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권능을 발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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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17장 14-20절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막 9:14-29; 눅 9:37-43 상〕
본문말씀: 마태복음 17장 14-20절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막 9:14-29; 눅 9:37-43 상〕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14~20, 개역난외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개역난외주)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눅 9:40~41, 개역난외주)
말씀제목: '주님의 권능을 발하는 인생' | 피스풀침례교회 | 박재룡 담임목사 | 주일설교 9-10-2023
말씀제목: '주님의 권능을 발하는 인생' | 피스풀침례교회 | 박재룡 담임목사 | 주일설교 9-10-2023
말씀선포: 박재룡_담임목사
지난주에…
뱃세다의 소경을 통해서 반쪽의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인트로]
[인트로]
오늘은 예수님의 치유사건 열일곱번째로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스토리]
[스토리]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의 1절에서 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아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헬몬산에 기도하기위해 오르십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하얗게 변형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광경을 베드로와 제자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졸다가 깬 베드로는 그 광경이 너무 놀랍고 좋아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살면 좋겠습니다.”라고 할 때 하늘로 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고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산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일행이 내려오니 산 아래에서 예수님을 찾으며 기다리고 있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반가이 맞았습니다. 이 무리들은 자기들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을 기다리던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 질러 간청을 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과 함께 병행으로 기록된 누가복음을 보면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누가복음 9장 38-39절)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마태와 마가는 간질이라고 표현하고 누가는 귀신들린 외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이 아들의 상태를 마태나 마가나 누가의 기록을 통해 종합해 보면 귀신이 들렸고 외아들이고 귀먹은 벙어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아비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가닥의 희망과 기대를 품고 아들의 치료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산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홉의 제자들)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기도하기 위해 가셨고 산 아래에는 나머지 9명의 제자만이 있었습니다. 이 아비는 이 아홉 제자들에게 자기 아들에게 들어가 있는 귀신을 내어쫓아 주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아홉 제자들은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를 못합니다. 적잖은 실망감을 그 아비는 느끼고 제자들 역시 의아해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한것에 대해 의아해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태는 이렇게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권능이 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 아들을 붙잡고 있는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한 것입니다. 소문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이 아비는 적잖은 실망을 하고 또 제자들 역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왜 치유하지 못한 것일까요? 왜 능력이 발휘되지 않은걸까요? 우리도 궁금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궁금해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19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적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9장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제자들이 권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믿음이 적고 기도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기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권능을 발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고 기도가 없어서 그런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것과 기도가 없음을 생각해 보면 믿음과 기도는 상당한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권능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기도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표현이고 표시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능히 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하늘의 큰 권능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에 하늘의 권능을 허락하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20절을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믿음의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그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권능의 이유인데 그런 믿음의 기도를 하지 않고 그냥 입으로만 중언부언의 기도만 하는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삶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나요? 어떤가요?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느낄때 한번쯤은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정말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나요?
[교훈과 적용]
[교훈과 적용]
귀신들을 쫓아낼 권능을 제자들은 받았지만 지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내 쫓아내지 못한것을 믿음의 기도가 없어서 권능을 발하지 못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없었다는 말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을 하면 믿음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불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정말 주목해 봐야할 말입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어떤 사본에는 믿음이 부족함으로 표현하고 어떤 사본은 믿음이 없음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의 ‘믿음이 적다'는 표현은 그들의 믿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17절 말씀을 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며 예수님의 책망하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부재를 정확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믿음이 겨자씨만하게 작다하여도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음이 결핍된 믿지 않는 불신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미하게 보여도 그 안에 복음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그 안에 큰 나무로 자랄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수한 변화를 일으켜 마침내 큰 나무처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도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마침내 창대하게 변화되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겨자씨는 또 천국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많고 적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있고 없음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우리가 볼 때, 보잘 것 없고 신통치 않아 보여도 그렇게 작아도 그 안에는 진정한 생명력을 가진 살아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믿음이 미미하고 작아도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큰 일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실제로 산을 이동시키는 능력이나 기적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큰 일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산과 같이 거대한 장애물도 정복하고 넘어 설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우리안에 있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의 삶가운데 쓰러지고 넘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결핍은 믿음 없음이 아니고 불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은 사탄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작은 믿음마저도 빼앗아 가는 마귀의 계괴를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빼앗긴 자리에 불신이라는 것이 자리잡으면 바로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말을 오늘 본문과 함께 생각하면 이렇게 표현할수 있을듯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작은 믿음마저도 빼앗으려 늘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작은 그 겨자씨만한 믿음마저 빼앗아 불신으로 대처하는 사단의 그 궤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작은 것 하나 지키지 못할만큼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족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늘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 그 귀신의 앞잡이 사탄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탄을 대적하려면 오직 겨자씨 만한 믿음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기도로 주님의 권능이 우리 삶가운데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자 그렇다면 그런 겨자씨만한 믿음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로마서 10장 17절의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바울은 믿음이 말씀으로 부터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삶의 순간마다 호시탐탐 우리의 믿음을 노리는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 살면서 하루에도 수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오만때만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그 많은 생각중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이 주는 생각이고 어떤 생각이 사탄이 주는 생각일까요? 제가 구분법을 알려 드릴께요!
생각은 순수 우리말입니다. 한문이 아니고요 순수 한글인데 사전의 정의를 보면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중에 무엇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무엇이 사탄의 생각일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생각! 사탄이 주는 것은 사각!이라고 어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인것 같습니다.
살아지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고 죽어지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사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룟유다! 그 가룟 유다에게 넣어준 생각이 바로 사탄이 넣어준 사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생각이 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그 생각이 살아지는 생각인지 죽어지는 생각인지. 살아나는 생각이면 하나님께서 주는 생각이고 죽어가는 생각이면 사탄이 주는 사각인 것입니다.
내게 들어오는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는 말씀에 비추면 또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말씀에 비추어 흠이 없고 부딪히는 것이 없다면 그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걸리고 부딪히면 사각인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생각이 부딪히는지 걸리는지를 모르기에 우리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탄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부터 믿음이 생겨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키고 그 믿음의 생각이 우리의 믿음의 기도가 되어 우리를 사탄으로 부터 지켜내는 권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늘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살아있는 생각을 주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할 때 바로 주님의 권능이 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권능을 발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