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30일 수요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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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본문 : 룻기 1장 1-14절
제목 : “말씀의 연단”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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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하나님은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 우산질문 :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회복 시키시는가?
❚ 대지
➀ 내가 가장 의지하는 것을 무너뜨리심(3절)
➁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심(6절)
➂ 믿음의 동역자를 허락하심(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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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오늘 함께 읽은 이 룻기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제 완전히 무너져버린 이 나오미와 룻의 집안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보아스라는 한 남자가 어떻게 그 무너진 한 가정(기업)을 다시 ‘회복’ 해나가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회복’이라고 하면, 보통은 우리 자신의 건강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쉬면, 알아서 회복이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아픈 사람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될 것이다!”라고 위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회복은 ‘신앙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 회복, 원래 하나님 백성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그 회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러한 회복을 꿈꿉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신앙의 회복, 교회적으로는 예배의 회복, 그래서 수적인 부흥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참 좋은 일이죠. 이전 보다 더 열심히 예배에 나오고,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모이는 것은 누가보아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회복을 말하다 보면,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겉모습에 치중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하는 것, 빈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 참 좋은 일이지만, 사실 그 자체를 곧 신앙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이 말하는 회복의 초점은 ‘겉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외적인 부흥이 하나의 열매로써 등장을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강조하시는 부분은 사실, 이 겉모습의 화려함, 그럴듯한 신앙적 행위, 그런 것보단, 이 내면의 풍성함,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내가 얼마나 실제 삶속에서 밀착되어있는가, 또 정말 그 분과 나의 관계가 얼마나 진실되고, 실제적인 지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ppt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이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당시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최고 수준으로 드려졌다는 것이죠. 제물이 부족하지도 않고, 사람이 모자란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사람들은 꽉꽉 들어찼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면, 그 예배를 드리는 사람, 그 예배자의 실제 삶이 하나님의 성품과는 전혀 상관없었다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 받은 은혜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거에요. “너희의 수 많은 예배가 무슨 소용이냐” “나는 이미 배가 불렀으니, 너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나에게 뭘 가져와서 뭔가 해결을 보려고 하지말고, 좀 그 은혜를 흘려 보내주어라! 은혜받은 대로 살아가라! 이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는 예배 행위도 중요하지만, 실은 우리의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로서, 그것을 입은 자로서, 실제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원하는 그 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초점이 사실 거기에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인 이 룻기의 시대가 정확히 그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사시대라고 하는데, 분명 이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땅도 다 분배했고, 이제 어느 정도, 나라의 모양은 그럴 듯 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안에 있어야 할 내용이 없는 거에요. 이스라엘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출애굽할 때부터, 그들을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어린 양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피를 묻히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 담겨진 내용도 은혜와 긍휼이어야 하는거죠. 이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은혜입니다. 긍휼입니다. 자비입니다. 근데, 그 시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겉모습에만 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힘 있고, 돈 있고, 그럴 듯한 모습을 갖춘 나라가 되는 게 그 당시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한 가지 소원이었죠.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살아보자!
그런데요, 바로,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마을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바라보고 계시죠. 바로,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룻기 전체의 말씀을 보면, 이 보아스가 얼마나 능력있는가, 얼마나 힘이있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신속하게 한 가정의 기업을 잇기 위해서, 죽어가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일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너희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 너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을 좀 보라! 라고 하시는 거죠.
(ppt2) 먼저, 오늘 말씀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기 4장 1절)
먼저,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기업 무르기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사실, 이 당시 기업을 무른다 라는 것은 뭐냐면, 쉽게 말해서, 내가 잃어버린 땅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는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과 같이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유산이자,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땅을 사고 팔수는 있어도 그 땅의 소유권은 절대 넘기지 않았습니다. 즉, 한번 이 땅을 소유하면, 영원히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땅을 기업, 즉 유산, 상속물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업을 다른 사람에게 판 경우에는, 반드시 그 땅을 다시 되찾아오는, ‘기업을 무르는’ 일이 필요했죠. 하나님과의 약속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 일은 가장 가까운 친족부터 나서서 해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이 일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고,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면, 그 기업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와 룻에게 어떤 문제 생겼냐면, 자신의 그 기업 무를 자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업 무를 자가 있는데, 그가 전혀 움직이질 않습니다. 예전에 팔아버린 그 기업, 정확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줄 사람이 제대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나오미의 집안 전체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위기에 쳐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이 한 가정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시대를 보여주는 정확한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 살고는 있지만, 정말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 말씀하시고 순종하는 그 관계가 끊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을 회복시켜줄 사람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거죠. 자신의 친족이에요. 피붙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음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문제일까요? 이것이 바로, 신앙과 실제 삶이 동떨어진 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때, 이제 누가 등장하냐면, 보아스가 등장 합니다. 그가 대신 나서서 일하기 시작해요. 참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막막한 순간에도, 자기 백성들에겐 반드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이 보아스가 그 기업을 무를 사람 중에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나오미와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사람이 먼저 나서서 이 일을 하고, 그게 안되면, 그 다음 순서에 있는 사람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업 무를 순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이 기업을 회복할 첫 번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이 기업을 대신 무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무너진 한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상당부분 써야 하고, 끝까지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러면 그 가정이 내 것이 되는가? 아닙니다. 나는 죽은 사람 대신 그 기업을 이어줄 뿐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불평도 없습니다.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합니다. 아니, 오히려 빨리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신속하게 그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ppt3) 보아스는 3,4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룻기 4장 3-4절)
예. 먼저,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상황을 다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 형제의 기업이 있고, 그 기업을 다시 세울 일이 있는데, 네가 그 일을 하겠느냐“ 하나, 하나, 설명을 하는거죠?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 사실 이게 맞는거죠. 옳은 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율법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ppt4) 5절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룻기 4장 5절)
지금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기업을 무르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한다! 아까 말했듯이, 이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사고 파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일이고, 또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야만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아스가 경고합니다. “네가 그냥 이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손해를 감수해야만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원래 기업무를 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ppt5)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룻기 4장 6절)
예 말 그대로죠. 내가 손해볼 일은 안하겠다 라고합니다. 지금 이 사람의 마음에는 자신의 친척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로운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을 책임지려는 마음보다는, 자기 유익을 앞서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만 가득합니다. 여기서, 이 중요한 역할을 가진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친족의 이름을 이어갈 마음이 없는 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시는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기업을 세우는 일,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기업 무를 자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그 결심을 통해서 가능하다라는 거죠.
즉, 하나님은 이 보아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를 세워가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듯이 어떤 사사같은 강력한 영웅인가, 율법인가? 돈인가? 하나님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이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이유는 이 보아스가 보여준 희생의 정신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물론, 그 기업을 무르기 위해선 돈도 필요합니다. 능력이 필요합니다. 율법도 필요해요. 그것이 보아스에게 없었다면, 이 기업무르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쓸모있게, 살아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보아스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죠.
(ppt6) 그래서, 보아스가 모든 사람 앞에서 선언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룻기 4장 10-11절)
그렇습니다. 이 보아스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 기업을 회복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리고 선포합니다. 이제 이 기업은 제가 회복시키겠습니다! 참 다행인 것은, 이 보아즈의 희생덕분에, 룻은 기업을 이을 후손을 얻게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해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게되죠. 모든 사람을 구원할 그 중요한 계획이 이렇게나 작은 성에서, 누구도 보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을 희생했던 이 보아스를 통해 이뤄집니다. 정말,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정말 이 작은 순종의 행동, 그 한 가지를 통해, 큰 구원 일을 이뤄가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참 재밌는 부분은 이 룻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 오벳입니다. 오벳을 문자 그대로 보면, ‘섬김’ 혹은 ‘섬기는 자’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종입니다. 종! 왜 하나님은 룻에게 멋진 이름이 아닌, ‘종’이라는 아들을 주셨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주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힘에서도 아니고, 엄청난 리더십도 아니고, 어떤 프로그램도 아니고, 바로 이 ‘작은 종의 섬김’을 통해 이뤄짐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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