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기지 않는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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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외국 사는데 불편한 점을 몇 가지 들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뭐라 대답 하시겠습니까?
저는 제일 큰게 책을 구하기가 힘든 점이 있습니다.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은 고전 이나 신학서적이 적지 않기 때문 입니다.
둘째로 좋은 물건은 어디에나 있지만 싸고 좋은 물건은 한국에서 팝니다. 실제로 좋아 보여서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면 다 한국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한국 사람의 기호와 필요에 맞춰서 잘 만들기 때문 이겠죠? 배송비가 더 들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못먹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한국에는 많을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배달을 시켜도 얼마든지 질 좋고 맛있는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은 치킨도 한국에서 먹으면 더 맛이 있고 김치찌게를 먹어도 한국에서 먹으면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해야 할 일에 맛집 찾아 가는 것을 빼놓지 않고 계획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젊은 사람들 식습관을 조사 해보니, 음식 중독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거의 20%를 육박하는 수준 입니다. 배고파서 먹는다기 보다는 맛이 있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폭식과 야식을 반복하게 되고 안 먹으면 금단이 올 수준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뇌를 스캔 해보면 치킨 이나 피자 같은 가공 식품 사진만 봐도 뇌가 활성화 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영양과학자들은 가짜 맛에 중독되었다고 말합니다. 딸기를 좋아하지만 주로 먹는 것은 딸기맛 사탕이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가공 식품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초코렛을 좋아하지만 카카오성분은 들어 있지도 않은 초코렛 인공첨가제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공착향제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아십니까? 바로 석탄 태우고 남는 ‘코울타르' 입니다. 아몬드 향을 만들어 비싼 아몬드 대신 사용하여 ‘Jicky’ 라는 향수를 만들어가짜 크림으로 대박을 낸 것이 시초 입니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착향제는 석유화학물에서 합성해 냅니다. 또한 영양과학자들은 배불리 먹지만 영양은 턱없이 부족한 식사가 폭식과 야식을 유발 시킨다고 말합니다.
많이는 먹을지 몰라도 진정 필요한 영양과 건강을 유지할 좋은 음식은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이렇게 가짜 포만감과 가짜 영향에 속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진정한 만족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실때,
나의 영혼의 만족은 어디서 오는가 성찰해 보시기를 축원 합니다.
주를 영접하듯, 영접하라
주를 영접하듯, 영접하라
뺏앗기지 않는 만족감은 나눌 줄 알고 대접할 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타는 특징 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중에 예수님과 가장 친한 친구 같은 교제를 나눈 사람들이 됩니다.
이런 복된 관계의 시작은 마르다의 넉넉하고 섬길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선 예수님을 마르다는 지체 없이 초대하고 집으로 모시고 환대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일행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과 팔레스타인의 건조한 땅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의 손님을 맞이 하는 일은 적잖은 수고가 따르는 일인데도 마르다는 기꺼운 마음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이 마르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성의 이름으로 초대를 할텐데 나사로가 아닌 마르다의 이름으로 주님과 일행을 영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영접은 마르다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손님을 초대하고 대접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반면에 아주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담소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 입니다.
맛있게 먹고 기뻐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흡족하고 만족감이 느껴집니다.
환대를 받는 것도 좋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내것을 나누고 호의를 배푸는 일도 기쁨이 되고 만족감을 줍니다.
마르다는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자신에 집에 영접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흥분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접하고 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은 칭찬 받아 마땅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될 당시 시대상을 배경으로 마르다의 영접이 얼마나 특별하고 큰 결심인지 생각해보야 합니다.
당시 여성이 호스트가 되어 누군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는 문화는 없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고 대접하고자 하는 열정이 사회적 통렴을 무너뜨리고 그녀가 용기를 갖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르다의 열심은 그 집이 말씀 선포의 장으로 만들어 줄 토대를 제공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동쪽 3km의 거리에 위치한 베다니,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정으로 평소에도 잘 들리셨고,
수난 주간에도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이면 베다니의 그들의 집에 가셔서 쉬신 집이기도 하다.
특히 언니인 마르다는 헌신적이어서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출처 : KMC뉴스(http://www.kmcnews.kr)
마르다도 머리 둘곳이 없이 다니시 우리 주님에게 편히 쉬고 집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제공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 해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또한 나사로의 죽음 앞에 불상히 여겨 눈물을 흘리십니다.
주님은 마르다와 그의 가족의 진심으로 주님을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귀히 여겨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제가 요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드리는데,
마르다의 영접 또한 관계의 문제 였습니다.
그녀의 영접이 이 아름다운 관계의 시작 이었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당연히 마음을 열고 영접하는 과정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섬김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욱 깊어지게 하였습니다.
마르다의 영접은 마르다와 그의 가족이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만족감이 충만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주님의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영접 받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1–13 (NKRV)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지위가 높은 사람, 왕,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영접하는 자"들은 주님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로 전에 경험 할 수 없었던 영적인 충만함을 체험 합니다.
그 관계는 가족이나 친척과 같은 육정과 혈통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자들, 즉, 죄인을 영접하여 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 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인애의 모습을 닮은 자들을 의미 합니다.
영접하는 자
그들이 주님을 영접 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듯이 내 주변에 아주 작은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저는 저의 어린 시절, 가장 힘든 터널을 지나는 시기에 저를 받아주시고
가족과 같이 함께 동거동락 해주셨던 시골 모교회의 사모님과 목사님께 항상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삽니다.
저와 같은 보잘 것없던 고등학생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말씀으로 키워주셨던 은혜와
거의 매일 따뜻한 밥을 챙겨주시던 사모님의 사랑으로 오늘의 내가 있게 했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항상 받은 만큼 나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살아 갑니다.
성도 여러분,
마르다와 같이 영접 하시고 섬기시기 축원 합니다.
마르다와 같이 주님을 영접하듯 그들을 영접하시기를 축원 합니다.
그럴때, 한 영혼이 살아나고 쉼을 얻으며 혹시라도 믿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는 사역에 쓰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이런 환대와 영접과 섬김은 받는 이나 대접하는 이 모두에게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만족감을 줍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을 영접 하라
말씀을 영접 하라
당연하게도 마르다는 마음이 매우 분주 했습니다.
누가복음 10:40 (NKRV)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오신 그리스도> 라는 그림에서 마르다는 아주 바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세요?
마르다의 표정이 많이 불편해 보입니다.
마르다가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맞습니다.
마리아 때문 이었습니다.
주님을 융성하게 대접하고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은 생각만 가득한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느긋하게 주님 발치에 앉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는 왜 그랬을까?
불여시 라서 그럴까요?
마리아도 평소 같다면 언니 마르다를 도와 손님 대접하는 일에 함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손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 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여인의 입장인데도 과감히 초대했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은 당시 유대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도 큰 용기를 내서 주님 앞에 앉은 것입니다.
하지만, 동생의 이런 행동이 마르다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융성한 대접을 하는 것에는 단지 풍성한 음식과 안락한 장소 제공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에 맞춰 주는 것도 중요 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서비스이고 손님 대접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가장 좋은 서비스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했던 서비스는 바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일정을 마치시고 마르다의 집에 가셨을 수도 있지만
베다니에 도착하신 시각이 언제 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마르다의 집에서도 사역을 계속해서 진행하시고자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그런 주님의 니즈에 맞춰 발치에 겸손히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서 주님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몸서 보여주기 있습니다.
멜번에서 만났던
한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집을 방문해서 저녁식사를 거하게 대접 받고
아무런 꺼리낌 없이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 “이렇게 깊게 단잠을 잔게 언제 였는지 기억이 안난다던” 일이 기억 납니다.
우리 집에 갑자기 방문한 손님은 낯선 외국 땅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살던 삶 중간에 잠시 나마 편히 쉴 곳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제서야 깊은 사연을 털어놓고 복음을 제시하는 시간을 늦은 시간 까지 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르다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고 그것을 가감 없이 주님께 말씀 드립니다.
누가복음 10:40 (NKRV)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이 요청은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이 때 주님이 만약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리아를 내 보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기대와 달리 주님은 마르다를 지적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저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했다면 어뗐을까? 생각해보았는데,
만약에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는데..
네, 상상도 하기 싫은 대참사 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한 발 더 나아가, 마르다에게 권면 하십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 버린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우리가 쓴다면 어떻게 매듭이 지어지면 좋을까요?
마리아가 눈치껏 부엌으로 간다
OR
마르다가 큰 은혜를 받고
주님 앞에 앉아 함께 말씀을 듣는다.
결론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할까요?
보통 이 이야기를 설교할 때, 마르다를 작은 일들에 분주하여서 말씀을 놓쳐 버린 사람으로 몰아가는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비록, 마르다의 비판적인 태도는 충분히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른 면은 없을까요?
마르다는 섬김의 사역,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사역으로 서로 분리 시킬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사역과 말씀을 듣는 말씀 사역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는데, 지금 이 상황은 마르다가 그 균형을 망각한 상황이지 마르다의 사역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디아코노스- 섬김, 준비할 일, 사역
로고스-신적 발화, 영적인 말, 예수님
디아코노스- 봉사자, 섬기는 자, 사역자
디아코네오-섬기다, 봉사하다,
오늘 본문 40절 “준비하는 일”이 많아… 에서 준비하는 일- 즉, 교회에서의 사역을 말합니다.
한편, 39절에 “말씀을 듣더니" 에서 말씀은 “로고스" 인데,
인간적인 대화나 잡담이 아니라, 신적 발화, 영적인 대화,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 그 자체를 의미 합니다.
어찌 보면, 교회의 주된 사역은 섬김 사역 보다는 말씀이 우선이 되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당연한 말씀 입니다.
말씀이 없는 섬김
섬김 없는 말씀
만약에 교회가 예배만 있고 교제가 없어
반면에 예배는 안나오는데 교인은 만나
우리가 교회의 모습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예배 시간 드려지는 찬양과 경배 그리고 설교 말씀을 생각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교회에서 먹었던 맛있는 점심과 담소를 나누던 시간들을 떠올립니다.
얼마전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였던 그 청년들도 월요일 저녁 성도님들이 정성껏 대접했던 바베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답변이 많았다고 합니다.
맡은 일을 완수하고 나머지 시간에 나누는 교제의 시간에 풍성하게 섬겨주시고 먹여주시는 역할을 감당하는 손길이 있기에 교회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곳으로 기억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 정이 쌓이고 특히 청소년, 청년 사역에는 먹회가 목회 만큼 중요 합니다.
전에, 가정에 폭력 문제가 있어서 기도해주고 상담해주던 가정이 있었는데,
특별히 그 친구를 위해 기도 외에는 해줄 것이 없어서
하루는 제가 전에 말씀 드렸던 블루마운틴에 네피안 리버가 내려다보이는 저만의 기도처 비밀 장소에 그 친구를 데려 간적이 있습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컵라면을 들고 가서 바위에 절벽에 걸터 앉아서 함께 컵라면을 먹고 돌아 왔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위로의 시간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학생들, 청년들이 성장해서 오랜만에 연락되어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전도사님 집에서 먹었던 바베큐 이야기를 항상 꺼내는 것을 보면
먹는 것에 담긴 신비는 단지 배를 채우는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채움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거기에, 말씀도 동시에 채워주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는 밥친구, 술친구 만나서 이와 유사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또는 성도의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듣든 안듣든 상황을 잘 봐서 말씀과 복음을 제시 해야 합니다.
이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적은 말수와 충만한 의미"
말많이 할 필요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적은 말로도 충만한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은 성도 다운 삶을 말이 아닌 삶을 보여주면 됩니다.
코이노이아는 교제 입니다. 에클레시야는 교회 입니다.
교제 없는 교회가 없고 교회 없는 교제는 무익하다.
마르다가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과 섬김의 균형감 이었습니다.
“준비하는 일에 분주한” 상태에서 여유공간을 찾아야 합니다.
전 문광부 장관 이어령의 책 “먹다 듣다 걷다" 라는 책에서
교회 건물에는 천장 위의 돔 공간인 Spandrel 이라는 공간을 만드는데,
수 많은 위대한 걸작들이 수 놓아 있는 공간 입니다. 그 공간에 대해 설명하면서
교회에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실용성에서는 떨어지지만 우러보면서 영적인 묵상과 감상을 할 수 있어야
디아코노스와 로고스의 충돌이 생기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에 분주하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면 안된다는 것이죠
반대로 세상 살기 바쁘다고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균형과 분주함에 대한 주님이 주시는 해결책은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마르다야 마르다야 융성한 대접하려는 너의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너도 와서 말씀을 들어라
라면 한 그릇을 함께 나눠 먹어도 그곳에 찬양과 감사가 있고
말씀이 있다면, 또한 삶의 간증이 있다면
영이 살아나고 위로 받는 자리가 됩니다.
말씀을 영접하는 자리가 되고
주님 말씀 처럼 빼앗기지 않는 만족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론
결론
먹을 것이 풍족한 이 시대에
누가 더 맛있고 좋은 음식 먹느냐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주님을 반갑게 맞고 영접한 그 마음만으로 주님은 기쁘셨습니다.
융성한 대접이 필요하셨다면 마르다의 집이 아니라 헤롯의 궁전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그 말씀을 듣고 아멘하는 모습이 밥을 안먹어도 배부른 모습 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주님의 양식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 마르다 처럼, 하나님을 영접하고 섬깁시다.
우리 마르다 처럼, 우리 이웃들을 영접하고 섬깁시다.
그와 동시에 마리아 처럼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일에도 열심을 냅시다.
말씀 없는 섬김이 무익하고
섬김 없는 말씀이 능력이 없음
을 기억하고 말씀과 섬김의 중용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그 어떤 일보다 중요시 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시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