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팔복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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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3
<행복한 나라 부탄의 지혜>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목이 참 흥미로운데요. ‘97%가 행복하다고 느끼다’가 이 책의 부제입니다. 여러분, 97%가 누구겠어요? 부탄 국민의 97% 행복하다는 거죠. 여러분, 이런 게 상상이 되십니까? 어떻게 한 나라 국민의 97%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나라가 그렇게 행복한가? 이 책의 목차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먼저 1장 정치 편인데요. 제목이 이랬습니다 “강대국을 지향하지 않는다” 소제목도 보니까 급변화를 서두르지 않는다. 또 미국 같은 초강대국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2장 경제 편인데요. “부자를 꿈꾸지 않는다” 세상에! 경제를 말하는데, 부자를 꿈꾸지 않는대요. 그 소제목 중에 보니까 “지하자원을 발굴하지 않는다” 또 “관광객 수를 제안한다”
그리고 3장 사회 편에서는요. 3장에서 제 눈에 띈 소제목이 뭐냐면 “첫눈이 내리는 날은 휴일이다” 와~ 실제로 그 나라는 첫눈이 내리면 모든 관공서가 공식적으로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4장 생활편 “행복해지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이 모든 그 내용들이 좀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하고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처럼 자본주의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이래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부탄 국민의 97%가 행복하다는 결론을 가져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해서 여행도 다녀오고 책도 쓰게 하는 것이 바로 부탄이라는 나라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너무도 획일화된 행복의 조건들, 행복 1법칙, 2법칙, 3법칙 이렇게 만들어서 여기서 벗어나면 큰일 날 것처럼 자신을 몰고 가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뭔가 ‘이것은 아닌데’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부탄이라는 나라를 보면서 깨닫는 게 뭡니까? 행복이 그렇게 획일화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각자 나름대로 각자의 생각을 따라 그렇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부탄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메세지인데요. 예수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던 가르침 중에 여덟 가지 복을 가리키는 ‘팔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텐데요. 이제 8주간 이 팔복을 함께 나누면서 여러분들이 꼭 마음속에 담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탄을 떠올리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거예요. 세속적인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는, 그 다르게 사는 삶이 주는 행복, 이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궁금한 게요. 부탄이라는 나라가 다르게 사는 삶을 통해 국민 97%가 행복하다는 결과를 얻어냈다면, 과연 우리 하름교회 성도들 97%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손들어 보시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예수 믿는 그 길은 세상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내내 이 두 가지의 전제를 기억하고 함께 은혜를 누려야 하는데요. 여러분, 등산길을 잘 보십시오. 등산길이라는 게 정부가 공무원들 동원해서 일부러 만들어 준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계속 그 길을 가고, 또 가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인들만의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먼저 믿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그 믿음의 길을 만들어 놓으면 우리 다음 세대가 따라오기가 좀 쉬울 것 아닙니까?
저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3절 합독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러분, 팔복의 시작이 처음부터 너무나 충격적이고 과격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이런 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가난한 자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복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가난을 권장하거나 가난이 좋고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영성이 깊어진다고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와 똑같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스스로 가난해지고 일부러 큰 희생을 하고자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도 여깁니다. 이 또한 성경과는 거리가 먼 주장입니다.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갖는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 즉 ‘마음’입니다. 단지 외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자냐, 가난한 자냐?’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가난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더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화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가난에 시달리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가난해진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마음을 비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하기 위해 한문 성경에 굳이 ‘심령(心靈)’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인 의미에서 가난을 설명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사람” (2번 반복)
바로 이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있는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복으로 채울 수 없기 때문이며, 심령이 먼저 가난해지지 않으면 나머지 복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비워지는 상태, 완전히 비워지는 상태에 이르러야 채울 수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하는 두 가지의 단어가 바로 이 ‘심령’이라는 단어와 ‘가난’이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심령’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이 프뉴마는 보통 '영'(spirit)으로 번역되는데 '숨', '바람', '호흡', '기운'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뭔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 눈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나 움직임을 말합는데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양철학의 '기(氣)와 비슷한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프뉴마를 '기’라는 의미보다는 '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자기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셨잖아요? 인간은 그 영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뜻과 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공급하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살게 된 것이죠.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욥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원래 이렇게 '신령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그 ‘신령함’을 잃어버린 것이죠. 여러분,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떠나버리면 뭐만 남겠어요? 육적인 호흡만 남게 되잖아요? 살아 있는데 영적인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존재로 사는 거예요. 그렇게 타락해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으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와의 부정한 일을 저지른 후에 나단 선지자에 그를 강하게 책망했을 때 어떻게 회개를 합니까? 시 51:11 합독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님, 저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죄를 씻어 주옵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의 영을 저에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왜요? 자신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사울 왕을 보세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을 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가 아닌 주의 영을 대체할 것을 찾다가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까? 영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영 대신 채울 것을 찾다 보니 자신만의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떠난 인간이 만든 우상에 생기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렘10:14]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우상의 공통점이요. 속이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이 없는 텅 빈 우상을 섬기는 인간은 혼란스럽고요. 공허하고 흑암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삶에 대한 의욕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허무와 불안의 나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부탄에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게 없거든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을 마태는 '가난한 심령'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가난'을 뜻하는 헬라어 '프토코스'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빈곤'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월세든 전세든 남들처럼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먹고는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프토코스’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프토코스를 하나님과 연결하잖아요? 완전 밑바닥에 떨어져 삶에 대한 희망도 의욕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을 의미합니다. 그런 인생들이 영적인 파산 신청을 한 후에 예수님을 만났고 삶에 대역전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인 거죠.
제가 올해 첫 번째 주일예배에서 ‘무리’와 ‘제자’의 차이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마태복음 4장의 무리와 같은 인생’과 ‘5장의 주님을 따라 산에 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5장 1절에 제자들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열두 제자가 형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여기서 가리키는 제자는 열두 제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무리 중에 한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바라면서 진짜 생명의 길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던 그러한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진지하게 영적인 세계를 탐구하면서 고민하는 사람들, 절대자를 찾는 사람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시는 교훈이 뭡니까? “너희들 진짜 복이 뭔지 아니? 지금까지 너희들이 생각했던 복은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도 있고 이러한 열정도 있고 이런 신앙도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왜 이러한 일도 하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았는데, 그리고 이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축복하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삭개오를 보십시오. 여러분, 이 삭개오의 이야기가 복음서 어디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질문을 했던 그 부자 청년 다음 장인 누가복음 1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눅18:22)”고 하시잖아요? 그러나 이 부자 청년, 정확히는 부자관리라고 나오는데요. 자신이 너무 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18: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파산 신청을 안 하는 겁니다.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반면에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중에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을 합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타인의 것을 강탈한 경우, 원래 금액의 5분의 1을 추가로 붙여 갚으라고 명령하거든요. 그러나 삭개오는 규정을 한참 뛰어넘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소유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부자 청년과 삭개오를 보며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은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내가 물질이 많으냐 적으냐의 상태가 복 받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얼마를 가졌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 물질이 많고 적으냐의 상태가 아니라, 이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의 바른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소심해서 자신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거나 용기가 부족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인식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팔복 중에 가장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쓰신 <가나안에 거하다>라는 책에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실 모세오경과 역사서가 기록된 이유는 가나안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가나안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왜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는지를 상기시키며 다시 가나안에 돌아가서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경과 역사서가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거꾸로 읽는다”
그러면서 저자가 말하는 게 뭔지 아세요?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왜 가나안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에서는 우리 심령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려주신 거잖아요? 심령이 가난할 때는 만나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만나가 질리게 되니까요. 그 가난했던 심령이 탐욕의 심령으로 변하더라고요. 어떻게 만나만 먹고 사느냐는 거예요. 고기도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먹을 만큼만 거두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에 들어가니까 어때요? 곡식을 쌓아 두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곡식을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하잖아요? 광야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지만, 가나안에서는 바알이 비를 내려줘야 창고에 곡식을 쌓을 수가 있죠. 그래서 가나안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바알도 필요해요. 그래서 껍데기뿐인 우상을 만드는 게 우리 인간이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왜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산 위에 올라 팔복의 가르침을 받게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심령이 가난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실까요? 내려놓고, 비우고, 영적인 파산상태에 이르러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자존심이자 한국기독교의 양심으로 불리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이 한성감옥 밑바닥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참 귀하기만 한데요.
이상재 선생님은 1850년 충남 서천의 한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하고 맙니다. 당시에는 실력이 아니라 돈과 뒷배경이 있어야 출셋길이 열리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출셋길이 열려 전환국 위원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갑오개혁은 이상재 선생에게 가파른 출셋길이 되었고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아관파천 때는 내각 총서로서 황제를 보살폈습니다. 그 후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의정부 총무국장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0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과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고종황제도 독립협회에 호의적이었지만, 왕조 체제를 부정하는 쪽으로 협회 방향이 흘러가자 결국 황제는 이상재와 남궁억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립니다. 이때다 싶어 매국노였던 이완용과 이근택은 독립협회의 잔당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이상재는 물론 그의 아들까지 체포해서 한성감옥에 투옥시켜 버립니다. 그때 이상재 선생의 나이가 53세. 뒤늦게 출세해 불과 2년 만에 종2품 자리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했던 그는 3년 만에 벼슬도 잃고 누명을 쓴 채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감옥에는 이상재 선생보다 먼저 잡혀 온 배재학당 출신의 이승만 선생과 신흥우 선생도 있었습니다. 독립협회 운동을 함께했던 이들은 이완용의 배신에 분노와 실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옥중에서 고문과 악형을 받으면서도 ‘정세역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바깥 정세가 변함이 없는 거예요. 석방은 고사하고 이제 감옥 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범들이 ‘절망의 투옥생활’을 하던 한성감옥 안에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요. 감옥에 도서실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기독교 서적을 그 감옥 안에 넣어주었던 것입니다. 책이 무려 500여 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도 있었지만, 중국에서 인쇄된 한문으로 된 기독 서적도 많았습니다.
여러분, 지식인 정치범들에게 감옥 안에서 견디기 힘든 것이 뭘까요? ‘무료함’입니다. 텅 빈 무료함 있잖아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는 지식이거든요.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지루한 수감 생활에서 독서는 유일한 시간 때우기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출신의 정치범들은 선교사들이 넣어 준 기독교 서적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상재 선생은 유교의 가르침을 최고로 여겼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냥 서양 오랑캐의 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으려는 생각보다 “어떤 종교인지 알아보리라”하는 심정으로 읽었다고 합니다. 1902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신약성경만 세 번을 통독했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위대한 왕의 사자로부터 호통을 듣는 환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수년 전, 이상재 선생이 워싱턴에 있을 때, 그에게 성경을 주어 믿을 기회를 주었지만 거절했다는 거예요. 독립협회에 가담했을 때도 자기만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도 믿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옥중에서 정말 심령이 가난해진 상태에 처한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데 잘못했다고 회개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큰 죄가 될 것이라는 호통을 듣게 됩니다.
너무도 생생한 천사의 호통을 체험한 후 이상재 선생은 이전과는 다르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자 성경에 대해 닫혔던 마음이 열리게 되었고 의심스러웠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이 유교의 가르침과 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특히 산상수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선비의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요. 이상재 선생만 그런 체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투옥되었던 다른 정치범들도 비슷한 시기, 화상과 말씀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한성 감옥 안에서 집단 개종으로 일어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개종한 정치범들은 1903년 12월, 감옥 안에서 성탄절 축하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결의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나 이곳을 나가면 제일 먼저 우리를 감옥에 투옥시킨 이근택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표하자.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쁨과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인데 우리가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던들 어찌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감옥으로 인도한 이근택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상재 선생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훗날 <조선기독교 급외교사>라는 책을 쓴 이능화라는 분이 당시를 회상하며 책의 소제목을 이렇게 썼습니다. “지옥즉천당” 말 그대로 “지옥이 천당으로 바뀌었다”라는 것입니다. 고문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들의 가난한 심령에 팔복의 영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성 감옥 밑바닥에서 예수님을 만나 하늘 행복을 얻은 이상재 선생은 출옥 후에는 정계로 복귀하지 않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YMCA에 들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상재 선생님이 고종황제의 든든한 후원을 입고 초고속으로 정2품 벼슬까지 올라갔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을 읽었던들 과연 그 말씀이 눈에 들어왔을까요? 그렇게 진출하고 싶었던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이제야말로 늦은 나이에 출세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지!’ 나라가 가난해지면 안 된다고 미국처럼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황제도, 미국도 그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옥중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밑바닥 인생에 그 파산한 심령에 팔복이 임하니까요. 지옥이 천당이 되더라고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뭐예요? 하늘나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가난한 심령을 주십시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가나안에 머물며 곡식 창고를 채울 생각만 하는 텅 빈 인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지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옵소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면 ‘지옥즉천당’ 그곳이 하늘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저와 우리 교우님들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내 영혼이 은총 입어(1, 3절)
❙합심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지금 행복하세요?’ 부탄 국민의 97%가 왜 행복할까요?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이 행복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의 행복의 조건이 다른 게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지옥즉천당’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든 하늘나라”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행복을 소유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진정한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데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행복의 조건이 자꾸만 세상적인 조건에만 맞춰져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을 우리 스스로가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나안 땅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손에 쥐어질 줄 알았는데, 사는 것이 너무도 고되고 힘들기만 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하름의 성도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셔서 가난한 심령을 갖게 하시고 지옥 즉 천당, 어디서든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참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을 누리기로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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