라해주세요
“아기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여정 가운데에서는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희생제물로 보지 않고,
그저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사랑스러운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 자체로 보고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또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함으로, 이 세상을 예수님의 향기로 물들이는 모든 중고등부 친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