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을 준비케 하시는 말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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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서론

지난 가상칠언에 이어서 이번 에바다는 십계명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아마도 12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달에 한 번씩 에바 찬양집회를 진행하고 있으니 방학까지 고려한다면 이번에 시작하는 십계명은 2024년 10월 정도에 끝이 날 예정입니다.정말 긴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상칠언도 8개월에 걸쳐서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십계명을 논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의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십계명을 배우기 이전에 그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통하여 과연 이 십계명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십계명을 알고 있습니까?
이 십계명을 넓게 설명하면 두 글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율법’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 ‘율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까?
많은 현대의 신자들은 이 율법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이 말씀 때문일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에서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율법 = 저주’라는 형식이 도출됩니다.
또는 에베소서 2:15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게 하는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땅에 신자들은 더 이상 저주인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법 아래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맞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와 에베소서가 말하는바 율법은 악한 것일까요?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이 땅에 신자들은 더 이상 구약에 등장하는 율법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십계명도 의미가 없는 것이며, 나아가 여러분들이 읽어도 도무지 그 뜻을 찾기 힘든 레위기와 같은 것들을 이해할 필요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주일학교가 탁월하기로 소문난 신창동교회의 주일학교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또는 신창동교회 주일학교의 선생님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십계명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십계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는 여전히 십계명을 배우고, 자주는 아니지만 레위기의 말씀들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까? 율법은 저주로 이끄는 것이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하여 졌는데 말입니다!

본론 1 (회심 준비교리)

우리가 여전히 율법인 십계명을 배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율법을 배우는 이유는 성도의 회심을 위한 ‘회심 준비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이 교리를 살펴보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바로 ‘회심’에 대해 알아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회심’을 알고 계십니까?
‘회심’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자들은 그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류가 아담을 시작으로 모든 인류가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범죄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 전체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이 누려 마땅한 영광을 인간의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도서 12:1)
예 맞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회심’은 매우 중요하며, 신자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회심’이란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심을 인식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본론2 (진정한 회심)

진정한 회심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난 많은 시간들 동안 저는 이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이 ‘회심’에 대하여 조국 교회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모태신앙입니다. 여러분들 사실 이 모태신항은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상급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과 회심에 관련하여 이 모태신앙은 한 영혼에게 그 어느 것도 담보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조국 교회 안에서 모태신앙이 무엇이라도 되는, 또는 상급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조국 교회가 ‘회심’에 대한 부분을 말하면서 마치 인간의 지적인 동의가 곧 ‘회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여러분들 저와 심방을 하셨지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심’하였는지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회심’을 물어보는 질문이 되는 것일까요?
내가 지적으로 우리 주님을 아는지 묻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는 질문은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을 넘어서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 것이며, 그 죽음으로 주어진 구원을 통해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지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심’은 단순히 지적인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아는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회심’이란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과 가치관이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춰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심자 = 바울

성경에서 이 ‘회심’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라고 말하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까지 찾아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 주님은 바울을 만나주셨고, 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걸어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바울의 회심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회심’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지적으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모든 삶이 창조주가 원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도, 고넬료와 빌립보 간수 역시도 회심의 역사가 있는 이후 그들의 삶은 창조주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입니다.

본론3 (준비란?)

사실 ‘회심 준비 교리’를 설명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준비’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미 다 아시는 것처럼 중생과 회심 즉, 구원에 관련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중생과 회심에 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께서 성취하신 일을 각 신자들에게 적용케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구원에 관련하여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회심’을 위해 준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심’에 관련해 인간이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제1 원인이 되시는 주님은 제2 원인이 되는 인간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면 앞선 설명을 이해하면 쉽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세아 10:12)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로 죄로 인해 굳어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심기 위하여 그 굳어진 땅을 기경 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여기서 말하는 ‘준비’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음을 주셔서 주님이 인간을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심 준비교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벗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행하는 행악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준비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길로 동참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묵은 마음을 기경시키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율법을 통한 방법입니다.

본론4 (초등교사)

드디어 본문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 ‘율법’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본문은 지금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선 서두에서 분명 조국 교회는 지금까지 ‘율법=저주’라는 공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성경을 읽으면 지금까지 조국 교회가 말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17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온전히 율법을 준행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에게 악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9-10에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선한 것을 주시는 선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누구에게서 온 것입니까?
바로 선하신 우리 성부께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찌 저주가 될 수 있으며, 성자께서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오히려 완전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해 졌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율법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의식법, 제의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하여 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숫양이나 비둘기를 잡아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법 즉, 십계명과 같은 규례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효력 있는 규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론5 (율법의 역할 : 죄인임을 알게하는 역할)

그렇다면 이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심방을 하면서 죄가 무엇인지 항상 묻습니다. 우리가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과연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왜 내가 죽을 만큼 끔찍한 죄인이라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평생을 받친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
사도 바울은 자신을 괴수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무엇이 그로 자신이 그냥 죄인이 아닌 괴수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과 비교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앞서 논한 것처럼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입으로만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우리 자신들은 전혀 죽을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우리 각자가 죽을 만큼 끔찍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자께서 베푸신 은혜를 이처럼 소홀히 여기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율법’ 더 정확히는 ‘십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피해 멀리 도망쳐, 하나님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우리들도 사실상 이 십계명의 원 의미를 깊이 상고하는 분들이 적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들에게 예시를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 예시(제1계명과 제8계명)

제 일 계명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여러분들 우상에 절하신 분 계십니까?
지금 찬양집회 오늘은 왠지 부처가 영험한 것 같아서 아침 일찍 절에 다녀오신 계십니까?
아니면 하늘이 너무 이뻐서 옥황상제께 제사를 지내고 오신 분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모두 이미 십계명의 일 계명을 지키셨네요!
그리고 다음으로 제 팔 계명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입니다.
나는 오늘 찬양집회에 오면서 모르는 사람의 핸드폰이 마음에 들어서 훔쳤다 하시는 분 계십니까? 없으시면 지금 여러분들은 이미 일 계명과 팔 계명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죄인은 아니십니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십계명이 말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로 이 십계명의 기록된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깊이 상고하겠지만 맛보기로 제 일 계명 같은 경우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 생각, 내 마음, 내 의지도 하나님 보다 앞서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인의 예화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과 같이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동생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힘써 일해서 첫 소산을 드디어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형인 가인이 화가 나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왜 일 계명과 연결되시는지 아십니까?
둘 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이건 성경이 입증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 가인은 자신이 열심을 내어 드린 이 제사가 당연히 하나님께 열납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마음과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보다 높아졌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압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가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 보다 탁월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보다 높아져 우리의 생각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할까요! 여러분들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의 영광과 그가 행하신 일로만 기뻐하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많은 생각들이 있고, 우리 각자의 생각들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대표적으로 저를 보시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윤전도사는 잘 생기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데 설교는 또 왜 이렇게 길어 대체 언제 끝나는거야!”
만약 정말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죄송합니다. 못생기고, 재미도 없고, 설교는 디립다 길서! 그러나 제 역할은 여러분을 만족시키고, 재미있게 만들어 드리며,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귀로나 여러분들을 즐겁게 하는게 제 역할이 아닙니다.
제 역할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주님의 공의로우시며, 완전하심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이 다 주님께 합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이 아닌 것에 그저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붙여놓고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더 정확히는 십계명을 살펴 그 정신을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 것부터 큰 것 모두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자인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 알게 됩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주님의 의로움에 다가설 수 없음을 인식하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의 그 의로우신 공로를 우리에게 부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격한 신자들은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자며 율법에는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히 들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바르게 드리는 자들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높으시고, 놀라우신 우리 주님을 우리와 동등한 그리고 그분의 뜻을 우리가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낮을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적절히 타협하며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악한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디 앞으로 십계명을 배우는 과정에서 이러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지 인식하시길 바겠습니다.

본론6

율법은 영원하시며, 완전하시며, 거짓이 없으신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혼에 밝은 빛을 비추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추악하며, 하나님의 법에서 멀리 떠나 죄악 가운데 찌든 괴수임을 알게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율법을 통하여 그 두려움 너머에 밝은 은혜의 빛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이 십계명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의 깊은 죄악을 돌아보아 성령의 조명하심과 은혜로 이끄시는 섭리 안에서 진정한 ‘회심’으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히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오늘은 여러분들과 ‘회심 준비교리’와 아울러 율법을 통해 여전히 우리의 죄악됨을 인식하게 하므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성자를 바라보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께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에바다는 앞으로 긴 시간을 통해 그 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그리고 공의로써 엄위하게 말씀하시는 그의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며, 감격과 은혜와 사랑으로 그 말씀에 합당히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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