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9 양청] 82-83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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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된 내용 첫 번째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믿어야 할 것에 대해 1-38문까지 다루었다면, 두번째 파트인 39문에서 107문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다룬다. 우리는 지난 여름수련회를 통해 십계명을 생각했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일처럼 잊어버린건 아니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영원한 도덕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그 도덕법의 결정체가 바로 10계명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배웠으니 배운대로 10개명을 온전히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당연하다. 율법에 100% 순종하면 의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딜레마가 나온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도덕법, 10계명 배웠는데 이것을 지킬 수가 없다. 이것을 지켜야 의를 이뤄서 구원을 받는데, 지키지 못하니 너무나 참담하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런 주제의 흐름 속에서 이제 82-87문까지 믿음과 회개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82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어떤 사람도 타락 이래로 금생에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고,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계명들을 어깁니다.
83문. 법을 어긴 모든 죄가 똑같은 정도로 가증스럽습니까?
답. 어떤 죄들은 그 자체로, 그리고 몇 가지 악화의 요인 때문에 다른 죄들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스럽습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나도 쉽게 모든 죄가 똑같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죄라고 말하는데, 사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더 진노하시는 죄가 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율법주의이다. 욥의 친구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온갖 입으로 율법들을 쏟아내며 그를 정죄하였다. 누군가의 처한 환경과 상황을 보고, 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곧장 판단해버리고, “너가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된거야!” 욥의 세 친구였던 엘리바스, 빌닷, 소발 처럼 진짜 정 떨어지는 요소가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지. 앞에 서 있는 저도 목사라는 부르심을 받아서 살긴 하지만, 목사가 얼마나 정떨어지는 엘리바스와 소발과 빌닷의 자리에 서기가 쉬운가 보라. 얘네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너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니 자식들이 죽은 것이고, 너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으니 니 종들과 니 재산들이 싹 날아간거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율법이 우리에게서 유창하게 흘러나오기는 쉽다. 그런데 율법이 아니라 사실은 복음이 유창하게 흘러나와야 그 복음 안에서 사람들은 은혜와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는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유창하게 흘러나와야 된다.
우리가 18문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전적타락에 대해 배웠다. 전적 타락이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선행을 1도 할 수 없다 그런 얘기 아니다. 전적인 타락은 선행을 하나도 못한다 가 아니라 착한 일을 할 수는 있는데 우리의 모든 전 존재에 죄악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어서 절대적 순수한 의미에서의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훌륭한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죄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절대적 선의 원동력이 되어 나타나는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13문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노예의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부패한 사람의 의지는 더이상 자유 의지가 아니라 노예의 의지라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자유 의지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의지는 더이상 자유 의지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선을 행할 수도 있었고, 또한 자신의 의지로 악을 행할 수도 있던 자유를 가졌던 사람은 오직 아담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로 모든 인류는 조금 덜 나쁜 악을 행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나쁜 악을 행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노예 의지라고 불렀다. 노예의 의지란 노예가 선택할 수 있는 조건 속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유 의지로 오해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선을 행할지 악을 행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범죄한 아담 이후로 전적 타락과 부패가 이뤄진 우리는 이 죄를 지을지 저 죄를 지을지 선택하는 정도의 자유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분류했던 인간의 네 가지 상태, 기억나는가? 탈락 전의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는 상태였다. 오직 아담만이 해당한다. 부패하기 이전의 아담만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자였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어 부패한 이후에 모든 인간은 죄를 안 짓는 게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때부턴 뭐가 가능한가? 죄를 점점 멀리하고 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롭게 된 후에는 죄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탈락한 사람의 의지는 자유 의지가 아니고 노예의지다.
우리가 지난 여름에 10계명을 공부했는데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율법에는 세 가지 용도가 있다고 했다. 기억 안나도 좋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이 계속 가르치지. 첫째, 악을 억제하고 선을 권장하는 용도, 이것이 정치적인 용도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을 주고, 죄를 억제하는 것, 이것이 공권력의 기능 아닌가? 율법의 기능 둘째는, 몽학 선생으로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라 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내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이것이 율법의 두번째 기능이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더 나아가 이제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도덕법, 십계명 안에 녹아져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써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살 수 있을까, 이것을 율법이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율법을 상세히 읽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율법을 통해 죄를 발견하게 되고, 율법을 통해 더욱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의 용도가 세 가지가 있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82문은 지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사회에서 보기에 구제라던가 봉사라던가, 이러한 착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순수한 의미에서 율법의 순종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7:20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앞에 서 있는 저 역시도! 아담 이후로 자연적 출생법을 통해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완벽한 순종을 이룰 수 없다.
그렇기에 2번의 c를 보면, 성도들의 머리로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여 지키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가 믿고 있는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죽으러만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 죽으러 오셨지만, 또 다른 의미로 살기 위해 오셨다. 어떻게 살기 위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서. 첫 사람 아담은 넘어졌다. 분명 그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넘어졌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다. 아담이 뱀에게 유혹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주리신 후에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다. 그러나 말씀으로 이기신다. 아담보다 훨씬 더 극악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고, 또한 그분의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목숨을 다하셨고 마음을 다하셨고 뜻을 다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삶 33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을 순종하여 그 순종으로 의로움을 얻으신 분이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그 의로우심을 전가해주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의 죄를 주님께서 전가해 가신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것이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대표라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담의 범죄 아래 영향을 받아 죄인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순종하신 것 가운데 주님을 믿는 자들, 곧 신자들은 다 주님의 순종으로 얻으신 의의 영향을 받아 의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면 4번을 보라.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을 통해, 예수를 영접하여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었으며, 점점 더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수없이 넘어진다. 진짜 수도 없이 실패한다. 성도로서 우리의 삶이 늘 넘어지는 인생이기 때문에 지금와서 굳이 죄와 싸울 필요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뭐 맨날 넘어지는데 뭣하러 죄와 싸우는가? 싸워봐야 어차피 넘어질 것이 뻔한데. 그럼에도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한다. 죄를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행실에서 몰아내기 위해 싸워야 한다.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
보라. 더 큰죄가 있다고 했다. 겔8:15 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보다 더 큰 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더 큰 죄. 요일5:16-17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 보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 죄는 모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큰 죄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무서운 죄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 보면 이런 용서받지 못할 죄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다. 남색하는 자, 무당, 우상 점치는 자, 모두 어떻게 하라고 하셨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하셨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에 처해지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율법에. 하지만 모든 죄인들을 다 죽이라고 하시진 않았다.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극악한 죄악들이 있지만, 입힌 손해에 대해 배상을 해라는 식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명하시는 부분들도 있다. 대요리문답 151문에서 이것을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한다.
죄의 경중을 가리는 문제에서 첫째, 죄를 짓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말씀한다. 눅12:47-48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은혜를 떠나서 다시 죄를 선택한다면 그 사람의 죄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더 무겁다는 것이다.
솔로몬을 생각해보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던가? 그가 받은 은혜에 비해 이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등진 채로 살아갔던 것은 정말 심각한 죄였다. 이스라엘의 선왕이었던 다윗 역시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이 사람이 극악한 죄를 지은 것을 보면 이것도 굉장히 무거운 죄이다. 그래서 야고보 3장을 보면, “너희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말씀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생에게서부터 죄를 찾으실 것이니까. “너가 이렇게 가르쳤잖아!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못 사니?" 이런 의미에서 목사의 직분은 참 영광스러운 직분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자리이다.
또한 죄의 경중은 범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삼상2:25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제사장 엘리가 그 망나니같은 아들들, 그것도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겼고,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와 예식과 예물들을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롬2: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긍휼하시고 인자하셔서 즉각 심판을 안하신다. “응? 하나님 주무시나? 하나님은 내 죄를 못 보셨나? 하나님 살아계시기는 한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해치는 것이다.
또한 말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를 보면 특별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책망하시는데, 성도들이 하나님께 흠없는 귀한 제물을 가져오면 그것을 제사장들이 뒤로 빼돌리고 자신들이 흠많은, 눈 먼 희생제물들로 바꿔치기해서 중간에서 차익을 노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배를 망치고 있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대적하는 것이나 성령과 그 증거를 훼방하는 것이나, 권위자들을 대적하는 것이나, 친족과 연고자들을 대적하는 것이나,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이나, 연약한 형제들을 대적하는 것이나, 자신과 다른 영혼들을 죽이거나 많은 사람들의 공동 복리, 공동선을 대적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다음에 C를 보면, 죄질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크게 12종류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데, 첫째로, 율법 조항에 저촉되는 죄이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 하지 말라 하셨는데, 도둑질을 했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죄이다. 둘째로, 많은 계명을 범하거나 많은 죄악을 내포하는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수7:21 의 말씀은 아간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여리고성의 보물들을 마음대로 취하였지 않던가? 그것은 탐심을 비롯해서 도둑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온갖 죄악들이 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만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한다. 또한 넷째로 타인을 분개시키는 죄, 대표적으로 성경은 이혼을 말한다. 나쁜 유대인 남자들이 율법을 이용해서 여자에게 아무 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치 않으면 그냥 이혼을 시켜버려서 한 여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런 죄악들을 말한다.
또한 배상을 거부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한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으면 피해를 배상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데, 배상하기는커녕 배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양심의 확인을 받고도 범죄하는 경우, 로마서1장 말씀을 보면, 이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것을 안다. 성경에서 이런 죄악들 금하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알면서 죄를 짓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 또 공적, 사적 충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는 것. 더 심한 것은 교회의 권징을 받는 범죄를 지었음에도 여전히 죄를 지을 경우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가? 말씀으로 권면을 해도 안듣고, 몇몇이 찾아가 권면해도 안듣고, 결국 교회에서 치리를 해도 듣지 않는 경우 쫓아내라고 말씀한다. 천국백성에서 쫓겨나는 중죄이다.
또한 교회에서 우리의 기도, 목적, 약속에 저촉되는 범죄도 있다. 시편 78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때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그 회개가 아첨이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이번 화만 면하려고 아첨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들, 그리고 고의로 의지적으로 악독하게 행하는 범죄 그러니까 이거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범죄들을 말한다. 내가 너한테 반드시 복수할거야! 되갚아줄거야! 치밀하게 계획하고 꾸며서 범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완고하게 쾌락으로 행하는 범죄, 이것은 빈번하게 행하는 죄를 말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혹은 회개 후에 하는 죄. 진정한 회개를 했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회개하자마자 또 죄를 범하는 것 이런 죄질들이 더 큰 죄라고 말한다.
그다음에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서 죄의 경중이 나뉜다고 말씀한다. 주일에 짓는 죄. 물론 에스겔에서 얘기하는 건 안식일에 범죄하는 것들을 지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날인데 내가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예배 직전이나 직후의 범죄는 무엇인가?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받았으면 응당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기 마련인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니 예배전후로 죄를 짓는 것 아니겠는가? 세 번째, 공적인 자리나 사람들 면전에서 죄를 범하여 도발하고 더럽히는 경우이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렇게 했고, 압살롬이 왕위를 차지하고 나서 아버지가 왕궁에 남겨둔 후궁들을 백주에 모든 백성들 앞에서 범한 이런 죄악들을 가리켜 말한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생각해보건데, 하나님께서 물론 모든 죄를 다 미워하시나 특별히 미워하시는 죄, 특별히 중하게 여기시는 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살펴본 내용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적용이다. 첫째로, A번을 함께 읽어보자. “범죄하였을 때, 겸비함으로 회개하라!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실 기회를 찾으신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기를 즐겨하셔서 아주 작은 죄와 허물이라도 다 찾아내셔서 벌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한량없는 긍휼과 자비로 용서하고 싶어서 기다리시는 분이다.
여러분들은 아합 왕을 아실 것이다.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얻고 싶어 하다가 이세벨의 음모로 나봇을 거짓 모함해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자 아합이 두려워가지고 떨면서 겸비해진다. 자기가 정말 잘못했고 두려워 떠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너의 시대에는 내가 벌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한다. 물론 아합같이 악한 사람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살아있는 동안에 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정도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하시겠는가? 우리 하늘아버지는 지금 여러분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여러분,세상의 아버지 중에 어느 아버지가 “요놈 잘못하는 걸 찾아내 가지고서는 벌을 줘야지 넘어지나 안 넘어지나 보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나? 설령 큰 잘못을 했다손 치더라도 사랑하는 자녀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은 용서해주고 껴안아주는 게 아버지 아닌가? 두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짓는 죄들이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 했다. 그렇기에 우리가 범하는 죄악들이 더 큰 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엡4: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사람들끼리 살다보면 마찰이 일어나고 분을 내는 경우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분내는 것은 분내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데, 그걸 가지고 묵상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에 품고 이를 갈기 시작하면서 그다음 날까지 이어지고, 출근해서 그 사람 얼굴을 보니까 잠잠해졌던 마음이 또 요동쳐서 또 분을 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렇게 행하면 더 큰 죄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도 이 말씀을 가르치지만 얼마나 찔리는지. 셋째,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히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성경은 은혜받은 신자들에게 죄와 싸우라고 한다. 어느 지경까지 싸우라 하는가? 피 흘리기까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러분, 절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사막에서 주인이 텐트 치고 자고 있는데 사막 한밤이 어찌나 춥던지, 낙타가 주인에게 말한다. “주인님, 제가 너무 추워서 그런데 코만 집어넣고 자면 안 되겠냐” 그러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러라 했다. 그렇게 또 자나 싶었는데 또 어찌나 춥던지, 그래서 또 주인을 깨워서 말한다. “주인님, 진짜 너무 추워 그런데 머리만 텐트에 넣고 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머리를 넣고 자다가, 이후에는 그 큰 몸둥이까지 집어넣고, 결국 텐트가 비좁아 주인을 내쫓고 자기가 텐트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죄는 이렇게 들어오고 마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미 중생 곧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난 신자는 죄와 싸울 수 있다. 죄를 몰아낼 수 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령님 의지하여 날마다 죄와 싸워 거룩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계속 넘어지고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번째, 나의 연약함에 절망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내가 죄와 싸워 이기겠다고 수십 수백번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해도 그것만으로 죄와 싸워이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은혜가 필요한 것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은혜는 싸구려가 아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상태에 대한 절망,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수백번 넘어지고 실패하는 나의 연약함에 대한 절망. 이 절망이 우리의 회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이 절망이 곧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나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셔서 내 죄값을 갚으신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봄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게 되고, 그 과정들이 쌓이고 쌓이며 더욱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은혜를 받아야 죄와 싸울 힘이 생기지 나의 결심으로 되지 않는다. 은혜 가운데 더 낮아져야 하고 우리는 그 낮아짐 속에서 주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자.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소요리문답에 이제 구원론으로 저희들이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저희들인 것을 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은혜를 오늘도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매 순간 하루에도 수십 번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희망이 생기고 살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자기 결심과 의지의 노력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가져올 것은 교만함밖에 없사오니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로 이 배운 말씀 그대로 저희 삶에서 경험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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