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의 회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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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서론: 무엇이 문제인가?
1. 개신교 안에는 수많은 교단들이 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등이 있다. 장로교 안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다.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신앙의 색깔이 있고 강조점도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수많은 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기독교 혹은 교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독교 안에 다른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는다. 이것이 신비이고 은혜이다.
2. 우리 교회 안에도 다양한 직업군, 다양한 삶의 배경, 다양한 연령이 있다.
나는 우리 교회 안에 다양한 연령이 있는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우리 교회안에 다른 나라에서온 형제들이 있는것에 감사한다. 때론 이것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당장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힘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우리 교회가 선교회와 긴밀하게 동역하는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전히 대다수의 교회들은 단순히 친분이 있거나 혹은 얼굴도 한번 못 본 선교사님을 소개받아서 매달 일정액의 금액을 후원하는것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처럼 우리교회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회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로 모일 수 있는것은 정말로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중 하나는 통일성이다. 다른말로 하면 하나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가치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3. 교회는 다양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공동체다.
존스토트 Unformity 가 아닌 Unity 다. 같은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옷을 입었지만 서로 하나될 수 있는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다. 교회의 하나됨은 다양함 가운데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하나됨을 말한다.
정의와 사랑이 조화롭게 세워진 것이 샬롬이라면 다양성과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또한 샬롬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팀 켈러 목사님의 복음과 삶에서 샬롬을 이렇게 정의했다.
평화나 번영이라 번역되는 히브리 성서의 '샬롬(Shalom)'은 굉장히 풍부한 단어입니다. 이는 때로 적대적인 상태의 중단 또는 부재 이상을 의미하는 우리의 '평화(peace)'와는 다릅니다. '샬롬'은 그 이상을 의미하며 기쁨, 건강, 축복, 구원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샬롬'은 1) 물리적으로, 2) 관계적으로, 3) 사회 정신적으로 완전한 번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샬롬'은 모든 차원에서 모든 것이 옳은 상태입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2)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3)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면 이들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우리를 이어붙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됨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설명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됨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양성 가운데 더욱 하나됨을 지켜나가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세가지로 생각해보았다.
I. 구별된 하나됨이 샬롬을 이룬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약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세상에 이 말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해석
주님의 교회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와 우리를 구분하는것이 아닌 세상 속에 구별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BC 6세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혹한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온 이유는 그들의 정체성을 잃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민족말상정책을 펼쳐서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하게하고 역사를 외곡했던 것과 동일하게 정복자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으로만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개조하기 원했다.
바벨론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낯설고 살기 불편한 새로운 장소였다.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적응이 필요했다. 특별히 바벨론과의 관계를 잘해야 했다. 그러려먼 그들의 문화에 잘 순응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땅 가운데서 어디에 정착을 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당시에 포로로 잡혀온다는 것은 집단 거주지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일정 바운더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어디에서 지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시 깊숙히 들어가서 살 수도 있었고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그러나 여전히 바벨론의 통제 아래에 있는 외곽 지역에 살 수도 있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곳을 선택하겠는가?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내부 안에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의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의견이었다.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이스라엘이 신령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도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당시에 제1의 망명지역인 케바르 운하나 다른 지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바벨론 문화와 최소한의 접촉만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도시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라"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곳에 사는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그 사회를 위해서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삶이 아닌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
화
우리가 호주에 있을때 부르더호프라는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적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미국에서 호주로 이민을온 이민자 들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간판 공장을 운영하며 살았다. 이들은 나갈랜드 사람들처럼 악보가 없이도 화음을 맞춰서 노래를 정말 아름답게 한다. 기독교인이지만 카톨릭처럼 여성들은 긴치마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남성들도 거의 비슷한 옷을 입는다. 누구하나 튀는 사람이 없다. 그들 안에는 정말로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어려움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이었다. 공동체 안에서의 규율은 엄격하다. 그 공동체는 자급자족을 위해 간판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해야 했다. 핸드폰 사용은 불허하며 리더의 허락을 받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폐쇠성 때문에 그들 자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많이 듣게 되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이 공동체 안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외부의 사람들과 지역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내가 있던 공동체도 큰 고민 중 하나는 외부의 사람들과 어떻게 접족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주변의 이웃들을 찾아가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도와줬다. 집을 고쳐주기도 하고 누가 아프다고 하면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주기도 했다.
우리는 한주에 한번씩 청년들을 데리고 나가서 지역의 순복음 교회와 협력하여 뉴캐슬 대학에서 전도를 했다. 보통 제자훈련이라고 하면 그냥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밖으로 나가서 함께 전도하는 시간들을 통해서 내가 깨닫게 된것은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산다는 것이었다.
적용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렘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들을 속박하는 도시의 평안과 번영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공공의 이익을 섬길 것을 기뻐하신다. 그것은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믿음위에선교회로 모였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더 나은 믿음, 더 나은 공동체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주일에 한번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제는 지역사회를 돌아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봐야 할 때이다.
최근 교회 주차장에 버려진 담배꽁초 치우기 시작했다. 한동안 일버러 치우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무질서하게 버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께서 담배꽁초를 치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부터 보이면 쓸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에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러나 버려진 담배꽁초를 보고도 모른척하던 마음에서는 더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지는 않았을까!
김연화 집사님이 오시고 참 회개를 많이 하게 된다.
교회 초창기에 그 마라탕 집에 전도하러 갔었는데 알바생이 있었다. 매몰차게 거절해서 그 다음부터 안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잃어버린 양이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게될 때 주님께 참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언제까지 남탓만 하고 핑계를 대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지난 주일 영어 성경공부에서 나눴던 말씀이다. 십자가의 강도 중에서 한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예수님 탓을 한다. 자기가 잘못해서 형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자기를 구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한다. 반면에 다른 편에 있던 강도는 주님을 인정해 드리고 그분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한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II. 사명으로 하나됨이 살롬을 이룬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약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구별하신데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명으로 하나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요나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야기를 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으로 사는 삶이다.
해석
열왕기하 5장에서 아람와의 군대장관 이었던 나아만은 문등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고 그의 말대로 요단 강에서 일곱번 씻은 후에 나병이 고침을 받았다.
아람 왕국에서 나아만 장군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는 아람왕이 그들의 신전에 들어갈 때 그 왕과 함께 신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람 왕은 그 신전에서 그들의 신에게 예배를 드렸다.
그렇다면 나아만이 개종한 후에는 어떻게 하는것이 맞는가? 그는 하나님을 믿게된 이후에도 여전히 아람왕을 도왔다.
[왕하5:17-19]
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아만의 요청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었다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아만 장군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아람 왕이 이방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그가 도움 받는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서 흙을 가져와 그가 모시던 왕과 함께 이방의 신전에 들어갈 때마다 그 흙을 놓아주고 무릎을 꿇었다. 아람 왕이 림몬 산당에서 그 신을 예배하는 동안 나아만은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바뀌어야 하며 그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명으로 사는 것이다.
예화
내가 있던 공동체는 자원봉사로 일하는 곳이었다. 그 누구도 돈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어떤 사람은 더 적게 일한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했다.
세상에서는 월말이 되면 열심히 일한 만큼의 월급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매월마다 다음달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매달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지만 그것이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 일의 동기를 바꾼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들을 다하기 위해서 일한다. 그것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어떤 일이든지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지만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그들이 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전혀 책임감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과로하며 지나치게 일한다.
사역의 현장, 사명의 현장에서 대충 일하는 사람은 작은아들과 같다. 그는 오직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서만 적당히 일을 한다. 반면에 사역의 현장에서 과도하게 일하는 사람은 첫째 아들과도 같다. 그는 과도한 업무를 통해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대다수의 일들은 복음을 위해서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일들인 경우가 많다. 오늘도 성도님들이 각자 섬기는 모습들을 보며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래서 목사는 부족해도 성도님들이 참 성숙하고 좋으시다는 생각을 했다.
III. 공동체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 한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약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됨, 즉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해석
공동체로 교회로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팀 켈러 목사님은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 공동체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함께 모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았고, 함께 식사하며, 영적, 사회적, 감정적으로 서로에게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고 따라가는 제자로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공동체입니다.
둘째, 공동체 없이는 깊은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성격은 주로 우리와 함께 식사하고 놀고 대화하며 상담하며 교류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가 우리를 가장 깊은 수준에서 형성합니다.
복음이 나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놓을 때,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나를 느끼게 하는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본질적으로 복음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은 깊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깊은 공동체에서만 우리는 복음의 형태를 갖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약 당신이 복음이 당신을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당신은 함께 삶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하고 서로의 죄를 고백해야 하며 서로를 책임져야 합니다.
셋째, 공동체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공동체를 복음의 결과로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를 복음 전파의 결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 자체가 복음의 선언이자 소통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아 이미지가 필요하며 자아 가치를 느끼기 위해 무언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업이라는 일을 목적을 위해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자아 이미지를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내 모든 관계는 사실상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 가치 그리고 사명이기 때문이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정체성(선택받은 사람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가치:(쓰임받는 도구들)
"거룩한"이란 구별된것,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룩한 나라"란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나는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만들어 새롭고 다른 곳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제사장은 중재자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합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필요를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제사장은 또한 상담자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생활에 깊이 관여합니다. 하나님을 백성에게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왕국의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분리된 거룩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그런 종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하시는 것은 그분이 진짜로 오신 것과 기독교인들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낸 것을 사람들이 믿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우리의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을 통해 서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성숙은 복음의 사명의 실제 비밀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없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목적은 새롭고 구별된 사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체를 통해서 뿐입니다. 공동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깊게 변화할 수 없으며,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적용
나는 공동체를 통해서 내 안에 깊이 숨겨진 죄를 보았다. 또한 나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경험했다. 또한 나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일하심을 경험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선교한국과 같은 큰 집회가 지역사회에서 열렸다. 대략 2000여명이 모이는 큰 강당에서 나는 내가 있던 공동체를 대표해서 말씀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영어도 못하고 동양인이라고는 나 혼자인 상황에서 주님께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물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선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 계명과 대 사명의 연결이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속해 있던 공동체가 아니었다면 나로써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공동체의 대표자로 세우셨고 세상으로 보내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