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인생을 통해 바라본 우리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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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다윗의 인생을 통해 바라본 나의 인생
(부제: 우리 인생을 통해 바라본 하나님의 뜻 발견하기)
본문말씀: 시편 23편 1-3절 말씀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1] A psalm of David.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2]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3]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4]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5]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6]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다윗의 인생을 통해 바라본 우리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설교의 제목을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오늘 설교에서 다룰 내용과 그 내용의 범위는 우리의 인생의 내용과 범위처럼 방대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 다윗이 쓴 이 시편 23편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 말씀은 다윗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이후, 즉 그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인생을 회고하며 썼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와는 다르게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는 시기에 썼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쓰였다고 주장을 합니다.
저는 이 시편 23편에 다윗의 삶의 희로애락이 구구절절 잘 묘사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시는 다윗이 젊었을 때 썼다기보다 그가 나이가 들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썼다고 생각합니다. 김남준 목사님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우리의 인생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이새의 8째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겸손한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보시고,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목동에서 한 나라의 왕으로까지 승극된 그가 그의 인생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기록한 시이기에 이 시편 23편 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인생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시편 23편을 통해 본인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다윗은 인생을 행복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양 옆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해보겠습니다. “행복하십니까?” 한번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바람일 것입니다. 저도 제 인생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져본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소박하지만 자신의 집과 부인 그리고 자녀가 있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프지 않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며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개개인마다 다르다는 게 특징입니다. 이는 한 인생이 바라보는 행복의 가치와 그 기준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저희 자녀들에게 읽어준 책들 중에 맥스 루케이도의 ‘너는 특별하단다 2’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펀치넬로는 웸믹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입니다. 피노키오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웸믹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비교하며 남보다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특별히 그 마을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상자와 공을 많이 보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펀치넬로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돈이 생길 때마다 상자와 공을 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상자와 공을 많이 사서 높이 쌓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존경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펀치넬로도 더 많은 상자와 공을 사기 위해 자신의 책과 집 그리고 침대까지 팔아서 더 많은 상자와 공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상자와 공 사이에서 새우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을 알게 된 목수 아저씨 엘리는 펀치넬로가 소중한 친구와 자신의 행복까지 버려가면서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 그 상자와 공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펀치넬로에게 일깨워줍니다. 잠시 그 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사진을 함께 본다)
“펀치넬로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상자와 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 아니?’ ‘제 책과 침대, 제 돈과 제 집이요.’ ‘어린 친구야, 넌 그 보다 훨씬 많은 대가를 치렀단다.’ 펀치넬로는 아저씨가 말을 하는 동안, 무엇을 더 팔았는지 생각했다. ‘너는 네 행복을 대가로 치른 거란다. 생각해 보렴, 넌 그 동안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니?’펀치넬로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어. ‘네’ ‘또 넌 친구들과의 우정도 잃었어. 무엇보다도 믿음을 잃었지. 넌 내가 너를 행복하게 살게끔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어. 대신 넌 상자와 공을 믿었을 뿐이란다.’ 펀치넬로는 흩어져 있는 장난감들을 쳐다봤다. 갑자기 그것들이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들로 보였다. “저는 말썽만 피우는 것 같아요.” “괜찮단다, 넌 여전히 특별하단다.” 펀치넬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너는 특별하단다. 네가 가진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이유만으로. 너는 나에게 소중하며, 난 널 사랑한단다. 그것을 잊지 마렴, 어린 친구야.”
여러분 이 예화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셨습니까? 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결핍된 상태에 목말라하며 인생을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평생 공부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족한 물질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매력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에서 빠져 삶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이 사회는 서로서로 비교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그 채워지지 않는 ‘결핍’ 때문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인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23편의 저자 다윗은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결핍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에게도 여전히 ‘결핍’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떠한 결핍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비참한 인생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침을 흘리며 바보처럼 행동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에 처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결핍’이 있는 삶을 살았던 다윗이지만 그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은 무척이나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을 통해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 23편 1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는 다윗이 그의 인생을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이 구절에서 묵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세상 사람들은 그 결핍된 상태 때문에 다들 불행해 하는데 다윗은 현실의 결핍을 뒤로하고, 자신과 함께하고, 함께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결핍한 것’이 없다고 신앙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십니다 (I am Who I am).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도움을 통해 이 땅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태초 전부터 자존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참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 중에 참 목자요, 그 실력 또한 탁월하여 우리의 삶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능력자’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다윗은 실제 부족한 게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수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자신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고백을 통해 결핍가운데 채우시고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인생에 결핍이 있다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인생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8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양치는 일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때때로 형들처럼 용맹한 사울의 군사가 되어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꿈꾸어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누군가와 비교하게 되면 결핍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인지하고 그 결핍된 상태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형들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결핍된 상태에 집착하여 인생을 불행하게 살았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의 결핍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해야 할 양치는 일을 즐겁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인 것입니다. 어느 날 이새는 다윗을 불러 전쟁터에 나가있는 형들에게 음식들을 전달하고, 형들이 무사한지 살피고 오라했습니다. 다윗은 이 기회를 통해 형들이 있는 전쟁터에 가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의 설레는 마음과는 다르게 전쟁터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맴 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키가 무려 2미터 90에 육박하는 거구 장사 골리앗 앞에서 하나같이 자신들의 ‘결핍된 상태’를 보고 기가 죽어 침울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골리앗보다 키가 작다, 자신은 골리앗보다 용맹하지 못하다. 자신은 골리앗보다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다. 자신은 골리앗보다 전쟁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그 결핍된 상태에 매몰되어 헤어 나올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다윗은 자신이 사자와 곰과 늑대 그리고 독수리로부터 양들을 지켜냈을 때 자신의 삶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마음은 결핍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꽉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 말씀입니다.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결핍이 많은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그는 늘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골리앗과 같은 험난한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마주한 저와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역사책에만 등장하는 죽은 하나님이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결핍된 상황에 매여 사시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고백으로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는 다윗과 같은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오늘 시편 23편 1절 말씀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음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인사해 보겠습니다. 오른쪽 사람이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왼쪽 사람은 “네”라고 믿음으로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답을 들은 오른쪽 사람은 다시 이렇게 왼쪽 사람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인생은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다는 고백을 하고 권총으로 자살하여 그의 삶을 스스로 끝냈습니다. 그는 노인과 바다라는 유명한 소설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그 책에는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 노인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매일 고기를 잡지만 자신의 뜻대로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 운이 좋게 거대한 참치를 잡게 됩니다. 그러한 기쁨도 잠시 노인은 참치를 배에 매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상어를 만나 배에 매단 참치를 거의 잃어버립니다. 노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 컷 던 참치가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노인은 슬픔을 뒤로하고 집에 들어와 깊은 잠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바다로 향합니다. 제가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 기억나는 장면은 이와 같습니다. 저는 이 노인과 바다의 소설을 통해 현대인들의 인생을 묵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망망대해에 나가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자신들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 앞에 고뇌하고 있는 현대인들, 그러다 운 좋게 인생이 잘 풀리는가 싶더니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을 쓴 헤밍웨이도 결국은 그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의 결핍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고 저는 봅니다.
토마스 셰퍼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마음은 바닥없는 그릇이다” 그 바닥이 없는 그릇에 이 세상 좋은 것들을 채워 놓은들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2장 13절 말씀에 이와 같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선택한 것이 죄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를 우리의 인생의 목자로 인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그 분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공급해 주실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가며 자신의 결핍된 상태에 너무 집착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울대생들도 학교에 입학하면 1등에서 꼴찌까지 정해집니다. 매번 1등만 했던 우등생도 서울대에 가면 중간내지는 꼴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에서 수석한 사람도 해외에 있는 유수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게 되면 늘 자신의 결핍된 상태를 볼 수밖에 없는 처량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다른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을 아주 낮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까지 높여주셨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때에 따라 꼴을 먹여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공급자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신앙 고백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책임져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면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음이로다.”이러한 인생은 행복한 인생인 것입니다.
둘째로, 행복한 인생이라도 늘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늘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 3~4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다윗의 인생이 저 나락 끝까지 내려가 그의 생명이 죽기까지 고통스러웠을까요? 그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자신을 죽으려고 했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압살롬이 자신의 첩을 백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며 욕했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밧세바를 통해 낳은 첫 자녀가 죽게 되었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밧세바를 취한 이후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큰 꾸지람을 들었을 때였을까요?
저는 이 모든 상황들이 다윗의 영혼을 상하게 할 정도로 힘들게 한 상황들 이었다고 봅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그의 인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몰라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실제 다윗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자신이 목자로 일하면서 양떼를 칠 때 경험했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을 들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23편에 잘 묘사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조엘 비키가 쓴 ‘깊이 읽는 시편 23편’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실제 다윗은 자신이 목동으로 양들을 돌볼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넓이가 2-3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협소한 계곡의 길 이었습니다. 그곳의 땅은 축축하고, 수풀이 우거졌으며, 어떤 곳은 2미터 정도의 깊이의 웅덩이가 있었기에 양들이 빠지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양들을 이끌고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양들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협곡 주변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숨을 죽이고, 양들을 노리고 있었으며, 큰 독수리들은 좌우로 날아다니며 어린 양들을 노렸습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던져가며 양들을 노리는 동물들을 쫓았습니다. 다윗은 그 때의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온 여러 환란을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다고 시편 23편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입구’와 ‘출구’ 모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가 젊었을 때 처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이곤 했었을 것입니다. 문제에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출구는 그의 인생에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다윗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반드시 출구가 있다. 참고 견디자, 반드시 광명의 빛이 내 앞을 비출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지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즉 이 고통도, 이 시련도, 이 환란도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출구는 바로 우리 인생의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신 줄 믿습니다.
19세기 말, 사하라 사막 북부에서 인부들이 ‘리르와디’(장마철 외에는 물이 마르는 우물)의 수맥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리르와디를 찾기 위해 사막을 걷고 또 걷다가 수맥이 있을 것 같은 곳에 이르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80미터쯤 파고 들어가다 보면 엄청난 압력으로 물줄기를 막고 있는 석회암 판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인부들은 눈빛을 서로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나이가 가장 많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들 조심스레 지상으로 올라갑니다. 가장 나이가 든 인부는 모두가 안전하게 올라간 것을 확인한 뒤에 석회암 판을 곡괭이로 힘껏 내리칩니다. 마침내 석회암 판이 깨지고 엄청난 압력으로 수맥이 터지면서 물이 하늘로 솟구쳐 오릅니다. 하지만 사막에 우물이 생기는 그 순간이 바로 늙은 인부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저와 여러분들을 인도하기 위해여 자신은 십자가에서 희생당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한 노인이 희생함으로 사막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수가 전달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생수의 근원 되시는 목자가 되셔서 우리가 인생을 살다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우리의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참 목자가 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윗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다는 것을 통해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모세의 손에 쥐어 졌던 지팡이나, 다윗의 손에 쥐어졌던 지팡이와 막대기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소 은유적인 유추일 수 있지만, 구약 시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의 목재로 사용된 고페르 나무, 모세가 쓴물을 단물로 만들기 위해 쓴물에 던져 넣었던 나뭇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 사용되었던 모세의 지팡이 그리고 다윗이 그의 삶에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는 데 사용했던 지팡이 그리고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동안 자신의 양떼와 자신을 지켜주었던 ‘막대기’는 모두 그 성분이 나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할 수 있으며, 마귀의 간계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상징물’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 생각될 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줄 믿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23편 4절 말씀을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자신을 다시 바르게 이끌어주었던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생의 어려움들을 헤쳐 나간 듯싶지만 실제 삶을 돌아보니 자신의 손에 쥐어졌던 그 지팡이와 막대기를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 지팡이와 막대기는 한낱 나무 조각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바로 4절 말씀인 것입니다. 4절 말씀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지팡이와 함께 막대기는 양들을 계수할 때 사용하는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지팡이의 끝은 휘어져 있었지만 막대기의 끝은 휘어져있지 않고 예리했습니다. 목자는 막대기 아래로 들어가는 양들을 계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막대기로 양들의 털을 들쳐보며 양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막대기는 목자에게 양들을 해치는 적들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목자들은 평소에 자신에게 맞는 막대기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선별하여 그 나무를 잘 다듬어 자신에게 적합한 막대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평소에 막대기를 던져 목표물에 맞추는 연습을 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목자는 물매에 돌을 끼워 던져 골리앗도 넘어뜨린 사람입니다. 그런 목자들이 양들을 해하기 위해 달려오는 짐승들에게 던진 막대기는 백발백중 짐승들을 맞추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자 되신 예수님의 손에 쥐여진 막대기의 용도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늘 살펴보시고, 우리의 필요를 확인하시고, 우리의 영적 건강을 체크하시며, 우리를 원수 마귀로부터 보호하시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와 막대기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계수되어 집니다.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필요를 채울 뿐더러, 우리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십자가 없이, 즉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다면 이는 우리의 영적인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원수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골로새서 2장15절 말씀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초심을 잃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악 된 삶을 살아갔을 때에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섭리로 우리를 연단하시어 마치 우리가 인생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하십니다. 어찌되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행복할 때도 있지만 이처럼 길을 읽고 어려움에 쳐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인생을 포기하지 마시고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우리는 그 인생을 살아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다윗의 인생은 성장, 성숙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선지자, 제사장들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임명식에 행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윗도 그의 인생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가 왕으로 등극할 때였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성장, 성숙하는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어떠한 임무를 맡기면 그 사람은 이전보다 더 성장 발전하게 됩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부름 받았을 때가 아무런 임무가 없었던 때보다 분명 더 성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목동에서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왕으로 임명받았을 때 분명 그 어깨는 엄청 무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무거운 책임감을 부여하시면서 더불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맡아 공동체를 건강히 지켜나가셨으면 합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 개인들도 성장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싱글이었을 때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 가장으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보다 많은 책임과 권한을 가졌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어느 시기가 여러분들을 더 성장, 성숙시켰던 거 같습니까? 저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감당하게 되는 그 역할과 직책이 저와 여러분들을 성장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부으셨던 기름 부으심은 그의 직무와 관계가 있는 ‘기름 부으심’이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시편 23편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셨던 일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 처음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폐위하시고, 그 자리에 다윗이 앉혀주실 때였습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 왕 앞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높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골리앗 앞에서도 오히려 열세한 다윗을 높여주셨습니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허락하신, 그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어리고 왜소했던 다윗이 곰과 사자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국정을 운영할 때에도 분명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통해 다윗에게 놀라운 지혜와 통찰력을 허락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렸을 때에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역전을 맛보는 짜릿한 경험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도 그 짜릿한 경험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기름 부으셔서 이와 같은 인생의 역전의 짜릿한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역전의 기쁨이 얼마나 짜릿했던지 다윗은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잔이 넘치는 때”를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잔에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잔이 넘치는 은혜 말입니다. 문제에 매여야 하는데, 인생이 비참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잔이 채워지는 경험 말입니다.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내려주시는 다윗이 받았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 머리에 부음 받았던 기름 부으심과 같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3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기름 부으심은 바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역사하셨던 성령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역사하셨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신약 백성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그 한 사람의 인생에 동반자로, 조력자로, 변호자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1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름부으심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성장,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아 우리가 사역을 통해 진정 이루어야 하는 성정, 성숙은 무엇일까요?
신, 구약 성경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어떤 문장이 남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를 더 압축하면 어떤 단어가 남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강령이란 단어는 ‘일이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으며, 이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를 NLT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40] The entire law and all the demands of the prophets are based on these two commandments."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바로 이 성경의 가르침에 있다고 봅니다. 누군가를 위해 배려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인생은 성장, 성숙한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기름 부으심 받는 인생을 살게 되면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침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말씀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환영하고, 모시고, 인정하는 삶을 살려는 우리 측면의 노력이 있을 때 그 효과가 배가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강건하시기 때문에 부족한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어 우리 마음에 부어지시는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이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측면의 하나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 우리 사역에 진정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은 인간의 연약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성장, 성숙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으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착해서였을까요?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압살롬을 보고도 그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성애 때문일까요? 다윗이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려는 자신의 군인들을 말리고 시므이를 도리어 살려두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므이의 저주가 무서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다윗이 성장,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부어진 기름 부으심은 다윗의 인생을 성장, 성숙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사역을 잘하는 것을 뛰어 넘어 성장 성숙한 사역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지자의 아버지 밥 존스 목사님께서 사후체험을 하셨습니다. 그가 잠시 죽음을 체험했을 때 하늘나라의 이색적인 광경을 보고 간증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이실 때 공통적으로 물으셨던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네가 인생을 살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 Did you learn to love?”라는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사랑해야 천국을 간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다윗의 인생은 승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말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주 안에 승리하는 인생으로 이끌어가고 싶으십니까? 혹 그 초심을 잃어버렸다고 하여도 다윗처럼 다시 일어나 잃었던 초심을 되찾고 다시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윗이 말한 시편 23편 6절 말씀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말하는 ”반드시“는 히브리어 원어로 ‘아크’입니다. 이 뜻은 ”확실히, 바로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하신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표현에서 ”따른다“는 표현의 히브리어 원어는 ”라다프“입니다. 이 뜻은 ”추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를 살려 이를 직역해 본다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우리를 추격해 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인생은 굴곡이 많습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흡사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하고, 믿었던 건강이 하루아침에 떠나가기도 하고, 남들이 누리는 지극히 평범한 행복이 자신의 인생에서는 너무도 멀리 있어 보이기도 한 것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을 다윗이 살았고. 또 지금 우리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끊임없이 나를 추격해오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절대 저와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각자의 사명을 통해 우리의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시편 23편 6절 말씀을 묵상하며 떠오른 생각들을 이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생 별거 없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인생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 인생에는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너무 기뻐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며 내가 느끼는 것은 그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그 앞에 초심을 잃지 않고, 그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인생의 주인을 예수로 인정하고, 그 인생의 구주가 예수인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추격해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저 멀리 도망가려고 해도,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다.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미국의 CIA나 FBI의 추격 장치 이상의 능력으로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다. 우리는 그저 추격해 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 인자하심을 인정하며 살 때 우리의 인생의 진짜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져본 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예비하신 그 집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진짜 승리한 인생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은 스펙이 좋다고 들어가는 집도 아닙니다. 그 집은 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어가는 집도 아닙니다. 그 집은 학연, 지연의 관계가 좋다고 들어가는 집도 아닙니다. 그 집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들어가는 집도 아닙니다. 그 집은 반드시 추격해 오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모든 백성들의 삶을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추격해 오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이 땅에서 평생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그 마지막 때에 그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그의 삶에 따라 붙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좌우에 있었던 강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끝까지 비난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평생을 강도로 살았지만 마지막 때 예수님을 구원자요, 메시아로 믿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9-43절 말씀입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평생 죄만 짓고 살다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인생의 찰나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 두강도 중 한 강도 외에는 성경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희소한 확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는 삶은 이 땅에서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세상에 나르는 삶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생의 삶을 축복되게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간신히 구원만 받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을 때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고 하늘나라에 가야하는 줄 믿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인생은 마치 야구와 같습니다. 야구는 9회 말이 되어도 승부를 알 수 없습니다. 야구에서 다 졌다고 생각되는 게임도, 마지막 타자가 나와 홈런을 날리면 승리하게 되는 것이 야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마지막 타자는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타자 예수님의 홈런은 반드시 우리 인생을 승리의 인생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영혼의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어 생명을 얻되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쉬지 않으시고 추격해 오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마치 구름 뒤에 여전히 떠 있는 태양과 같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이후에 그의 가문에서 끊이지 않는 저주스러운 일들을 보고 그는 절망하고 우울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나단 선지자의 회개 경고를 듣고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회개했을 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다윗을 추격해 오고 있음을 그때서야 그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마치 구름 뒤에 여전히 떠 있는 태양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심과 죄로 인한 형성된 먹구름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들어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흐리게 하여 여전히 그 곳에서 우리를 추격해 왔던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의 부도덕함과 연약함 때문에 사라졌다 없어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비록 우리는 부족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 저 동구 밖에서 여전히 탕자를 기다려 주셨던 아버지, 즉 우리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고, 바로 우리의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죄악 된 삶에 빠져 살아가면 우리의 육체의 감각이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사라졌다고 믿게 만들 것 입니다. 비록 그와 같은 처참한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 먼 나라에 가서 모든 것을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거지 모양으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분은 늘 그곳에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 먼저 뛰어나와 그를 맞이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당시 문화로는 불효한 아들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돌팔매질로부터 아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먼저 아들을 보고 뛰어 나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몸을 찢으셔서 사단의 참소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을 끌어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감각은 먹구름과 같습니다. 그 먹구름은 원래 우리를 따르고 있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태양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그 인자하심과 선하심의 태양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손 든 그대로, 빈손으로, 타락하여 보잘 것 없는 그 모습으로도 괜찮으니 여러분들의 그 감각을 의지하지 마시고 불변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나와 오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저와 여러분들을 추격해 왔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 것입니다.
여러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다윗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인생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인생이 행복하지만, 길을 잃고 헤맬 때도 있었다고 말했으며, 또한 인생에 성장, 성숙의 시기 또한 찾아온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그 모든 인생의 희로애락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지침서로 오늘 마지막 구절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물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6절 말씀 다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승리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시고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끝까지 추격해 오시는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반드시 자신은 승리할 것을 믿고 견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우리 이렇게 선포하겠습니다. “내 인생은 잘 될 인생이다. 내 인생은 잘 될 인생이다.” 그렇습니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하도록 계획된 인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인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멀리가는 물’이란 시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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