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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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재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가운데 나아와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며 나아갑니다. 이 시간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오늘 올려드린 찬양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간구함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 하나님 함께하셔서 위로하여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셔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감사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무엘상 23:1–14 NKRV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배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드시나요? 믿었던 사람한테 발등이 찍히는 그런 기분에 분노가 일어날 수도 있구요. 또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다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질 것입니다. 배신이라는 것은 흔히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많이 쓰이는 소재입니다. 영화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암살이라는 영화의 배우 이정재씨가 배역을 맡았던 염석진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독립운동 도중에 일본군에 잡힌 후에 밀정을 하는 대가로 풀려난 스파이로 영화에 등장합니다. 독립군의 작전과 비밀을 몰래 빼돌리고, 암살자를 고용하며 동료를 죽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염석진이 과거 동지에게 암살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배신이 애처로운 결말을 맺게 한 것이죠. 또 모두 잘 아시는 영화인 300이라는 영화에서는 추 에피알테스가 레오니다스 왕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을 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왕에게 찾아가 후방에 샛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패배로 이끌게 합니다. 그렇게 스파르타 군대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두 영화 모두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암살의 염석진은 밀정으로 살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무언가 다른 협박을 받았을 수도 있죠. 300의 에피알테스는 그렇게 자신을 대한 것에 대한 분노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그것이 밖으로 보이는 상처이건 마음의 상처이건 아니면 둘다 이건 간에 배신을 당한 사람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지만 사기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배신이죠. 얼마전에 제 지인이 중고거래를 하려다가 조금 많은 액수를 사기 당했습니다. 좋은 중고 매물을 찾은 것에 기분이 좋아서 거래를 했는데 알고보니 사기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이 사기공화국 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사기 피해가 엄청 많다고 합니다. 큰 거액부터 작은 소액까지 두루두루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다른 범죄도 나쁜 범죄지만 열심히 모은 돈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져가는 사기 행위도 피해자의 마음과 재정에 커다란 상처를 내는 악질적인 범죄이지요. 그런데 알고보면 그 사람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사기를 치지 않으면 안되는 협박을 당할 수도 있구요. 물론 이건 좀 간 생각이긴 합니다만. 뭐 결국 사기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배신 당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인물은 우리가 너문나도 잘 아는 다윗입니다. 상황만 보면 그 상황이 너무나도 애처롭고 처량해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 다윗만큼 인생이 파란만장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기구한 인생입니다. 작은 도시의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나 목동으로 양이나 치다가 사무엘이 아들 다 데려오라고 했는데 거기엔 부름을 받지도 못하고, 악령에 시달리고 블레셋에 밀리던 사울을 잠을 잘 잘 수 있게 해주고 골리앗을 물리쳐서 블레셋도 몰아줬는데, 다윗이 잘 나간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10년을 쫓아다니죠. 그리고 사울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오르니까 나라는 갈라졌지 열심히 해서 통일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민족과의 싸움이 끊이지를 않고, 또 아들이 자기 딸을 강간하지 않나, 그리고 다른 아들이 복수심에 불타 그 아들을 죽였죠. 그 죽인 아들이 이번에는 또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역을 하다가 죽기도 하고 말년에는 또 다른 아들이 권력 욕심을 부려서 파가 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도 죽죠. 정말 이 다윗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다보면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인생 일대기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죠
오늘 같이 읽은 본문의 상황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피를 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간단하게 배경설명을 하자면 다윗이 사울로부터 자신의 아내인 미갈과 자신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성을 탈출한 후에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가 아둘람이라는 곳에 자신의 몸을 피신하였고, 그후에 자신의 친지들을 자신의 증조할머니였던 룻의 고향인 모압의 왕에게 그들을 의탁합니다. 그 후에는 맛사다라는 곳으로 추정되는 요새에 가 몸을 피신합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8 편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로 시작하는 시편을 지은 곳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곳에서 선지자가 갓이 와서 너는 이곳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렇게 그는 헤렛 수풀이라는 곳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본문의 사건이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헤렛 수풀에 있을 때에 사람들이 와서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사무엘상 22:1) 라고 다윗에게 전합니다. 그일라라는 곳은 쉐펠라라고 불리는 곳에 속한 지역입니다. 쉐펠라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말 그대로 평지에 있는 지역이 블레셋에 의해서 습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 그일라는 원래 다윗이 머물던 아둘람이라는 곳에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평지였습니다. 산지도 아니고 습격하기 쉬운 평지였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습격이 잦았던 것이죠. 그들이 타작마당을 친다고 했는데 그말은 추수한 것을 털겠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는 아마 늦은 봄, 이른 여름 보리 혹은 밀을 수확해서 타작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신들은 수고하지 않고 남이 땀 흘려 추수한 곡식을 약탈하여 거저 먹겠다는 못된 심보인거에요. 이러한 소식이 다윗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고민합니다. 고민하다가 이전까지는 하지 않았던 행보를 보입니다. 사무엘상 23:2 입니다.
사무엘상 23:2 NKRV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그것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할 때 하나님께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이전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갈 때도, 블레셋의 아기스 왕을 찾아갈 때도 아둘람 굴로 도망할때도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사실 다윗은 여기에 오기까지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여 온 것입니다. 그러던 다윗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어찌할지 묻습니다. 다윗이 그간에 도피생활로 인하여 변하기 시작했음한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블레셋에 잘못 망명해서는 미친 짓까지 해서 그 상황을 벗어 나야 했고 자신이 피해있던 아둘람 굴에는 억압당하고, 가난하고 원통한 자들이 모였습니다. 그것을 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 다스리심을 소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묻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기름을 부음 받아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생활에서의 일들을 계기로 다윗은 왕이 된다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왕 됨은 그냥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통로가 되어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로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생기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답하십니다. 그렇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사울이 올까 두려운데 가서 군대를 치는일은 얼마나 더 두렵겠습니까?”라며 다윗을 만류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합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과연 가는 것이 맞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번엔 더욱더 확실한 음성으로 답하십니다.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을 쳐라 블레셋을 너의 손에 넘길 것이다.’라고 말씁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독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붙들고 다윗은 자신의 무리와 함께 그일라로 나아가게됩니다. 사무엘상 23:5 절 입니다.
사무엘상 23:5 NKRV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결과는 예 그렇습니다. 불보듯 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싸우면 승리를 약속하셨고, 다윗은 그것에 순종했습니다. 결과는 대승리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크게 쳤다.라고 합니다. 그들을 그일라에서 물리치는 것도 모자라서 그들의 가축까지 뺏게 됩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다윗을 말리던 무리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의지한 것이지요.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한 소식이 사울의 귀에 들어갑니다. 정말 엄청난 첩보 능력입니다. 그 먼 거리에서 휴대폰은 커녕 전화기도 없어서 말 타고 소식을 전해야 했던 그 때에 엄청나게 빠른 소식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첩보기관인 CIA 정도의 정보수집능력이 아닌가 생각이됩니다. 첩보원 중 하나가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보고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 정도로 빠른 소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울이 그일라가 약탈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모르쇠로 일관한 거에요. 마땅히 해야할 왕의 일은 하지 않고 다윗 찾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는 것이죠. 사람이 바르지 않은 일에 맹목적이 되면 얼마나 시야가 좁아지고 방만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재밌는 장면인 것입니다.
여하튼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첩보를 들은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라는 정말 말도 않되는 착각을 합니다. 정말 자기 최면의 끝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장인 22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도 죽이고, 약탈 당하는 마을을 구하는 왕의 기본적인 직무도 소홀히하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배짱 두둑한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저 같으면 신앙 때문이 아니고 양심에 찔려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사울은 그렇게 행동합니다.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그렇지만 사울이 다윗이 자기 손에 넘어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일라라는 지역은 7절에 나와있듯이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일라는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쌓인 성벽인 요새라는 말입니다. 요새는 뻥뚫린 성과는 다르게 몇개 되지 않는 제한된 문으로 드나들어야 했기 때문에 다윗의 상황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지요. 실제로도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 놓인 것이 맞았습니다. 왕의 의무였던 그일라 구원도 제쳐놓았던 사울이 다윗이 발견되니까 앞뒤 재지 않고 달려와서 그들을 포위하려 합니다. 또 아이러니 한 점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부름받은 사울이 블레셋으로부터 그일라를 구한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당시 영적 상황이 얼마나 점입가경인지 우리는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일라를 구원하기 전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묻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9-11절입니다.
사무엘상 23:9–11 NKRV
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이번에는 전에 물었을 때는 본문에 나오지 않았던 에봇을 가져오라고 해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넘길까요? 하고 물어봅니다. 여기서 에봇은 잘 아시는 것처럼 제사장의 의복입니다. 근데 갑자기 제사장의 옷인 에봇은 왜 가지고 오라고 하며, 에봇은 갑자기 어디에서 솟아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라고 합니다. 내용인즉슨 전장인 22장에서 사울이 세마포 에봇을 입은 제사장 85명을 죽였을 때 도망한 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의 에봇을 가지고 온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5절에 그일라 주민 구원한 것 이야기 하다가 7절에는 사울이 다윗 잡으려고 혈안이 된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는것처럼 들려요. 그러나 이 회상구절을 통해서 다윗의 하나님께 묻는 행위들이 모두 에봇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에봇이란 것은 원래 만들어진 의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만들어진 옷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할 때 제사장들은 이 의복을 입고 하나님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으로 판결을 내려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규례대로 하나님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이 규례를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14 장에 보면 사울은 에봇입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의지하고 자신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다윗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반면에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신것은 사울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하나님께 묻는 행위를 그저 정치적인 것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블레셋에 대한 완전한 승리만 바라고 있었고, 제사장 아히야는 사무엘을 대신하는 제사장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안중에는 하나님의 뜻은 없었고 그저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순종할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또한 대제사장의 에봇이 다윗에게 온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체계가 삼권 분립인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법을 만들고 제정하는 입법부인 국회와, 만들어진 법을 토대로 나라를 통치하는 행정부, 정부이지요, 그리고 만들어진 법으로 판결하고 법에 대한 판결, 다른 부서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인 법원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권력을 세개로 나누는 정치 체계를 쓴 것은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정 통치에는 그 당시에 벌써 이러한 부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입법부인 국회는 표면상으로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에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왕이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하게 하는 입법부인 선지자들이 있었구요.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판결도 하는 사법부에 해당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갓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던 다윗은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의 에봇을 가지고 옴으로써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충족하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 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역자인 사무엘과 갈라서고, 놉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인 사울과는 아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맡은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 말씀에 의지하고자 했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자신의 뜻을 알려주셨지만, 자신의 말씀을 맡은 자들을 외면하고 죽이고 이용하려 했던 사울은 똑같이 철저히 외면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 의탁하는 나라는 이렇게 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구약의 여러 본문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는데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완전한 왕, 선지자, 제사장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 직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 그분께 의지하는 것, 그분의 이름 아래서 예배하는 것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에봇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은 것은 사울이 진짜 내려오는가? 그일라사람들이 자신을 사울에게 내어줄 지 말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진짜 너를 치러 오고 있고 그들이 너를 넘겨줄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때 다윗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참 씁쓸 했을 것 같습니다. 기껏 위험을 무릅쓰고 와서 구해줬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행위에 화도 났을 것입니다. 배신감을 느겼겠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넘겨줄 수 밖에 없는 약자인 그일라 사람들에게 안타까움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는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고 조용히 그일라를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떠납니다. 다윗의 그때의 심정은 배신감에 슬프고 아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하는 사랑의 대상이지 의지하고 믿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말대로 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다면 그들이 배신한다는 사실 조차도 사울에게 넘겨지기전까지 몰랐을 수 있고 알았더라도 배신감에 무너져 다른 결과를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못박히도록 들었을 이 말을 다시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했다가 무너져내려가는 수도 없이 많은 사례들을 우리가 매일 같이 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도피생활동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장인에게 쫒겨다니면서 여러가지 위험 속에서도 본문 14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셨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의지 하였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해서 힘든 상황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의무를 다하면서도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충분히 비슷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다윗왕 그는 하나님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도피생활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일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의 일생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갔습니다. 다음 주에 일주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특새 기간 동안 그리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선지자 갓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다윗처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다윗처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같이 오늘 말씀 생각하시면서 아까 했던 찬양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찬양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여 상처받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다음주 특별새벽기도 가운데 주님 함께 하셔서 은혜가 충만한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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