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2 양청] 37-38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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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름수련회를 통해서 십계명 부분을 했기 때문에, 오늘 종말론을 마지막으로 다음시간부터는 86-87문부터 진도를 나갈 예정이다. 십계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주제이다. 오늘은 소요리문답의 종말론에 대한 주제로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자의 죽음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영광스러운 것들 가운데,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신자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시간이고 또 죽는 순간에 우리 영혼이 그토록 사랑하고 고대하던 주님을 뵐 것이다. 신자가 죽는 순간에 성화가 완성이 되고, 우리의 영과 육이 나뉘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평생의 경험했던 은혜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맛보게 될 것이다.
신론으로 시작을 해서 인간론, 기독론과 구원론, 그리고 이제 종말론.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모든 일로부터 우리가 죽을 때와 부활할 때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구원론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유익을 얻는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누리던 유익에 대해 살폈다면, 이제는 죽을 때에 그리고 부활할 때 얻는 유익을 말한다.
37문과 38문 두 문이 종말론에 대한 내용인데 소요리문답을 살펴보기 전에 간략하게 배경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종류로 구분을 하자면 37문은 개인적 종말론을 말하고 38문은 우주적인 종말론이다. 37문을 개인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이유는 누구나 일반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가? 개인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 개인의 종말론이다. 또한 우주적인 종말론이 있다. 굳이 비유로 들자면 군인이 입대를 해서 2년남짓 군복무를 한다. 그리고 전역을 했다. 비상체제로 2년간 군에 있다가 전역을 하는 것, 이것이 개인적 종말론이라고 한다면, 우주적 종말론은 아예 이 땅에 전쟁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군에 입대할 필요도 없고 군 자체가 사실 필요없어지는 것, 그것이 우주적 종말론이겠다. 그래서 38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종말의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37문과 38문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교재 2번을 보시면 되겠지만, 개인의 종말로는 육체의 죽음, 영혼의 불멸, 중간 상태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간 상태라는 것은 내가 죽은 이후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때까지의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그다음에 38문에 우주적인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죽은 자의 부활, 최후심판, 최후의 상태 등을 살펴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뜨거운 논쟁 중에 있고, 지금도 그 논쟁이 가시질 않고 있는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들이 있는 것이 바로 천년 왕국에 대한 것이다. 천년 왕국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가 없다면 신천지나 하나님의교회 같은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릴 수 밖에 없고,그런 이단적인 주장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짐승의표, 666, 베리칩과 같은 극단적인 세대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언제 한번 종말론에 대해서도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길 바란다.
37문. 신자들은 죽음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유익들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의 영혼은 그들의 죽음에서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육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에서 쉽니다.
38문. 신자들은 부활에서 그리스도로 어떤 유익을 받습니까?
답. 부활 때에 신자들은 영광 속에서 살리심을 받아 심판의 날에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죄가 없다고 선언되며 완전히 복을 받아 하나님을 충만하게 영원토록 즐거워합니다.
교재 3번을 보라. 죽을 때 신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죽으면 천국가는 정도로만 이해해왔는데, 이것은 정말 불신자들 전도할 때나 쓸 정도의 너무나도 초보적인 대답이다. 교회를 오래다닌 분들도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이 전부 다르다. 성경이 하나인데 어떻게 대답이 전부 다른가? 그 이유는 전체 성경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가르친 적도 없고 제대로 배워보지도 않았으니 각자 소견에 좋게 보이는대로 상상할 뿐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잘 배워야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 곧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영혼과 육체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리될 때가 바로 죽음이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우리의 몸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 즉시 주께로 올라가 주님을 뵙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분, 이런저런 이상한 가르침들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신자의 죽음이라는 것은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죽을 때 어떻게 되느냐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썩는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영혼은 불멸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회개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할 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내일 네가 나와 낙원에 있게 될거야, 혹은 1년 후 낙원에 있게 될거야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몸을 생각해보라. 주님은 3일만에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시기까지 주님의 몸은 니고데모가 와서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 주님의 몸은 그 무덤 동굴 안에 놓였고 부활하시기까지 거기 있었다. 그 몸은 쭉 거기 놓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옆에 달린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다. 그 강도는 어디 무덤이라도 제대로 준비되었을까? 아마도 쓰레기처럼 여기저기 던져졌을 것이다. 그 몸이 주님의 몸과 분리되어 있을 것인데 어떻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는가? 이는 그 몸이 주님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주님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C를 보면, 모든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인 운명은 둘로 나뉜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요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 따라서 이 땅에서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에게는 하늘 본향이 있고, 죽은 이후에 돌아갈 집이 있으며,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뵐 것이고,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또 다른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대적했던 자들의 영혼은, 영혼이 불멸하기에 죽지 않고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과 비참함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이야기인가?
신자의 성화는 죽음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 신자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내가 아무리 성화의 과정을 잘 겪어왔다 할지라도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지금까지 순종해서 이뤄놓은 삶이 분명 있을지라도 이 땅에서 우리의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신자가 죽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 성화가 되고 어떤 사람은 성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도 얼핏 보면 성화의 성적이 다른 것 같아보이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어떤 사람은 성화가 70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10점도 안되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아니 10점은 커녕 5점도 안 되는 사람도 보인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아까 말했던 그 강도를 생각해보라. 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주님께 간구한 이후로 숨을 거두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뭘 했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일절 한게 없다. 그냥 죽기 직전에 무임승차한 것처럼 보인다. 누구는 평생동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님을 따르느라 고생하는데, 이 사람은 너무 쉽게 구원열차에 올라탔다. 결국 이 강도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있나. 교회에서 우리는 새가 빠지게 고생해가지고 예수 믿고 사는데 저거는 거져 먹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나? “주님, 내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찬양팀으로 섬기고, 수련회때마다 스텝으로 섬기고, 교회 안에서 다양한 훈련도 받고, 헌금도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매 주일마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진짜 정신없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제가 다른 종교에 한 눈을 판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를 안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쟤는 왜 거저 구원하십니까? 쟤는 도대체 하나님 앞에 한게 아무 것도 없는데 왜 구원하시는 겁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 그 사람이나 여러분이나 저나, 주님 앞에 서면 내가 설령 주님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이거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토요일 이 귀한 시간에 청년부 모임에 나오고, 수요예배도 나오고 금요기도회도 나오고 새벽기도회도 나오고. 그러면서 “아! 내가 주님을 좀 심하게 섬기는건가?” 이런 생각이 들면 안되는 것이다. 저를 보라. 목사라는 직종이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죄인 중의 죄인인 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입에 담아주시고, 그 말씀으로 주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를 세워가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목사가 자기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를 놓치게 되면 세상에서 제일 구질구질한 직업인이 될 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 되는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받아서 이 길을 가는지를 놓치게 되면, 나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못하고 다 못하고, 또 난 저 사람들처럼 밤새 술도 못마시고, 클럽도 못가고, 다 못해보다가 천국 가게 생겼네! 내가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지 여러분이 모르면 세상 가장 불쌍한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 은혜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면 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 가운데 이 길에 서 있는지깨닫게 되는 것이다.
E를 보라. 신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영광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영광을 누린다. 성경을 찾아보자. 고후5:1 이 말씀을 펴두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은 장박집, 텐트를 우리 육신에 빗대어 말한다. 우리 육신이 늙어 무너지면 그 때는 주님이 지으신 영원한 하늘본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소망인가? 고후5: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후5: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이 말했지만, 자신은 죽고 싶다는 말을 피력한다. 이는 그가 어떤 염세주의에 빠져서가 아니라 바울은 죽는다는 게 신자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는동안 복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나? 물론 복음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고는 있으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영광이 있으니,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마치고, 주님이 예비하신 하늘 본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 영광을 그가 알았기 때문에 고린도후서와 또 빌립보서에서도 말한다. “나는 사실은 너무너무 주님과 함께 지금 그곳에서 같이 살고 싶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못 가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 너희를 복음 가운데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는 동안 우리는 사는 것이다. 그 사명도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 사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신자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4번에, 죽을 때 신자의 육신은 어떻게 되느냐? 영혼은 어떻게 된다 고 했었나? 신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영광 가운데 들어올려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영생을 누린다 했다. 그럼 신자의 몸은 어떻게 되는가? A를 보라.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으로, 영혼이 몸을 떠나게 되면 몸은 흙으로 지은 물리적인 구성물 밖에 안된다. 생명이 아닌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함께 있을 때만 그렇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죽으면 썩어요. 죽지 않으면 안 썩는데 죽으면 썩는다. 영혼이 떠나면 썩기 시작한다.
그런데 B를 보라. 신자가 죽을 때 그의 육체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육신이다. 죽음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영과 육은 분리가 되고 영은 하늘로 들어올려지고 육은 이 땅에서 장사지낸바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육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부활 때까지 이 땅에서 잠을 자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신자와 연합했다 할 때 그건 영혼과만 연합했다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이 합쳐진 그 인격과 연합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그 육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육신이고, 부활 때까지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살전 4: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앞서갔던 모든 성도들의 몸은 주님의 재림까지 땅 속에서 쉬고 있다. 사람의 육신을 보라. 죽은지 몇년이나 지난 육신은 땅속에 사지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썩는다. 흙으로 돌아간다. 만일 그대로 있다 한다면 오늘 아담의 시신을 찾을 수 있어야지. 무엇보다 썩지 않는 시체로 인해 온 세상이 시체로 뒤덮힐 것이다.
고전15:35-44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15 장은 부활장이다. 15장 전체가 장차 일어날 부활에 대해 말씀한다. 35-36절을 보라. 여러분 내가 호박을 심고 싶어서 호박씨를 심었다. 그러면 그 씨의 모습 그대로 자라는가? 그렇지 않다. 그 씨의 형태 자체가 사라진다. 지금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37절을 보라. 우리 교회 주변에도 큰 나무들이 있는데,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 그 나무의 미니어처 모양을 심는게 아니라 그 나무의 씨를 심는다. 그런데 그 씨앗에서 모양과 크기가 다른 나무가 자란 것이다. 사과씨앗을 심으니 사과나무가 자라나고, 복숭아 씨를 심으니 복숭아나무가 자라난다. 우리의 부활도 그렇다. 분명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 정체성은 동일하다. 그래서 39절-44절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육의 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다. 44절에 “신령한 몸”과 “영의 몸” 이라 한다. 여러분의 몸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몸은 이렇게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신령한 몸, 영적인 몸이라고 한다. 영혼은 눈에 안보이는데, 영적인 몸이라는 표현을 한다. 영혼은 형체가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이 영적인 몸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 육신의 몸과 비교해서 우리는 이 부활체, 부활한 몸이 어떤 모습일지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장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의 몸이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신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영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한 번에 두 장소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이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영의 상태이셨다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겠다. 하나님도 영이셔서 무소부재하시지 않는가?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몸을 입고 계신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부활 때 영적인 몸을 입는다는 것은, 썩지 않는 차원에서 영적이라고 표현했을 것이고, 영원하다는 차원에서도 영적이라고 했을 것이며, 더 이상 죄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다양한 의미들을 포함하면서 우리의 부활체가 정체성으로는 우리의 육신의 몸과 연결되지만 연속적이지만 그러나 새로운 몸이 될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아까 읽었던 살전4:14 의 말씀과도 같이 주님 다시 오실 그 때, 우리 몸의 부활이 있기 까지 우리 몸은 땅 속에서 잠을 잔다.
반면, 불신자의 육신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쉼을 누리는 게 아니라 지옥 같은 무덤에 처해진다. 쉰다,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대해서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자의 육신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건 쉰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교재 5번을 보라. "영광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했다. 우리의 영혼만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온전한 생명의 형태와 누림이 아니다. 육신이 부활하고 영혼과 연합하여 영광을 누릴 때 구원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다가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이 즉시 주님을 뵙게 되고 주님의 품에 안긴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언제 구원이 완성되는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의 부활이 있을 때. 그때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몸과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이고, 그 때 진정한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신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날을 종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들의 끝나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그 날은 영광으로 충만한 영원함의 시작이다.
이제 6번을 보자. 신자들은 심판날에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죄가 없다고 선언된다고 했다. 여러분, 심판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려운 날이 아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2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롬6:6 를 찾아보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첫사람 아담과 연합했던 옛 사람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그 옛 사람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는 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다. 이미 그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된다?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우리를 인정하시고 죄가 없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이미 그 값을 독생자의 피로 지불하셨으니까. a를 보라. 신자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한다. b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인격적이고 육체적이며 가시적이고 갑작스러우며 영광과 승리의 주님으로 오시는 재림이 될 것이다. 많은 이단들이 이를 바꿔서 설명한다. 재림예수는 비밀리에 등장할 것이다, 재림예수는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나타나실 것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논리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오직 자기들 단체에서만 재림예수께서 나타나실 것이기에 자기 사이비 단체에서 못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먼저 주님의 재림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주님 자신이 친히 오시는 것이지, 무슨 번개를 보내시거나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게 아니란 것이다. 또한 육체적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입고 오시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단들이 이미 예수님이 재림했는데 뭐 어쩌고 이딴 소리하는 거 이제 현혹받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갑작스럽다, 예상치 못한다했다. 또 5번에 영광과 승리의 주님으로 오신다 했다. 주님의 초림때처럼 허름한 마굿간에 오시거나 어떤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만유의 주 만왕의 왕으로서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 c번을 함께 읽어보자.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로 심판을 받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생명책에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모든 의로운 행위가 그들에게 전가되어 영광과 존귀와 영생의 판결을 받는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만일 우리의 윤리적인 행동,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천국행 판결을 받을 자는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로 최종판결을 내리신다면, 여러분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적어도 예수님께서 그분 옆에 달린 강도한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이 말씀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왜? 그는 이제 막 구원받아서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절대로 착각하면 안된다. 은혜는 은혜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기준이 되어 천국행 지옥행이 결정난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라.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윤리 실천 운동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은 은혜를 반쪽짜리로 폄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는 무엇인가?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그 사람을 반드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정말 수도 없이 넘어지고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의 그 모든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대 앞에 설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것이다.
왜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허름한 거지 같은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선 모습 그 환상을 왜 보여주셨는가? 사탄 마귀가 이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놈 입은 옷 좀 보라고, 더러운 옷 입고 지금 하나님 앞에 서가지고 이놈 심판받아야 된다고 참소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놔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새 옷을 갖다가 입히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그 심판대 앞에서 주시는 은혜이다.
그다음 7번을 보면, 완전히 복을 받아 하나님을 충만하게 영원히 즐거워한다고 말씀한다. 그야말로 영원한 복이죠. 의인들은 주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주하게 될 것이다. 그 영광과 그 은혜를 지금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주님 다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에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요14:1-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떠난다고 그래서 근심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아버지 집에 너희들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예비하면 돌아오마. 주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믿을 때,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죽음이후의 부활에 대한 모든 말씀들을 우리가 믿을 때, 신자들은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마지못해 당하거나,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신자라면 주님께서 이제 그만 오라 하실 때에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로 가고자하는 . “주님 이제 저 준비됐습니다. 주님 이제 그만 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평안히 데려가십시요. 저는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난 5월에 현대 최고의 설교가로 손꼽혔던 팀 켈러 목사님이 투병 끝에 소천하셨다. 그분이 임종을 맞기 직전 가족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대표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오랫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저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모든 시간들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예수님을 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만나뵙고 싶습니다. 저를 집으로 보내주세요" 이것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는 신자들의 합당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은혜로 사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게 이 땅에서 바쁘게 살아가다가 어느날 어떤 방식으로 주님께서 이제 그만 오라고 부르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는가? "주님, 아직 저는 주님 만날 준비가 안 됐는데요. 주님, 딱 5년만 더 살다가 가면 안되겠습니까?” 이러지 말고… 주님 부르실 때 언제든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지. 그것이 죽음 이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는 신자의 삶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살아서도 주의 은혜를 받아 살게 하시니 감사하고, 죽어도 그 은혜가 그치지 아니하고 도리어 더 큰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을 바라볼 때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어서 저희들이 살아생전이나 죽어서나 주의 은혜 가운데에 들어와 있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주여 이 은혜를 저희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까 두렵사오니 살아있는 동안에 그 은혜를 더 많이 누리고 살게 하여 주옵시고 그리고 주께서 부르실 때에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으로 주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달려가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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