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8:18-20 잘못(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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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잘못된 오해

혹시 지난 시간에 잘못된 해석에 대한 첫 번째 성경 구절이 어디었는지 기억이 나실까요? 주 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6:11) 의 말씀을 근거해서 다뤘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고 이렇게 이방인과 같이 자신의 필요를 따라 구하는 기도를 하는 자의 ‘믿음’은 4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결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일용할 양식’의 배경은 우리가 자주 살피는 구약의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와 매일같이 내리는 ‘만나’에 대한 배경을 갖고 ‘하나님께서 먹이심’을 통해 먹고 마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통해 우리를 날마다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라는 맥락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쩌면 가장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두 세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된다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듯하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슈 450
논지
소주제1 - 성경의 말씀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1. 마18:15-17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하필이면 잘못한 성도에 대한 다음에 나온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따아서 두 세사람이 땅에서 합심한다는 내용은 기도에 대한 내용이 아닌 잘못된 성도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보다 앞서 마18:12-14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은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까지 연결하면 더더욱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야 합니다. 18장 시작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의 내용으로 본다면 나다나엘과 같이 그의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분으로 니고데모의 마음도 아셨을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그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보여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죠. 마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라고 말하면서 아이가 ‘자기를 낮추는(4절), 어린아이같은 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5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이라면 ‘작은 자’ 곧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없신 여기지 않는 자라는 것이고 이러한 구성원이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에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만약 실족케 한다면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트려지는 것이 나’은(6절) 정도이니 그만큼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고(7절) 그래서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3. 그렇게 이어지는 비유가 ‘잃은 양 비유’입니다. 따라서 맥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잃은 양 한 마리도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교회가 잃은 양에 대해서 말할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할 때가 많지만 문맥에서 보면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실족한 사람, 길을 잃은 영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18:14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와같이 라고 했으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으로 보면 됩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주제 2 - 교회는 책망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가장 힘든 것이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 교사의 죽음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교사권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범위에서는 교사가 올바로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인데 이를 깊이보면 잘못한 것을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올바르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가 갖는 일종의 합의된 규범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주 살펴보는 구약의 출애굽기는 2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애굽을 탈출했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생활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규범을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규범이 율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했으니 오늘 본문의 맥막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죄를 범하는 것보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작은 자’로 잃어 버리면 안되는 이들인데 ‘죄를 범하면’ 최우선적으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2.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지적 받는 것’을 싫어 합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제는 ‘선생’이라고 불리는 공식적인 직업을 가진 ‘교사’들도 할 수 없게 된 세상입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죠.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부모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렇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한다면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관계였다가도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결국은 서로가 이 세상에서 모른 체하고 살게 되거나 심하면 서로 법적인 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최근의 죽음에 이른 교사 역시 그 부모가 아주 오랜시간 동안을 괴롭힌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누구 하나를 잃어 버리는 것을 피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자신이 상대’해서 말하고 ‘증인을 데리고 가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말’해서 절차를 거쳐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교회가 책망하는 것이고 이것을 ‘권징’이라고 표현합니다.
‌3. 문제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징 까지 일어나는 것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나 누가 보아도 잘못한 것으로 보이는대도 끝까지 버티면서 고집을 피우거나 법적인 분쟁까지도 불사해서 상황을 피하거나 오히려 상대를 이기려는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피치못한 상황은 세상에서는 법정이라는 곳을 통해서 판결하려 하지만 어디 올바른 판단이 내려진 적이 몇번이나 있는지 억울한 일만 발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비록 작은 자 하나를 아끼시고 주의해야 하지만 그러한 방법 곧 ‘자신이 먼저 말하고’, 증인을 데리고 가서’ 말하고,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최종적으로 듣지 않아서 교회에서 내어보내는 일을 인정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소주제3 두 세 사람의 권징이 소수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정하십니다. ‌1. 그래서 먼저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시 말해 교회에 말했음에도 듣지 않아 공동체 곧 교회가 그렇게 행하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최근의 사건을 다시 말씀드리면 법의 취지가 훼손되고 법을 악용합니다. 아동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반드시 신고를 해야하는데 오히려 선생님을 아동의 피해자로 신고함으로써 정당한 교육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랜 시간동안 법적인 다툼에 휘말리도록 의도적으로 법을 이용해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율법 역시 오랜 시간동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새롭게 해석하고 전통을 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래전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를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열쇠에 대한 이해를 “거룩한 복음의 말씀과 교회의 권징 이 두가지를 통해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 닫힌다’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2. 이를 이해할 때 요한복음에서 1장 세례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이 열쇠의 역할을 하죠. 3장에서 니고데모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부분이며 지난주 세례 요한은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게 되는 것이죠. 교회는 말씀과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말로 책망하고 그래서 감정이 상하고 서로가 미워하는 방향을 갖는 다면 이것은 올바른 권징의 시행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요한복음 후반부에 ‘미움’이야 말로 사단이 사용하는 고단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말슴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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