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공동체에는 뼈때리는 사람, 뼈빠지는 사람 모두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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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공동체에는 뼈때리는 사람, 뼈빠지는 사람 모두 필요합니다
[서론]
이번에 하와이에 큰 불이 나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말 완전히 모든것이 불탔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현재 실종자도 3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집들은 모두 무너졌고, 도시는 거의 폐허수준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특히 하와이는 목조건물이 많아 피해가 더 컸습니다.
그러나 한 집만큼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습니다.
한번 사진으로 보실까요?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 집이 이토록 견딜수 있었던 이유는 건축재료와 건축방식에 있었습니다.
견고한 콘트리트를 가지고 독특한 방식으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불길에도 살아남을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집을 보면서 교회 공동체를 묵상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때때로 교회 안과 밖에서 위기를 겪습니다.
견고한 공동체는 그 위기를 잘 이겨내지만 견고하지 않은 공동체는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며 빨간 지붕집처럼 견고히 설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서를 거쳐 열왕기서에 이르면 이제 다윗은 70살이 넘는 노쇠한 왕이 됩니다.
인생의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노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노쇠한 왕이 기력을 회복할수 있도록 젊은 처녀를 붙여줍니다.
고대세계에서는 나이가 들어 혈액순환이 안될때 그런 방식으로 해결하곤 했습니다.
다윗왕이 죽으면 신하들의 지위도 흔들릴수 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윗왕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건강의 위기와 함께 찾아온 그의 혼미해진 판단력입니다.
우리 육체와 내면은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영적 건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다윗의 잘못된 판단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후계자 선정을 미루다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큰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극보면 나오듯이 왕자들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다윗의 건강과 판단력이 안 좋은 틈을 노리고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도니야입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중 네번째 아들이 아도니야입니다.
첫번째 아들이던 암논은 다말을 강간하는 바람에 나중에 셋째 동생이던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번째 아들은 길르압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병으로 일찍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 다음 세번째 아들이 압살롬인데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네번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장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도니야는 매우 잘생겼고, 야심 찬 인물입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왕위승계 순위도 그가 1순위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다윗의 건강이 악화된 틈을 타서 자신이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영향력있는 신하들과 왕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풉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곧 왕이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심지어 평상시에는 마치 벌써 왕이 된것처럼 멋진 병거와 호위병 50명을 데리고 다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강력한 경쟁상대가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혈통으로 따지면 왕위 계승 순위에서는 밀립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아내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자 나단이 현재 나라의 위기를 알아차리고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판세가 아도니야로 완전히 기울게 되면 반대 입장인 자신과 밧세바, 솔로몬은 숙청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언자 나단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후계자로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이스라엘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운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를 알아차린 그는 곧바로 다윗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밧세바를 만나 다윗을 설득할 전략을 짭니다.
이제 나단에게서 설명을 듣고 현재의 위기를 깨달은 밧세바는 다윗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과거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 후 계획대로 나단도 다윗을 만나 이러한 나라의 위기를 알리고 그의 잘못된 판단을 책망합니다.
그럼 도대체 왜 다윗은 후계자 선정을 미룬 것일까요?
다윗이 망설인 이유를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다윗은 아도니야를 인간적인 마음에서 선호했던것 같습니다.
아도니야는 혈통으로는 왕위계승 1순위이고, 용모도 뛰어나서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습니다.
그래서 1장 6절에 보면 다윗은 아도니야가 마치 왕이 된것 처럼 행세하고 다니는데도 한번도 묻거나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일탈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자신의 뜻 사이에서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욕심때문에 순종을 늦출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 나아가 내 욕심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교묘하게 바꾸기도 합니다.
순종을 늦추는 것을 스스로 변명하거나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기다리던 사무엘이 계속 오지 않자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드려야할 제사를 자기 마음대로 드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 먼저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사울입장에서는 두려워하는 군사들을 잡아둘 도구가 제사였던 것입니다.
또한 내가 드리나 나중에 사무엘이 드리나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바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정타가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 유명한 말을 한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너의 인간적인 생각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다윗도 충분히 그럴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게 맞습니다.
그가 장자이기 때문에 문제될게 없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그는 밧세바라는 불륜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서 두고두고 시비거리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솔로몬이었기에 다윗은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무뎌진 영적 감각을 다시 깨워준 사람이 바로 예언자 나단입니다.
나단은 예전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을때에도 그의 죄를 지혜롭고, 용감하게 지적한 인물입니다.
이번에도 나단은 나라의 위기, 다윗의 위기 앞에 나선 것입니다.
나단은 자기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충고를 한 것입니다.
다윗의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윗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수 없습니다.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장담할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 때문에 지혜와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럼 과연 다윗은 밧세바와 나단의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29절입니다.
왕은 이렇게 맹세하였다. “나를 모든 재난에서부터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내가 전에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두고 분명히 그대에게 맹세하기를 ‘그대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될 것이며, 그가 나를 이어서 임금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하였으니, 이 일을 오늘 그대로 이행하겠소.”
밧세바와 나단의 말 덕분에 다윗은 자신의 영적인 감각을 되찾습니다.
뿌옇던 판단력이 또렷해진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떨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항상 위기에서 구원해주신 주님이 이번에도 구원해주실 것을 믿으며 선포합니다.
역시 다윗은 다윗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윗은 들을 귀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잠언 15:31-3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밧세바의 잠자리 토크에 못이겨 무심결에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한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영적 감각을 깨워준 사람이 바로 예언자 나단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지혜와 용기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잠자는 우리를 깨우십니다.
깨어지고 왜곡된 세상속에서 살다 보면 우리의 육체와 내면이 온전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잠을 많이 못잔 사람처럼 영적으로 흐리멍덩해질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들어 자꾸 아파도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질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일로 치이며 살다보면 영적으로 둔감해질때가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를 다시 일깨워줄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나단과 같이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서로 서로 깨워줄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가 견고한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관계가 깨질게 두려워 옳은 소리하는 것을 망설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과감하게 충고할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냥 막해서는 안되고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만약 나단이 밧세바를 먼저 보내지 않고 자신이 곧바로 다윗을 찾아가서 혼냈다면 어떨까요?
그 결과를 알수는 없지만 분명 안좋은 결과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나단은 죽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사람도 잘 알고 있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밧세바 먼저 보내고 그 다음 자신이 다윗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린 것입니다.
어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옳은말이지만 지혜롭게 때와 상황에 맞춰 하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 욕심만 따지면 그 순간 옳은 말을 하는 것을 참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 말을 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면 참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25:11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우에 알맞는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이다.
옳은 말이라도 금사과가 될지 똥사과가 될지는 때와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자신의 결심을 밧세바에게 알린 다윗은 자신의 말을 빠르게 실행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않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아도니야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지체한다면 나라에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에 빠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리더의 빠르고 흔들림없는 판단이 공동체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정신이 돌아온 다윗의 지혜롭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십시오.
32-35절입니다.
다윗왕이 사독 제사장과 나단 예언자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불러 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나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가 타던 노새에 나의 아들 솔로몬을 태워서, 기혼으로 내려가도록 하십시오. 사독 제사장과 나단 예언자는 거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그런 다음에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하고 외치십시오. 그리고 그를 따라 올라와, 그를 모시고 들어가서 나를 대신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히십시오. 그러면 그가 나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것입니다. 그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다윗이 취한 첫번째 조치는 신하들을 불러 솔로몬을 자신의 노새에 태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통령 전용기를 물려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노새입니다.
자신의 노새를 솔로몬이 타게 하여 그가 후계자가 되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기혼으로 내려가라고 한 것은 기혼이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수원지이기 때문입니다.
샘물이 공급되는 곳에서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왕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아도니야가 잔치를 베푸는 곳이 기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그가 그 소식을 곧바로 들을수 있도록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윗이 판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는 일입니다.
사독 제사장과 나단 예언자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나팔을 불어 왕으로 선포합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솔로몬이라는 표시입니다.
반면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된척 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략을 써서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면 왕이 될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모든 일에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이 중요합니다.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왕의 안좋은 건강을 틈타 정당한 절차를 생략하고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의 인정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인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위기는 결과에 집착할때 생깁니다.
자꾸 결과에 집착하고 과정을 무시한다면 그것이 곧 공동체의 위기라는 증거입니다.
위기일수록 우리는 과정과 절차를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이 중요합니다.
심지어 결과가 안 좋더라도 과정이 올바른 것이라면 주님은 분명 인정해주십니다.
그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견고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견고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있어 중요한 두가지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서로 영적으로 도전해주고 깨워줄수 있는 구성원들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셋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고 신뢰하며 충성스럽게 따르는 구성원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모든 지시를 마치자 그의 충성스런 군대장관이던 브나야가 대답합니다.
36절입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아멘, 임금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신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 계셔서, 그의 자리가 우리 다윗 임금님의 자리보다 더 높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브나야는 다윗의 호위대장입니다.
그는 다윗의 말을 듣고 곧바로 충성을 맹세합니다.
솔로몬의 나라가 다윗의 나라보다 더 높아지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이 참 복된 사람인 것은 그에게는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단도 그렇고, 사독과 브나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처럼 다윗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이유때문이 아닙니다.
브나야의 고백에도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한 명령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세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처음에 빨간 지붕집이 그 불길속에서도 살아남은 비결이 두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견고한 건축재료와 건축방법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공동체가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견고한 건축재료가 필요합니다.
뼈때리는 말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뼈빠지게 충성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서로에게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공동체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충성스럽게 따라야만 합니다.
견고한 공동체가 세워지려면 나단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브나야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견고한 공동체를 세우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건축방법이란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뜻을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로 세워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 튼튼하고 건강한 우리 공동체가 되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