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3. 주일3부예배. 과정 속에서 자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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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서론
서론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실망스러운 때가 언제입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을 때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러한 실망을 경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저도 알고 성도님도 다 아시는 것은 내 맘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안되서 마음이 괴롭고 하나님께 실망을 한다? 아직 신앙의 걸음마 단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볼까요? 우리가 무엇때문에 불평하고 무엇때문에 실망했습니까? 대개는 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열심히 간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으면서 이게 뭡니까?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지난 날을 요약하는 문장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내게 가장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다르다는게 문제가 되었었지요. 마치 이런 상황과 같습니다. 어린 자녀가 날카로운 칼을 원합니다. 안간힘을 써서 도마 위에 놓여있는 칼을 손에 쥐어보려 할 때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녀를 곧장 가로막고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안돼! 이건 위험한거야!” 아무리 떼를 쓰고 칭얼대도 그걸 못견디겠어서 칼을 한 번 쥐어줘볼까? 생각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가 원하는대로 칼을 쥐어주는 것이 절대 내 자녀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언제 칼을 쥐도록 허락됩니까? 그 칼을 손에 쥐어도 위험하지 않을만큼 충분히 성장한 다음에야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단호하실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떼를 쓰고 칭얼대며 실망하고 있다면 나는 절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지요. 혹시 신앙생활 연차가 조금 되가시는데도 여전히 이정도 수준에 계신 분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셔야 합니다. 매를 맞으셔도 할 말이 없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이미 이정도 수준은 졸업하신 줄 믿습니다.
이제 신앙생활의 걸음마 단계를 지나서 조금은 사람다워졌을 때, 우리는 또 무엇으로 실망하게 될까요? 우리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삶의 자리에서는 그런 고백대로 살아내는 실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자꾸만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삶 사이에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과 괴리가 느껴질 때 우리는 “내가 정말 구원받은게 맞나? 나는 아닌가보다”하며 회의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신가요? 누구나 다 신앙이 성장하며 겪는 과정입니다. 신앙의 성숙이 단번에 완성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지요.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후대에 예수님의 수제자라 기억되며 불리지만, 그가 걸었던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는 절대 단번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분명 겁내고, 의심하고, 주저하며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다시 한 번 사명을 받고 난 후에도 할례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이방인과 식사 자리를 피한 위선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전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의 여정의 마지막 즈음에 박해를 피해 로마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의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정말 그의 여정의 마지막 순간, 순교라는 결승선을 넘으며 이루어졌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긴 신앙의 여정 끝에 완성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곧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는 긴 과정을 거쳐 완성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신앙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이 과정 자체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 성장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보며 “내가 구원받은게 맞나? 나는 아닌가보다”하며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 번 실족하게 되면 신앙 생활이 더 이상 재미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직 요모양 요꼴이라면 내 열심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예배와 봉사의 자리를 떠날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체면 때문에라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심어두신 신앙의 양심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결코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고 싶지는 않은데 빠질 수는 없는 이 애매한 상태, 이런 상태에서 무슨 예배와 봉사와 섬김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이 과정을 착실하게 한걸음씩 밟아가야 함을 모르면 신앙의 권태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완성하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완성되었을 그 때에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작정하셨는지를 모르면 이 과정이 절대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권태기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신앙생활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더욱 잘 알아야겠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다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 닿는 데까지 한 번 같이 나누어보도록 합시다.
본론
본론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신학적으로는 9가지 정도의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르는데요, 오늘은 지금 꼭 다루어야 할 세 단계만 집어서 다루어봅시다. 무엇이냐면 칭의와 성화와 영화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시작할 때 칭의라는 일이 일어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모두 내 힘으로는 도저히 스스로를 구원해낼 재간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항복을 선언하고 하나님께서 내미신 은혜의 선물을 빈 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지요. 우리는 내가 하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신 하셨음을 믿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내가 살았어야 할 온전한 삶을 대신 살아내셨음을 믿는 것이지요.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이 때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가 칭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 하나님께 의롭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이 칭의이지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입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 앞에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공로와 희생을 근거로 우리를 의인이라고 여겨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더욱 잘 이해하려면 법정을 상상해보시면 됩니다. 한 인간이 기소되어 법정에 섰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삶을 낱낱이 파헤쳐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우리의 유죄를 주장합니다. 도저히 이 재판을 뒤집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때에, 예수님께서 그 인간을 위해 변호를 시작하십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이 죄인에 대해 영원한 형벌을 선고해야 함이 옳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시여, 제가 이 죄인을 위하여서 이미 모든 형벌을 대신 다 치루었습니다. 그러니 이 자를 향하여서 한 번 더 죄를 묻고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변호를 받아들이셔서 예수님의 공로와 희생을 근거로 기소된 인간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지금부터 그 어떤 것이 너를 죄있다고 떠들지라도 너는 무죄이다. 너는 내 앞에 의인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
판결과 무죄의 선언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반복될 필요가 없지요. 곧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나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단번의 선언으로 인해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신분이 변화된 것이지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칭의라는 것으로 우리 삶에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칭의는 시작입니다.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후에는 우리가 성화라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됩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본성과 자질의 변화지요.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내십니다. 이 과정을 다 거치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영화의 단계,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칭의로 시작하여 성화라는 과정을 거쳐 영화라는 완성에 이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정말 간략하게 그려낸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다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은혜로 지탱되며 은혜로 완성됩니다. 한 연로한 목사님께서 이 말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주셨습니다. 정말 탁월한 설명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열심이며 고집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열심과 고집 때문에 구원을 받고, 자라가며,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를 향해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귀한 아들을 잡아 희생 제물로 삼으시면서까지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분의 결심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결심으로 시작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다한 열심과 고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부모도 자녀를 기를 때 어루고 달래고 때로는 혼내고 두들겨패서라도 자녀를 올바르게 길러내고자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당연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우리를 무엇인가로 만들어내려 하십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만들어가신다고도 하고, 신성한 성품에 완전하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이끄신다고도 합니다. 성경에 무지한 우리에게는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그 모습에 대해 반복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1절과 18절인데요, 우리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개역개정의 번역으로 보면 바울이 지금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가 새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성경전서 새번역 1장
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3)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성경전서 새번역 1장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어떤 존재로 부르셨고 어떤 모습으로 완성시키시길 원하시는 것 같으십니까? 상속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물려받아 함께 다스리고 함께 누리게 될 상속자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를 다 쏟으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도록 모든 역사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쏟으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상속자로 만들어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상속해주시고자 하는 것을 맡아서 잘 다스리고 잘 쓰고 잘 누릴 실력이 되었을 그 때, 우리가 상속자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을 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을 맡기실 계획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완성에 대한 그림이며, 그 때에 우리가 받게 될 놀라운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섣불리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들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들을 맡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주어진 힘과 재물과 권력은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실력과 자질을 갖추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 순서를 무시하시고 먼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혹시 조선시대 세자들이 왕이 되기까지 얼마나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어야 했는지 아십니까? 한 명의 왕을 세우기 위해서 왕실에서 얼마나 교육에 힘썼는지 아십니까? 영상을 통해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영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부르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이제 좀 감이 잡히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작하신 구원은 그저 내 죄를 가리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정도의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전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그 모습을 미리 바라보시고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되어서, 상속자로서 충분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게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고 마음껏 세상을 누리게 될 그 모습을 꿈꾸시며 우리를 그렇게 길러내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반드시 필요한 희생제물로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을 잡으시며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때에 보여주신 하나님 의지의 단호함, 하나님 사랑의 무한함,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정은 우리에게 늘 한결같을 것이라고 성경은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고, 실패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것을 다 협력하게끔 만드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들로, 하나님의 상속자들로 길러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과정을 지나는 중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이제 신앙생활이 재미있어집니다. 우리가 이르게 될 곳과 받게 될 것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과정을 감내할 수 있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책임지시고 함께하시겠다는 사실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할 몫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우리의 순종이 만나야 비로소 우리는 완성에 이를 수 있게 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말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녀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 부모는 이미 자녀들이 걷는 것 뿐 아니라 뛰게 될 것까지 바라보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녀들의 걸음마를 연습하는 과정 내내 함께합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넘어진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일으켜주고 붙잡아주며 기어이 걷게 만들지요. 한 아이가 제대로 걷기까지 대략 3천 번 정도는 넘어진다고 합니다. 아이는 머리가 몸통보다 크고 무거운 가분수여서 신체의 균형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제 몸 하나 간수할 실력조차 아직 없는 것이지요. 넘어질 때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넘어진다. 머리, 어깨, 무릎 등이 수없이 다치고 깨진다. 그렇지만 아이는 겁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피가 난다고, 걷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손이 함께함을 압니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한 번 자신을 일으켜 주는 손을 믿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걸음마를 배워 비로소 걷게 됩니다.
장담컨데 이 과정에서 포기하는 아이는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말이 되지는 않지만 어떤 아이가 나는 왜 항상 넘어지기만 하지?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게 맞나? 나는 아닌가보다. 하며 다시 일어나 걸어보려 하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의 성장과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
결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계속해서 넘어지기만 해서 “내가 정말 구원받은게 맞나? 나는 아닌가보다”하며 체념하고 계십니까? 실망하며 낙담하고 계십니까? 몇번쯤 넘어지셨습니까? 넘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넘어져서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때로는 넘어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한 번 일으켜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금 당장 완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완성된 모습을 내게 보이라는 것이 아니세요. 해봐라! 다시 해봐라! 내가 도와주마. 기어이 너를 내 아들답게, 내 딸답게 만들어주마. 내가 네게 상속해줄 세상을 상속받을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주마. 그러니 일어나 다시 걸어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시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답게 세상의 헛된 유혹과 속임에 빠지지 않고 주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십시오. 장차 온 세상을 상속받을 상속자답게 내 시간과 물질과 삶을 사용하고 누리는 것을 계속해서 배워가십시오. 세상은 감히 꿈꾸지도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러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기를 연습해보십시오. 이것을 저는 명예로운 삶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명예롭게 살아가십시오. 물질 성 권력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열심과, 우리의 포기하지 않는 순종이 만나 반드시 완성될 그 날이 곧 오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