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받은 인생 : 생명의 전달자

엘리야와 엘리사 내러티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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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질문) 나의 인생 : 내 생각대로 선택하며 살 수 있다 vs 누군가에 끌려 가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 인생은 선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산다. (세상 - 네 인생의 주인은 너야!)
그러나 우리는 안다.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끌고 가는 ‘누군가’를 알고 끌려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끌려가는 인생이 곧 부름 받은 인생이다.
예) 군대영장 나왔을때 :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국방의 의무는 내 생각대로 (임의대로) 선택할 수 없고, 끌려 간다.
(ppt사진) 그런데 태국에서는 제비 뽑기를 한다고 한다. 빨간 공은 입대, 검은 공은 면제 - 사진에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누가 입대이고 누가 면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비 뽑기 이후 : 입대한 사람은 불행, 입대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 그 기준은 다를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혹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대를 통해 성장했다고 생각 : ‘일 머리’, 에이 군대는 더 했는데 - 참았었는데 이 정도 쯤이야.
억지로 끌려 간 군대에서도 좋은 경험이 있었고, 성장이 있었ㅡ는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끌려 가는 인생은 어떨까? 복된 인생이다.

부름받은 인생이란 끌려가는 인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인생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끌려가진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끌고 가실 때 그 목적과 이유가 다 있으시다.
(지난 설교) 부름 받은 자의 꼬라지 : 두달 가까이의 시간이 지났으니 기억하진 못하실테고 두 달 전에
우리의 부르심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 사람은 누구?
(왕상 17:1-7) (스토리 참고. 설교문에는 삭제)
1)엘리야를 부르시다 (길르앗, 디셉사람 : 꼬라지)
그리고 엘리야가 선포하다 (아합,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이슬과 비가 없다)
엘리야의 선포 이후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합이 회개한다던가. 이스라엘백성이 회개하고 엘리야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엘리야는 아합을 피해 숨게 된다.
2)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시다 (그릿 시냇가)
3)엘리야를 먹이시다 (까마귀, 아침과 저녁)
(왕상 17:1) 디셉 사람 엘리야 - 평범한 인물
1.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 어떤 사람을 부르실까? 꼬라지와 상관없이 부르신다. 상황과 형편과 상관없이 부르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부름 받은 자를 훈련시키신다는 것이다. 왜?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훈련은 다른 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훈련의 과정은 쉽지 않다. 훈련이 힘든 이유는 내 생각과 ‘꼭’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야는 부름 받은 후에 아합을 찾아가 선포한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비가 오지 않을 거야!” 선포 후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나? 아합과 대결한 것이 아니라 그릿 시냇가로 도망 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엘리야가 받은 훈련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을 경험하는 훈련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누구도? 부정한 까마귀조차 하나님은 다스리시고 계신다를 경험)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 (매일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공급하셔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 셋째,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는 훈련 (버려져 홀로 남아 있지만 하나님과 나와 함께 하신다)
그릿 시냇가는 엘리야에게 ‘광야’라고 할 수 있는데. 엘리야는 그곳에서 당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훈련의 시간동안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엘리야는 영적으로 꽤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 곳이 좋다고 계속 있을 수 없었다. (막 9:5) 시간관계 상 인용 안하는 구절
왜냐하면 상황이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왕상 17:7) 하나님은 엘리야가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밖에 없게 만드셨다. 엘리야는 또다시 살기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본론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고 하셨을까? (왕상 17:8-9) 하나님은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셨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간 것은 ‘광야’에서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간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 부름 받은 자는 광야에 떠나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정말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세상 속에서 부름 받은 자로 살아살 때 훈련이 시험이 계속해서 있다. 말씀대로 살 때에 부딪힐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우리는 혹독한 훈련이-시험이 ‘내 인생에 없기’를 바란다. 부딪힐 일들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평탄한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름 받은 우리가 부름 받은 자 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신 것처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시고 시험을 만나게 하시며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1) 엘리야가 가야하는 사르밧은 어떤 곳인가? 사르밧에 관한 정리
-(지도 ppt) 먼저 사르밧은 그릿 시냇가에서 120Km가 되는 거리였다. ‘네이버 검색 : 경북 왜관 - 차로 1시간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 - 자전거로 10시간-도보로? 이틀정도’ 그런데 문제는 거리가 아니다.
(왕상 17:9) 사르밧은 ‘시돈’에 속해 있다고 하는데 ‘시돈’은 바로 이세벨의 고향이었다. 우상 숭배의 본거지바알의 본거지이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살기위해 그릿 시냇가로 도망쳤는데 제 발로 악의 소굴로 들어가는 꼴이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가기 싫었을까? 이제 바알숭배자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얼마나 끔찍할까요? 요나였다면 다른 장소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깊으신 뜻이 있다. 하나님께 끌려간 그 곳에 역사가 있다.
-사르밧이란 단어에 힌트가 있다. 사르밧의 히브리 원어의 뜻이 정련소, 제련소, 용광로이다. 어떤 구절이 생각? (욥 23:10) - 사르밧은 훈련 장소 :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결국 엘리야는 사르밧에서 그릿시냇가에 이어 또다시 하나님을 경험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앞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 ‘물’이 말라서였다. 즉, 먹고 살기 위해 떠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먹고 살 수 있는 방안을 알려주셨다.
(왕상 17:9)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 “과부에게 음식을 받아 먹어라!” (까마귀역할이 과부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1) 엘리야의 상상 :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먼 길 - 바알의 본거리로 들어왔다. 어떠한 기대? 작은 소망이 있지 안았을까? 과부의 집으로 가라고?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나를 먹일 수 있을 만큼 부유하고 넉넉한 집이겠지.
그러나 과부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왕상 17:12)
가난 (굶어죽기 일보 직전) - 까마귀에게 음식을 받아 먹었던 자신보다 더 못먹고 있었던 과부. 그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지난 1여 년 가뭄의 시기 : 보릿고개 - 극도로 예ㅣ민ㅎ
(예> 아버지 소나무 껍질)
2) 엘리야의 명령 (왕상 17:13)
과부의 사정을 아는 엘리야는 과부에게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명령 - 하나님께서 하신 이상한 명령 : 인간적으로 굉장히무례하고 무자비한 명령이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을 경험 :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신 하나님 -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 - 그리고 상황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 : 이로 인해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넘어 확신을 갖게 되었다!
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이유가 다 있다.
2) 하나님의 공급에는 인간적 능력이 필요없다.
하나님은 떡이 없어 죽으려고 하는 과부를 향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무엇을 주고 싶었을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만든 ‘떡’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달려 있어라고 이야기하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비참함. 과부와 아들은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시돈의 다른 사람들처럼 ‘바알’을 숭배하며 - ‘바알’이 떡을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다! 틀렸다! 속았다! 보아라!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지 않았니?’ 가르쳐주셨다. 생명은 ‘바알'에게 달리지 않았다. 생명은 ‘돈'에 달리지 않았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 받았다. “당신은 하나님이 필요해요!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 당신도 만나고 경험해야 해요!”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라는 광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알의 근원지인 사르밧에서 ‘확신’을 가지고 과부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결론 : 그래서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광야는 어디인가? 자, 이제 아무도 없는 산골오지로? 사막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예배 마치고 감림산기도원으로 가면 될까?
광야는 어떤 곳일까? 하나님과 독대하는 곳이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다면 집이 교회가 카페가 광야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독대할 수 있다. 성경을 우리 손에 주신 이유이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공부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신다. 광야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에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 살게 하셨다. 왜 하나님은 광야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세상으로 보내실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공부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목적이 내가 하나님을 독대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앙이 성장하고 성품이 성숙해지는데도 목적이 있지만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남주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전달'하기를 원하신다.

(왕상 17:15-16) 엘리야와 과부는 바알의 근원지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엘리야를 통해 과부와 그 아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이웃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들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 떡을 받아 먹는 단계에서 자신 뿐만 아니라 과부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부름받은 사람은 나 혼자 하나님을 독대하고 경험한 데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전달해야 한다. 부름 받은 인생은 자신의 배만 채우고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타인의 배까지 - 타인의 필요까지 채울 수 있는 넉넉한 인생이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전달해야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름 받은 우리가 ‘생명의 전달자'이고 우리는 ‘엘리야’이다.
베드로도 그랬다. (행 3:6)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험한 후 그는 예수로 가득 찼다. 이전에도 현재도 베드로의 꼬라지는 별로 였다. 왜냐하면 주머니에 은 하나 금 하나 없는 꼬라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 안에는 예수가 있었다. 그래서 구걸하는 이를 보며 베드로의 마음에는 ‘긍휼’의 마음이 생겼다. 구걸하는 이가 가난해서가 아니다. 예수가 없이 사는 인생을 보며 긍휼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그렇게 베드로를 통해 성문 안에 앉아 있었던 못 걷는 이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부름 받은 인생이 마땅히 해야 할 선포 : ‘예수의 이름’ 부름받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 ‘생명'이신 예수의 이름이 선포되고 전달되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고 목적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부르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인생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영상) 이런 인생되게 하소서 - 선한 영향력 (비오는 거리, 우산과 함께 한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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