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성결로 무장하여 주님을 따르십시오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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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3:1–5 NKRV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서론
여호수아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약 680년 만에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출애굽 1세대의 비참한 말로를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 역시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눈으론 임무에 실패한 정탐꾼의 보고를 들으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증 받습니다. 이방 창녀의 입술을 통해 그는 위대한 모세의 신앙고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후 모세가 불렀던 노래를 듣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널 준비가 된 것입니다.
외적으로 준비되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이 다 준비해주십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론

1) 여호수아의 믿음

오늘의 본문의 상당 부분은 새벽예배 때 전했던 내용입니다만 말씀을 전한 뒤 계속 생각해보면서 중요하게 다가온 깨달음이 있어 한 번 더 나누려 합니다.
여호수아 1장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명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단강은 너비 30m에 깊이 1-3미터 정도로 건너서 도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홍수철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강폭은 200m에서 넓게는 1km로 넓어집니다. 이 때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라고 명령하실 때는 홍수철로 요단강을 건널 수 없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가 요단강 앞까지 이를 때까지 그가 명령에 불평하거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하나님께 하소연한 적이 있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는지가 드러납니다. 5절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가르실 것을 미리 알려주신 내용은 여호수아서 안에는 없습니다. 그는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라면 사람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요단강 역시 능력으로 가르시어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언약궤 뒤를 따라가라

요단강 앞에서 사흘 간 머문 후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려 합니다. 모세 때부터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언약궤는 선두에 위치했습니다. 이번에도 언약궤가 선두에 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4절에서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주의사항과 함께 언약궤의 뒤를 따르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4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3:4
여호수아 3:4 NKRV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먼저 이스라엘이 언약궤 뒤를 따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호수아는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낯선 땅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분 뒤를 따라가야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을 성스러울 성(聖) 자에 싸울 전(戰) 자를 써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다른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전사로서 친히 지휘하시고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거룩한 전쟁에 있어 상대편 군사력이나 이스라엘의 물리적인 군사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게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따라가지 않고 ‘앞서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맬 것이 분명합니다.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적의 기습에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어 가나안 정복 전쟁은 실패할 것입니다. 필승, 압승을 위해 그들은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겸손히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겸손히 따라간 자들은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입성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 주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계시록 14:4 NKRV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평안하든 고난의 연속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갔고 그 종착점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반복된 일상이지만 우리의 지금 그리고 미래는 걸어가지 않은, 낯선 길입니다. 오늘과 같은 내일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좋은 일이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침마다 찾아오는 해가 두려울 것입니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달이 두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평안과 담대함으로 맞이하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참된 인도자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말씀하시고, 상황과 환경을 통해 확증해주시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비결입니다.
또한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그들의 풍습이나 우상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이 일러주신 거룩한 삶의 방식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을 걸어갑니다. 그 길은 저주의 길이며 영원한 형벌로 향하는 길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며 하나님이 일러주신 거룩한 백성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성은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거룩과 성결로 무장하라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언약궤 뒤를 따르되 그것에 가까이하지는 말라고 주의합니다. 백성은 언약궤와 이천 규빗, 약 1km의 간격을 벌린 상태로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빛 되신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말했습니다. 어두움, 죄와 부정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정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떠나시거나 그것을 죽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성전입니다. 강력한 전사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군사력, 상대방의 군사력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중요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성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거룩과 성결로 무장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성결하지 않은 채로 나간다면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칼끝이 되려 이스라엘을 향할 것입니다. 성결치 못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거룩과 성결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편에 서야만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도록 교회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는 거룩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사탄이 결정적 패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탄의 잔여 세력들이 남아 거칠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치르는 영적 전투 역시 하나님께서 지휘하시고 싸우시는 성전입니다. 공동체와 성도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가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의 관건 역시 우리의 적들이 얼마나 강하냐,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재원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환경과 능력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데 전혀 제한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거룩과 성결한 삶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히12:4). 예수님은 굉장히 거친 표현으로 죄와 처절하게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8–9 NKRV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

제가 새벽예배 후 오늘의 본문과 설교를 되새겨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는 많은 제사법과 성결 의식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로운지 모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흠 없는 가축의 생명을 희생해야만 합니다. 나의 죄로 실제 죽음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얼마나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까? 그러다 보면 타성에 젖어 기계처럼, 대충대충 요령 피우며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 관계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이것은 나의 목숨과 직결됩니다.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부정을 해결하는 방법을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에 오를 자격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도 없습니다.
정말 조건이 안 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딸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고 우리는 흔히 배워왔습니다.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표현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나에게 주기엔 그 선물의 질이나 양이 분에 넘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축복은 분에 넘칩니다. 단적으로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리는 사역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받을 수 없는 선물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의미는 그것은 나에겐 절대 주어질 수 없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구원일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사탄은 강하게 항의합니다. “쟤한테 왜 이런 선물이 주어집니까?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불공평한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눈에 죄인은 전혀 이쁜 구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도록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입니다. 은혜가 죄인인 우리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죄값인 생명이 지불되고 동시에 죄 짓지 않은 삶으로 얻은 의가 필요합니다. 그 희생적 대가가 있어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은혜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받을 만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내가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듯 행동합니다. 하나님께 따지는 것부터 그렇습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우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까?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되지’하며 죄 문제를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시니까.‘ 만약 구약 시대였다면 얼마나 많은 동물의 사체가 우리 죄로 인해 쌓였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 한 마디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떨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니 모세 당신이 듣고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 거룩과 성결
하나님을 관계적으로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룩과 성결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본다면 예배당만 다닌다는 것으로 내 삶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과 성결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아닌 주님의 원수가 되는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무한한 가치를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직 순종으로 답한 예수님의 의로운 삶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통한 대속의 죽음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심상히 여기는 마음, 거칠고 더러운 생각과 말과 행동,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믿음에서 실족시키면서도 나는 구원받았으니 천국 갈 것이라 확신하는 오늘날의 자칭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을 드리는 영적 움직임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과 성결을 위해 말과 행실은 물론 찰나의 생각과 감정조차도 조심하려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호수아서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거룩과 성결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승패를 좌우할 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사활을 걸어야 할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거룩과 성결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걸어갈 때 이스라엘은 초자연적인 승리의 역사를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방심하여 거룩과 성결에 흠이 생길 때 그들은 충격적인 패배를 안게 됩니다.
은혜만 구걸하고 또 그것을 뻔뻔하게 요구하는 이기적인 출애굽 1세대의 말로는 황량한 광야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룩과 성결로 무장한 출애굽 2세대는 약속의 성취를 맛볼 것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성은교회는 거룩과 성결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더 높은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금 그릇, 은 그릇이 쓰임 받지 않고 깨끗한 그릇이 쓰임 받습니다.
거룩과 성결로 옷 입어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고, 또 주님의 임재을 이고 걸어가는 성은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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