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3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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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조연 세례 요한.
빛나는 조연 세례 요한.
오늘 본문에 보이는 이슈는 세례로 보입니다. 유대 땅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은 같은 시기에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막상 4장 2절에는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풀었다고 ( )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 ) 표기라는 건 다른 성경 사본에 발견 되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나중에 추가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만큼 세례는 자체도, 누가 했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1장에서 세례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그리고 ‘증언하러 온 사람’ 증언의 내용은 ‘빛에 대하여’ 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 하는’ 사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소개가 끝나자 바로 18절에서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됩니다. 특이하게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엘리야도 엘리사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며 자신을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세례를 베푸냐고 말하는 것은 자격도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그만큼 세례를 행하는 요한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의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머무르는 장면을 보고 증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사건도 소개하고 그 중 한 명이 안드레라고 소개를 합니다.
선생으로 제자를 다른 스승을 따르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스승에게 길을 인도하는 요한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의 시기심과 질투심이 오늘 본문에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 비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설득되지 못한 가족들 또는 대표적으로 제자와 같은 이들이 그러한 신념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이나 들은 것을 중심해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는 각자의 생각이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2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는 것이죠. 요즘 말로 말하면 이것은 팩트입니다. 이런 팩트를 자신의 가치관만으로 판단할 때 올바른 방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가치관 안에는 시기, 질투, 공명심등은 어둠의 영역으로 빛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영향을 주는 것이죠.
소주제1 - 왜 세례가 중요한가?
본문의 이슈인 세례도 중요하지만 요한이 더 중요합니다. 잠시 요한에 대한 신학적인 소개를 하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앞선 세대와 예수님의 세대를 구분하는데 옛 시대를 끝내는 인물인데. 눅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마11:13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이런 위치에 있는 인물 요한이 ‘세례를 행한다는 것은 요한의 영향력을 잘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2. 특히 4복음서 모두에서 세례 요한의 기사를 다룹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모두 등장합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앞서 살폈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 한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세례’를 받으라고 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요한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3. 비록 광야의 소리라고 소개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모이지 않죠. 그래서 네가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는가 하는 것인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서에 말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은 돌이킴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 세례 요한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는 매우 영향력이 있는 것이죠.
이러한 요한인데 그가 소개하는 예수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그의 제자들이 보고 그러한 상황을 스승에게 ‘스승님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주제 2 -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신앙에도 영향을 줍니다.
요한의 제자는 스승이 ‘내 뒤에 오시는 이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까?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만 우리는 장사를 하는데 옆집이 손님을 다 가져가는 것 같은 상황으로 판단합니다. 여기에 ‘가더이다’는 말은 어느 시점부터 계속해서 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요한의 제자들도 알긴 했습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는 것과 항상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2. 이제부터 다시 요한의 태도를 살펴야 합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어찌보면 하늘에서 정한 것인데 내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하겠느냐 라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장에서 요한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고 놀라운 구원 계획의 ‘하나님의 어린양’ 이심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심을 바라 볼 때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의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상대가 더 옳다는 믿음이 있을 때 내려 놓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는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사고로 인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에 대해서도 ‘나도 할 말이 있다’라고 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3. 요한은 이어서 자신의 증언이 할 일이라는 마땅함에서 더 나아가는 믿음을 보입니다. 지난 주 니고데모는 멈춰 섰습니다. ‘어떻게 두 번 태어나는가? 엄마의 태 속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인가’를 기억한다면 요한은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친구는 크게 기뻐하는데 내가 바로 그러한 기쁨에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쁨을 살면서 경험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녀 때문에 경험을 하지만 자녀 세대의 경우 쉽게 경험할 수 없죠. 예를 들어 늘 같은 내용인 편지를 생일이나 어버이날 합니다. 그럴 때 부모는 기쁨으로 반응하고 이것이 자녀들은 마음에 뿌듯함을 주죠. 주인공인 부모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기쁨은 살면서 타인이 주인공으로 내가 조연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경우를 느끼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소주제3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요한은 제자들의 말에도 분명하게 자신의 사역에 집중하는 한편 자신에게 주어진 기쁨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첫번째 모델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깨닫고 자신도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31절부터 바로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예수께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이신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시라는 증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경배의 대상이심을 아는 것과 믿음이 정확하게 일치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아시는 것, 즉 하늘의 모든 것을 요한은 알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땅에서의 작은 일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냐고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2.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참됨을 가지시고 보내신 이라고 33-34절에 고백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시는 능력이야 말로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능력의 예수님이심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고 아들이 오심을 통해 이미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요한은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은 요한처럼 바라는 것이 삶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생’ 곧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과 한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36절 요한 3:36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 하는 고백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목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3.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눈과 코 그리고 귀라는 신체를 통해 오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은 이것을 해석합니다. 기분이 나쁘다, 좋다, 이것은 괜찮다 등 말이죠. 요한에게 사람들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서 몇몇 인물을 제시할 때 적당한 선에서 두루뭉술하게 자신을 좀 있어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자기 pr이죠. 그러나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무대에 하나님께서 먼저 보내신 세례 요한의 외침 곧 증언과 함게 등장하십니다. 분명 그분은 ‘주인공’이시고 요한은 ‘조연’입니다.
그런데 누가 조연의 삶을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주인공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해도 빛나는 조연이라는 수식어 하나즘은 붙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조연이라는 다양한 사람들도 충분히 ‘빛’나게 하는 시대로 많이 변한 것도 사실입니다.
결론부 -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이런 말씀은 오늘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오늘 말씀을 요한처럼 그렇게 자신의 사명에 만족하고 기쁨을 발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고 하면 맞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설득해보겠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왜 기술과 실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신실해라, 성실해라, 겸허해라’는 골이 따분한 똑같은 이야기를 할까요? 예를 들어 유명인들이 참여하는 오디션 프로에서 많은 참가자들은 교회의 설교보다도 더 동의하고 나도 그러게 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면서 임하게 됩니다. 그런 유명인사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하면 그렇게 됩니다. 영향력이 그만큼 있는 것이죠.
어떤 프로에서는 실력도 좋고 나름 평판도 좋아서 승승장구 하다가 과거에 학교 폭력의 사건에 연루되었다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가 드러나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일은 이제 꽤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결국은 그 흔한 ‘신실함, 성실함, 겸허한 태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죠. 물론 어린 시절 영향력을 받을 만큼 태도도 없었고 받아들일 자세로 성장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인생이라는 오디션에 참가하고 있다면 ‘신실, 성실, 겸손’의 잣대로 본다면 이미 예선 탈락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와일드 카드를 제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존경하는 아버지 저를 믿고 저 친구를 인생의 경로에서 한 번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나를 구원해 주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의 기쁨이 그대로 전달되어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요구에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다음 구절을 읽겠습니다.
요한 10:41-42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10장은 세례 요한의 모든 생애를 정리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자신의 증언이 참이 되도록 신실하게 살았고 옳은 일을 위해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아무 표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참이 되도록 겸손하게 살아서 결국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되는 사명을 감당한 요한이야말로 그대로 빛나는 조연이었다고 삶을 평가받았다면 오늘 우리 또한 이러한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각자의 마지막 평가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빛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