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30 수요예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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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220911 청년교회
미쁘신 하나님
창세기 22:1-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히브리어 문장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정중한 당부 혹은 부탁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소사”를 사용하신다.
이 소사는 창세기 안에서 60차례 이상 사용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도중에 사용되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고작 5번에 불과하며, 이 소사가 사용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매우 어려운 일을 요구하셨다.
여기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 인가를 하나님께서 헤아리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안 지역의 신들처럼 인간 번제를 받으실 것인가?
저자는 이미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런 요구를 하셨다고 한다.
이 히브리어 동사는 일정한 기준을 세워 놓고 그 기준에 따라 테스트하는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훈련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쓰려뜨리기 위해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해 시험하신다.
즉,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 번제를 요구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으며, 이삭을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에서 위기를 맞는 것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삶의 의미이자 인생의 결정판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삶의 보람을 느꼈다.
아브라함이 ‘소유’ 하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노년에 얻은 이삭이었다.
뿐만 아니라 늙은 아브라함이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살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즉각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극단적 모습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고난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을 따라가면서도 내가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는 의미도 갖지만, 동시에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결코 따를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아브라함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 말에 주목하신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모습부터 모든 과정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의 장막이 있는 브엘세바에서 북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 산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집 뒤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왜 3일 길의 여정을 계획 하셨을까?
이것은 장소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3일이라는 시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일을 가게 하신 것은 만일 아브라함이 즉흥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여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심했다면, 그 결심은 얼마든지 번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믿음의 고백은 우리의 순간의 감정으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수없이 많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수련회에서, 국내외 선교를통해 그 뜨거운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나님과 하였는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내 감정에 있지 않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또,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믿음의 고백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보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의 순종이 한순간의 감정으로 인한 믿음의 고백인지 아닌지를 보시고자 하는 것이다.
수련회가 끝난지 벌써 3-4주가 되었다.
수련회 좋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수련회를 다녀온 지금 여러분의 삶이라는 것이다.
진짜 그 사람이 은혜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수련회때 보이지 않는다. 수련회를 마친 이후의 그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감당해야 할 시험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브라함은 길에서 보낸 3일 동안 끊임없이 ‘이 아이를 정말 죽여야 한단 말이가?’라는 질문에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3일 길을가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육체적으로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산에 도착해서 아브라함은 혹시 종들이 이삭을 재물로 드리는 것을 말릴 것을 대비하기 위해 종들을 산 밑에 두고 가게 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종들을 데리고 가서 종들이 이삭을 재물로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좋은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서 핑계거리도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해 이삭을 재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 종들이 방해해서 이삭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시나리오 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할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종들을 산 밑에 두고 이삭과 단둘이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이삭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 네가 하나밖에 없는 너의 전부와 같은 아들 이삭까지 나를 위해 죽이려 했으니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은 순종의 삶이다.
우리가 아무리 백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울며 기도하고 뛰며 찬양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간절히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는 그 순종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날때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무개야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경험 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신하시자 아브라함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재물인 숫양이다.
믿음의 한발짝을 걸어간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한발짝 걸어갈 때.
그러면 그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러한 대단한 믿음을 소유 할 수 있었을까?
방금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순종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어느 한순간 뽕~! 하니 생기지 않는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서 고향을 떠난지 어느덧 40여 년쯤 된 것이다.
그동안 삶과 연단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여러가지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는 3일의 시간동안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그동안 자신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까지 자신과 동행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신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그 약속을 되새기며 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이삭을 죽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조그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는 설령 하나님께서 그러실리는 없겠지만 이삭을 해하도록 내버려 둘지라도 이삭을 부활시켜 이삭을 통해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지난 40여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긴 그 분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으로 여호와께서 결코 인간 번제 따위나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맡기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방금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이러한 믿음은 어느 순간 뿅하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다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의 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 과거의 신앙생활이 지금의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바꿀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한발짝나아가면 그 한발짝이 두발짝이 되고 비로소 나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시험을 하신다. 우리는 그 시험으로 내 믿음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도 말 했지만, 그 시험은 단순한 테스트 뿐만이 아니라 기회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한발짝은 내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그 기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기회를 통해 더욱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
아브라함과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된 삶을 살길 소망한다.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고 노력 하였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 했을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다.
이것은 밤새 물고기를 못잡다가 한번에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도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많은 물고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한마리도 잡지 못한 것도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