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3주일예배_마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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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대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마태복음 6:22–23 NKRV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요즘 무슨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 그것은 어쩌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스스로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어야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만한 조건 내지는 상황을 접할 때 그 기대감이 가슴 두근거리고 설레는 희망으로 우리를 움직입니다. 오늘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시대의식은, 냉정하게 바라볼 때 현실 자체의 냉혹함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냉혹한 현실에 주눅 들고 길들여지는 사람들의 마음,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요?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대감의 대상 그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절망감이 더 큰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이 말씀을 보면 언뜻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가 있지요? 태조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삼아 돼지 같아 보인다고 했더니 무학대사는 임금님이 부처님 같아 보인다고 했다는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덧붙여진 이야기가 의미심장하지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이렇게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몸의 등불로 비유된 눈은 세계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는 이야기는, 세계관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삶 또한 밝을 것이요 세계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삶이 어두울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성한 눈과 성하지 못한 눈은 과연 어떤 세계관을 뜻할까요? 아주 흔한 해석으로 일반화시켜 이해하자면, 성하지 못한 눈 곧 나쁜 눈은 질투, 시기, 탐욕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성한 눈 곧 좋은 눈은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 잘못될 것은 아니지만, 본문 말씀의 문맥으로 볼 때 좀더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재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맥락의 한 가운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6:21). 본문에 이어지는 이야기도 재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4). 이와 같은 문맥으로 보아, 마태복음서의 이 말씀은 재물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고, 성한 눈은 곧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 보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세계관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있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 말씀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당장 가시적인 경제성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정책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회적 환경, 그리고 우리의 자연적 환경을 얼마나 피폐화시키고 있습니까? 그와는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신을 뜻을 따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에서 성한 눈은 곧 그 삶을 바라고 기대하는 데서 오는 희망을 뜻합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는 눈이 성치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좀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말씀(누가복음 11: 33~36)의 문맥 또한 흥미롭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앞뒤로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을 질책하고 있는 문맥 한 가운데 등장합니다. 바로 앞에는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를 향하여 요나의 기적 이외에는 더 보여 줄 것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11:29~32). 요나의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듭남의 기적입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은 경건한 채 하면서 남에게 존경받기를 즐기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종교적으로 신실한 척 하면서 정의를 외면하고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소홀히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질책하는 내용입니다(11:37~54). 여기서 본문 말씀의 의미는 권력과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성한 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준다고 믿는 세계관에서 정의로운 삶의 관계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이 역시 오늘 우리 현실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닙니다.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법적 절차를 어겨가며 법을 제정하고, 인사를 처리하며 권력의 안정을 시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마저 누구나 일단 힘을 갖고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성한 눈으로 스스로의 몸을 밝힌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거둬내고 진짜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언뜻 보아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단순히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품은 뜻이 없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바꾸며, 어떻게 삶을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요동을 칩니다. 자기 뜻대로 되기보다는 자기 뜻을 거스르는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삶의 매 단계, 매 순간이 난관이 아닌가요? 그 사실을 절감할 때 사람들은 요동치는 세상에 자신을 내맡기고 맙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내맡겨서는 안 될 삶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세상이 캄캄한데 그 캄캄한 세상에 스스로를 내맡겨서야 되겠느냐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이 말씀은 그 어둠에 파묻혀서는 안 될 우리의 삶을 일깨웁니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맑은 눈으로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밝히시고 스스로를 밝히심으로써 우리에게 몸소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그 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볼 수 있는 길을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대감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을 알고 함께 다르고자 하는 길동무들이 오늘 여기 한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길동무들과 만나는 일이 늘 설레고 두근거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희망적입니다. 오늘 우리들 마음 가운데서 있는 그 희망을 밝힐 수 있는 맑은 눈을 크게 뜰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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