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세가지 덕목

사도바울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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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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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선교의 3가지 선교적 덕목

오늘 말씀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편지이다.
데살로니가는 어디인가? 로마의 속주였던 도시국가, 그리스북쪽의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데살로니가 이다.
데살로니가 역시, 세계교회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로마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던 시기에 가장 중심역할을 하던 곳이다.
도시 안에는 다양한 로마신전들이 있었고, 신의 산인 올림포스산이 보였다.
바울 일행이 두번째 선교여행지로 이 데살로니가로 들어갔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회당이다.
이방 지역 안에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곳 회당,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 커뮤니티 역할하는 곳 회당.
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상하게 이방사람들만 복음을 받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오히려 동네 불량배들을 동원해가지고 방해를 하고 시청에 고소를 하고 난동을 부렸다.
사동행전 17장에 이 일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방사람들이 얼마나 귀한가. 온갖 우상들앞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핍박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도 감수하고 성도가 된 것이다.
6절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주변 도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아름다운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환난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상을 버렸다.
교회사 이야기 나눌때 이 시기에 박해를 이야기했다. 황제에게 절하지 않고, 우상들의 예배모임, 문화행사에 나오지 않으면 핍박을 당했다. 그런데 이것들을 거절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일상이 다른 사람들로 보였다.
타키투스라는 사람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사람들 처럼 보였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정말 자극적이고 다채롭고, 재미있고, 즐거움이 가득한 다양한 문화를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이 수많은 것들을 거절하고 자신들을 스스로 격리한것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스스로 많은 어려움들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정말 짜증나게 했다.
그런데 반대로 다른 지역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너무도 감동적이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라고 바울이 다른 이야기를 전했겠나? 아니다 바울의 복음 내용은 한결같이 동일하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신 이유와 그일로 인해 우리죄가 용서받고, 또 부활하셨고, 그 부활로 우리가 천국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 이것밖에 없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이었다.
9절에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온갖 박해를 당하면서 선택한 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어떠했을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나의 신앙을 커밍아웃해서 말하는 것이 사실 어렵다.
나의 생활을 사람들이 관찰하고 저울질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롭지 않다고 느껴진다.
내가 회심을 한다는 것,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때 모르고 하는 습관들을 엄마가 혼내면서 바꾼다. 그리고 다음날 신기하게 그 일들을 고쳐서 한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한다. 우리가 회심하는것도 이와 동일하다. 행동과 생활이 눈에 보이게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를 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성도들이 주변 우상문화에 빠져 사람들 눈에 너무 다른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삶과 행동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사도바울이 이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어떻게 표현했나?
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예수를 향한 소망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신앙생활의 덕목 세가지가 이것이다.
신실한 믿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미리 언급했다. 복음을 받으면 환난 당한다고
3장4절에서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장차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고,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집에용, 교회용이다. 집에서 하는 믿음의 삶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믿음의 삶이 공적영역, 모든 사람들이 보는 어디서도 동일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실한 믿음이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믿음의 모습 말이다. 이 모습이 선교적인 덕목이다.
교회에서는 친절한데 밖에나오면 깍쟁이가 되고, 교회에서는 다 할 것같은데 회사가면 부리기만 하고,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가로막게 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오는날처럼 찾아다니면서 전도라는 것을 했을까? 바로 공적 영역에서 그들이 행하는 믿음 생활을 통해 전도가 되었다. 6절에 의미가 그렇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완전 이상한 종류 사람들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저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예수가 무엇이길래 저렇게 살까?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데도 저렇게 기뻐하며 살까?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2. 헌신된 사랑,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나타는 특별한 생활이 바로 사랑으로 헌신하는 모습이다.
편지의 시작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 편지를 쓴다고 했다. 다른 서신서에는 그냥 그리스도 안에, 주예수 안에라고 했지 이렇게 아버지와 예수 안에라고 표현한 곳이 한 곳도 없다. 이것이 유일하다.
왜그랬을까. 이들은 우상의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지금 새로운 가장 큰 신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그 가장 크고 위대한 하나님 신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사랑이 온갖 박해와 고난을 견디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이 경험한 우상의 사랑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사모님한테 어떤 영상 릴스를 보냈는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표현은 물도 주고 맛있는거 주고....하는 것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표현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사랑했나? 자기 아들 예수를 죽이면서 죄에서 구원했다. 하나님의 헌신된 사랑이 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뿐아니라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일행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2장8절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섬기고, 특별히 교회안에 있는 교회가족과 순회하는 바울일행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헌신하는지 바울이 알게되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헌신한 사랑이 우리 서로서로에게 사랑의 헌신으로 나눠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에게 이 사랑의 헌신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웃들에게 교회 이름으로 함께 사랑의 헌신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로도 하지만 또 개인이 속한 직장과 여러 모임속에서 그런 사랑의 헌신이 필요하다.
3. 기다리는 소망,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지금 소망이 무엇이겠는가?
박해받고 고난받고 있는 이들이 기다리는 소망은 오직 한가지이다. 빨리 예수님이 이땅에오셔서 이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지금의 모든 상황들을 끝까지 잘 인내하라고 부탁을 한다.
소망이라는 단어를 보면, 사전적으로 어떤 일을 바라는 것이다. 미래나 이뤄질 것들의 대한 예견이라 할 수 잇다. 그런데 기독교의 소망은 바라는 어떤 일이 이뤄질 것의 대한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4장 13절에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슾러하지 말아라 말한다. 이의미는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소망이 없다, 소망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은것이 소망이 끝난 것이 아니다. 부활하고 주님이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이 남아 있다.
17절에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기독교인의 소망은 하나님과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이 위협해도, 불의가 협박을 해도, 사단이 공격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00년전 우리 믿음의 선배들, 이 나라가 일제식민지배를 받을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광복에 앞장 섰던 이유는 이 소망이 있어서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일제 만행이 두렵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소망이 온통 돈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한정되 있다. 돈에 우리 소망이 달려 있는 것처럼 살고 있으니세상에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세상에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은 돈을 잃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어려움당하고....) 이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보며 소망을 꿈꾸겠는가?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손이다. 하나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라는 믿음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 선교적 덕목,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덕,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될 능력, 자세가 무엇인가?
바로 신실한 믿음, 헌신된 사랑, 인내하는 소망이다.
정말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대안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이 세가지 덕목이 갖추어지지 않아서이다.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공동체이다.
교회안에 오면 온갖 차별을 격는자, 병든자, 실패한자, 갇힌자, 슬퍼하는 자, 심지어 우쭐하는 자, 자랑하는 자, 부유한자 상관없이 따뜻하게 식탁을 나누는 것이다. 교회는 환대공동체여야 한다.
어떤이가 와도 환대를 경험해야 한다. 믿음, 소망, 사랑을 사도바울은 선교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교회가 믿음 소망 사랑으로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여러분들이 있는 삶의 자리또한 그러해야 한다.
제가 일할 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뭔 줄 아세요. “사장님, 이렇게 해가지고 남는것이 있어요?” 우리가 대접받고 가는 기분인데요.
우리에게 이 믿음 소망, 사랑이 무장되어 있어야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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