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로 난 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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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상 2:13-25
제목: 탄로 난 야욕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어떤 위치나 직분에 욕심을 갖게 됩니다. 직장에서나 어떤 공동체에서나,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욕구를 갖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질서와 체계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어떤 위치나 직분을 점유하는 것에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신뢰하기 때문에, 본인이 개인적으로 품는 어떤 사회적인 욕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에 대해서 본인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이를 거역하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도니야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이 마땅한지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도니야가 처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텐데요.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으며 열왕기상 1장에서 본인이 스스로 왕으로 등극하려다가 실패한 인물이었죠. 정적으로 낙인찍혀서 숙청당했다면, 아도니야는 이미 목숨을 잃어버렸을 것이지만, 솔로몬이 자비를 베풀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2장 13절 말씀 보세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밧세바가 아도니야를 보자마자 샬롬을 위해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도니야가 샬롬을 위해서 왔다고 답하죠. 그런데 이러한 대화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얼마나 팽팽하게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서로 가까운 사이라면, 무슨 목적으로 본인을 찾아왔는지 물어보지 않겠죠.
자 그래서 아도니야가 화평을 위한 목적, 샬롬을 위한 목적으로 왔다고 대답했는데, 과연 그가 화평을 위한 목적으로 찾아왔을까요? 15절 말씀 보세요.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이 말씀에서는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온 목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만, 그의 마음가짐은 분명하게 알 수 있죠. 아도니야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위는 자신의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 왕권이 아우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물론 마지막 대목에서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고 표현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도니야의 생각과 마음이 정당하다거나 올바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오늘날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국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사결정권이 정치인이나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왕위계승에 대한 결정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신명기 17장 15절 상반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왕은 누가 선택합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시면, 선지자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서 왕을 찾아가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죠. 사울도 그렇게 기름 부음 받았고, 다윗도 그렇게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영적인 관점에서 아도니야는 이미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솔로몬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도니야가 왕이된 줄로 알았습니다. 심지어 솔로몬도 밧세바도 다 아도니야가 왕이 된 줄로 알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때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노쇠한 다윗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를 통해 솔로몬을 왕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람의 죄악된 본성에서 비롯되는 우둔한 안목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아도니야는 자신의 길을 계획했습니다. 다윗의 넷째 아들이자, 위의 형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그는 본인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에 불과합니다. 잠언 16장 9절의 말씀대로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그렇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아도니야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왕이 되지 못했다면,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단 뿔을 잡아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조용히 숨만 쉬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밤중에 자객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찾아와서 한탄합니다. 왕위는 원래 내 것이었는데, 온 이스라엘이 나를 향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죠.
이어서 17절 말씀을 보시면 아도니야의 방문 목적이 등장합니다. 17절 말씀 보세요.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아비삭이라는 여성은 열왕기상 1장 3절과 4절에서 등장하는데요.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비삭은 다윗의 품에 누웠던 마지막 여성으로 기록됩니다. 어떻게 보면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 여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아도니야의 요청을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전달하고, 솔로몬은 이 요청을 전해 듣고 극도로 분개합니다. 그리고 나서 군대 장관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보시는 분들은,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이 의아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긴 정치적인 명령 두 가지가 있었죠. 군대장관이었던 요압을 처단하는 것과 베냐민 사람 시므이를 처단하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다윗의 유언에 따른 일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의 경우에는 다윗의 유언과는 무관합니다. 어떻게 보면 살려줘도 크게 문제가 없을 수 있는 것이죠. 이미 솔로몬은 왕이 되었고, 아도니야가 살아있어 봐야 솔로몬의 왕위를 크게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살려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깊이 있게 보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굳이 죽여야만 했을까? 이런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이 부분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의 내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구약시대의 배경에 근거해서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왕이 살아있을 때 왕의 여인을 취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 됩니다. 심각한 중죄로 여겨지는 것이죠.
그리고 둘째로, 솔로몬은 이미 아도니야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소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르는 데 실패하고 나서 제단 뿔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장 52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솔로몬이 이르되 그가 만일 선한 사람일진대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이와 같이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목숨을 한번 살려주었습니다. 대신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한 가지 제한을 걸었습니다. 그가 선한 사람이면 그의 머리털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다.
솔로몬은 그가 아도니야를 향해 했던 말을 지켜냈습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죄악된 마음의 중심을 정확하게 판별한 결과 그를 처형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가서 아비삭을 요구한 것은 아비삭이 젊고 예쁜 여성이어서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왕권 계승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품었던 여성을 아내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이제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폐위시키고 본인이 왕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분명하나, 아도니야는 권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비삭을 아내로 취함으로써 왕에 상응하는 어떤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아비삭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아도니야의 요청은 솔로몬을 향해서 대놓고 반역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아비삭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 나서 아비삭을 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아내로 달라고 요청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이 맞습니다. 말만 한 것이 전부이죠. 그러나 솔로몬은 권력을 향한 아도니야의 죄악된 마음을 정확하게 분별해냈고, 아도니야의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지켜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도니야의 권력을 향한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도니야와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파국을 자초했던 아도니야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물론 아도니야는 순서상 본인이 왕위를 계승할 순번이었고,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몰랐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니 권력에 대한 욕심이나 야욕은 더 이상 품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아비삭을 취함으로써 권력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아도니야는 처형당하게 되었죠.
이러한 아도니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아닌 줄로 알고 멈춰야 합니다. 본인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는 태도는 신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믿고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착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를 놓치게 된다면, 어느 누구나 아도니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보다 본인의 뜻과 계획을 더욱 우선시 여기며,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과 형통케 하시는 은혜가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인생을 어디로 이끄는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잠잠히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를 드리며, 동행하시는 은혜만으로도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줄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인본주의 시대에 사람이 중심이며, 인생의 주인이 사람인 줄로 아는 이 시대에,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오니, 시대의 악한 기조로부터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으로 마친 뒤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함께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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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65)
솔로몬이 왕위를 견고히 하다(왕상 2:12-46)
다윗은 죽었고 솔로몬은 이제 홀로 남아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라고 2:12은 말함. 이는 삼하 7:11b-16을 암시. 여기에 쿤(견고하다)이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영원한 왕조를 보증하는 행동을 취하시는 세 번의 상황에 나타남(12,13,16절). 왕상 2:12-46에서는 같은 동사가 4회 등장함. 이 단락의 처음과 마지막(12, 45-46절), 그리고 가운데 부분(24절)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이전에 다윗을 위해 하셨던 일(삼하 5:12)을 솔로몬을 위해 하셨음(왕상 2:24). 하나님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음. 열왕기 저자는 동사 쿤에 기초해서 구조를 만들어냈음. 2:12-46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해야 함.
솔로몬은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겨우 왕좌에 올랐을 수 있음(1장). 실패한 쿠데타의 중심인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아량으로 인해 자유해졌음.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했듯, 깨어지기 쉬운 평안이 지속적인 화합이 되려면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이 인정사정없는 정치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름.
아도니야가 스스로 2:15에서 인정했듯, 하나님은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음. 솔로몬 왕권의 강화와 안정은 정적들의 파멸에 의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었으나(불가피한 처형)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안전은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음. 그는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단 4:25), 또한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시는”(단 2:21) 하나님에 의해 왕위를 잇도록 예정되어 있음. 이 단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든지 간에 이것은 (궁극적인) 현실임.
2:12-25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으나 어머니 밧세바가 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짐작하고 밧세바에게 요청함. 그의 요청은 아비삭임. 이 요청의 의미는 불분명함. 순수한 요청인가? 아니면 아도니야의 왕권 주장을 되살리기 위한 계산된 시도인가? 삼하 16:20-22은 왕의 후궁들과의 성관계는 왕권 주장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제시하는 듯하며, 아비삭이 엄밀히 말해 후궁은 아니었으나 다윗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었음.
이 요청에 대해 밧세바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 밧세바는 순진한 것인가? 아니면 이 요청을 솔로몬에게 전하면 아도니야가 죽게 될 것이고 자신과 솔로몬의 안전은 더욱 확실해질 것을 계산할 정도로 영리한 것인가? 이 모호함은 해결할 수 없지만, 만약 밧세바가 그런 계산을 한 것이었다면 그 계산은 매우 정확했음.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행동을 정확히 자신이 1:52에서 그에게 경고한 악으로 여기기로 작정함. 그는 아도니야의 요청을 1장에 나오는 음모의 부활로 해석하고 처형을 명함.
그리하여 솔로몬의 지혜의 첫 번째 희생자는 역설적이게도 다윗이 솔로몬에게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인물이며, 과거의 사건들이 지침이 된다면 다윗이 결코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을 인물임. 다윗은 아들들에 대해 엄정한 조치를 취하는 아버지는 아니었음. 그러나 솔로몬은 이전에 자신이 아도니야에게 베풀었던 관용은 실수였으며 그는 살려 두기에 너무 큰 위협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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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
2:13-18
솔로몬이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도니야는 어처구니 없는 요청을 함. 아도니야는 밧세바에게 자신이 화평한 목적으로 왔다고 말함. 그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해 가면서 왕의 어미니인 밧세바에게 온 이스라엘이 자신이 다윗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했음을 상기시킴. 아도니야는 다윗의 마지막 첩인 아비삭과 결혼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부탁함. 밧세바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솔로몬에게 그 요청을 전달하기만 함.
2:19-22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말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여 작은 청이라고 말한 다음, 내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간청함. 솔로몬은 그 요청을 듣고 분개하여 아도니야를 처형하기로 결심함. 웨셀리우스는 “솔로몬이 이것을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신호로 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함.
밧세바는 이후로 열왕기에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밧세바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음. 예컨대, 와이브레이는 밧세바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평가하며, 카일은 아도니야의 의도를 밧세바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믿음. 몽고메리는 아도니야의 사랑 문제에 여성스러운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고 결론지음.
하지만 밧세바는 어리석은 여자 치고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음. 그녀는 아들이 왕좌에 오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 밧세바가 아들의 최고 경쟁자의 사랑 문제에 여성스러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밧세바는 열왕기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여성임. 그녀는 나단과 협력하고, 아도니야의 의도를 폭로하며, 권력의 장에서 전반적으로 신중한 움직임을 보임. 그러므로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요청의 본질을 이해하고, 자기 아들에게 경쟁자의 어설픈 권력 놀이에 대해 신중하게 경고하는 것이 분명함.
2:23-25
솔로몬은 그의 군사 지도자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임. 아도니야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음. 그는 다윗의 마지막 첩을 원할 뿐 아니라, 솔로몬의 어머니에게 아들에게 말해 아비삭을 얻게 해 달라고 부탁함. 아이러니하게도 솔로몬은 타인의 충고를 슬기롭게 따르며 왕이 되는 반면, 솔로몬보다 더욱 활동적이었던 아도니야는 매번 실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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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주해 – 김진수 (pp.69)
이 단락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라는 관점에 의해 지배됨. 왕위계승권자 1순위인 아도니야 대신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다윗 언약의 중보자인 나단 선지자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이는 솔로몬의 왕위 계승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의미함. 그것은 또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에 따른 점이라는 점에서도 정당성을 얻음. 무엇보다도 저자가 솔로몬 왕국에 대해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왕상 2:12),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왕상 2:46)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에 상응하는 말씀임.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라고 약속하신 바 있음.
더 나아가 이 단락은 솔로몬의 등극과 더불어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가 지배하는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춤.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는 안식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 단락의 메시지임.
아도니야는 누구인가? 아도니야는 왕자들 중 가장 연장자로 압살롬에 비견되는 인물. 첫째 왕자 암논과 셋째 왕자 압살롬은 이미 죽었고, 둘째 왕자 길르압 또한 분명하지 않으나 단명한 것으로 보임(삼하 3:2-5). 아도니야는 압살롬처럼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한 때 압살롬이 그랬듯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인을 예비했음. 또한 군부핵심세력인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자기 편으로 끌여들였음. 그러나 선지자 나단을 비롯하여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 등은 이 움직임에 가담하지 않고 솔로몬 편에 섰음. 이런 편가름은 장차 펼쳐질 권력다툼을 예고하지만, 압살롬을 닮은 아도니아에게서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임.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고자 했음.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게 되는 근본적 원인이 됨. 왕의 권세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 신명기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을 규정함(신 17:15).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욕심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자의 미래는 밝을 수 없음. 그런 자는 결국 권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음.
하지만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관대한 처분으로 생명을 보존하였음. 그런데 그는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얻도록 솔로몬을 설득해달라고 밧세바에게 부탁함. 솔로몬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아도니야의 요구를 반역으로 간주하여 처형함. 솔로몬의 이런 판단과 결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약에서 왕의 여인을 취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므로 솔로몬의 판단은 타당한 것(삼하 3:7; 16:21-23). 또한 아도니야의 말을 보면 왕권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았다고 보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음. 왕권은 나의 것이었으며, 본인의 왕권을 빼앗겼다고 아쉬움을 표함. 또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비삭을 아내로 얻고자 하는 것.
아비삭이 비록 다윗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비삭은 다윗의 품에 누웠던 마지막 여자로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임. 아도니야가 그런 여인을 아내로 얻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왕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안을 다 강구한 인물이 아니었는가?
비록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왕으로 인정하며 그에게 허락을 구한 것은 사실이나, 그의 태도를 순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야심이 지닌 이중적 속성을 간과하는 순진한 태도가 아닌가?
또 밧세바는 어떠한가? 밧세바는 동정심이 많고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는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큼. 아도니야의 숨은 의도는 솔로몬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러야 했음. 그의 시도는 명백히 왕권에 대한 도전이자 솔로몬을 왕으로 택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었기 때문. 아도니야는 밧세바까지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 애쓰다가 죽은 욕망의 희생자임.
아도니야로부터 시작해서 시므이로 끝나는 심판의 이야기. 어떻게 보면 정치적 보복이자 정적 숙청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심판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왕상 2:12)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왕상 2:46b)와 같은 표현이 등장함. 놀랍게도 이 표현은 오래 전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함. 사무엘하 7:12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음. 이 사실로부터 독자들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솔로몬에게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발견하게 됨.
일생동안 여호와의 전쟁을 훌륭히 수행한 다윗의 시대가 지나가고 평화와 안식의 시대인 솔로몬의 시대가 시작되었음.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시대는 잔혹하고도 무서운 피의 심판과 더불어 시작되었음.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됨.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등진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실현되는 일은 결코 평화로운 모습만을 취할 수 없음. 또한 솔로몬이 저으이를 세우고 왕권을 견고히 세우는 과정에서 조차 과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솔로몬 왕권이 가진 한계를 미리 보여주며,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의를 종식시키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시킬 참된 왕의 도래를 고대하게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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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pp.178)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가 끈질기게 아비삭을 요구한 것은, 그가 젊은 처녀인 아비삭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솔로몬의 왕권 계승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음.
이스라엘 왕정사에서 후임 왕이 전임 왕의 후궁들이나 첩들을 소유할 수 있다는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근거가 있음.
스스로 파국을 자초했던 아도니야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그분의 역사와 섭리에 순종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올바른 신앙일 것.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저항하고 맞서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 그런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는 보증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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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거나 적어도 왕의 지위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 이 일은 대놓고 반역을 저질렀다기 보다는, 적어도 왕에 상응하는 어떤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도니야와 연루된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 시므이를 처리한 결과.
다윗이 임종 전에 당부한 대로 솔로몬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킨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