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하나님 나라 백성을 부르시다 (마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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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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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헌금 :
예배를 위하여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우리의 피난처요 보호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인정하며, 봉헌합니다. 건강도, 물질도, 시간도, 주님의 허락없이는 하나도 허락되지 않사오니,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찬양 : 이것이 영원한 삶
본문 : 마 4:1-25 (12-22)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볼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깨 베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시험이 끝나도,
또 시험이 시작되는데,
이제는 마귀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시험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결국 죽으시는데,
이는,
왕의 전령,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인데,
12절을 보니까,
요한에 투옥되었다.
감옥에 갇혔다.
선량한 요한이 감옥에 갇혀야 했던 것을 보면,
그 당시 정치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독재적이었는가,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요한이 헤롯 안디바를 비판했는데,
뭐냐?
왕이 되어가지고,
동생의 아내를 가로채서,
자신의 아내로 삼는 것은,
추악한 범죄다.
라고 비판을 했더니,
정치적 위기를 느낀 왕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감금해버린 것이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그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감옥에 가두는 행위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헤롯 안디바가 대표적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그 말씀에 변화되기를 싫어하는 것은,
마치 말씀을 억지로 감옥에 가두려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데,
말씀은 살아 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가두고 잡아둔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우리는 심판을 받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우리는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말씀을 감옥에 가두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세례 요한이 붙잡혀서 투옥되고,
결국에 처형되는 이 일련의 사건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례 요한처럼 투옥될 것이고, 결국에는 처형당하시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예고편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험이 끝나도,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닌 것이,
언제나 사탄이 다스리는 시대에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를 대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대적당하는 것이 대하여, 놀라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마귀의 때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것이고,
말씀을 대적할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
하나님이 중심이 된 세상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활동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시험 앞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승리하셨듯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7절을 보니까,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전파하다 라는 단어는, 설교라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도, 목이 잘려 죽어도,
사역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
이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어지는 것이죠.
특별히 이 사역은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12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힘으로 대항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배척하는 자들을
피하십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3번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번째, 유월절에 올라가시고,
두 번째 올라가시고,
마지막 세 번째로 올라가셔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발당해서,
억울하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포기하신 적은 없었지만,
예루살렘을 주요 사역지로 선택할 수는 없었는데,
워낙 배척이 심하고,
비판이 심하고,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설교 사역을 할 수가 없어서,
3차례 올라가시기는 했지만, 주 사역지는 갈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3절을 보니까,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당했는데,
나사렛이
예수님 고향인데,
거기를 떠났다,
떠났다 라는 단어는,
‘버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버린 것이죠.
얼마나 배척이 심했는데,
누가복음에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는,
예수님을 마을 절벽으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고향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이 심했고,
그런 고향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죠.
그러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에 있는 이방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했고,
움직였기에,
예수님은 그 사역지를 주요 무대로 삼으셨던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말씀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양수업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은, 죄의 대가인 죽음,
그것도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영양가 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요리 수업이 아니고,
생명과 죽음,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는,
진리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돈이 있어야 산다.
돈이 제일이다 라고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그 말씀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자세로,
그 말씀을 듣고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자는,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 있더라도,
그 영혼이 살아나고, 회복되게 되는 것인데,
15절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이방의 갈릴리 지역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디를 멸시하는지 모르겠는데,
진짜 천박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러니까,
혼혈족도 이런 혼혈족이 없는데,
온갖 외세의 침략을 다 당하다보니까,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갈릴리 지역은,
말 그대로 이방의 갈릴리다.
유대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천국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다.
라고 까지 이야기할만큼 천박한 땅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땅이 무엇이 임합니까?
말씀에 반응하는,
빛이 임한 것입니다.
15-16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길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구약 성경에서 빛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의미할 때가 많은데,
창세기, 1장에서
어둠이 수면 위에 가득 깔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면서,
빛이 있으라 라고 하십니다.
빛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
구원 역사를 상징하는 단어인데,
반대로 어둠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
구원받지 못한 상태,
등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갈릴리 지역,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어둠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는데,
말씀에 반응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큰 빛을 보게 되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유대인만을 위한 왕으로 가두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방인들,
이방의 갈릴리,
유대인들이 아닌, 천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이었던 나사렛을 떠나,
이방의 갈릴리를 하나님 나라를 건국하는 수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은 설교사역만 하신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제자를 양육하는
제자 사역도 시작하셨는데,
18절부터 22절까지를 보시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은,
제자훈련이 핵심인데,
나와 같은 한 사람을 세워서,
그 사람이, 또 나와 같은 한 사람을 세워나가도록 돕는 것,
이것이 제자 사역인 것입니다.
나는 과연,
나와 같은 또 한 사람을 세울 수 있는가?
나는 나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이,
제자로 부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인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것이어서,
마태복음, 28장 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곳곳마다,
주의 제자들이 서 있어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 얼굴 비추는 장소로 변질되어서,
내가 평소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께 구원받아,
복음을 영접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채,
일주일에 한번 얼굴 비추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세대, 다음 세대 하는 것 역시,
다음 세대를 제자로 삼는 사역인 것이고,
복음 전도, 복음 전도, 성장반, 제자훈련,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된 우리가,
또다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의하는 과정이 모두,
성장반이고, 제자훈련이고,
모든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사명인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번 나아와서 예배 한번 드리면, 내가 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4명의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직업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고,
또, 이들의 반응은 충격적이고도 놀랍습니다.
18절을 보세요.
“갈릴리 해변에 다니사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직업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물론 어부라는 직업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랍비 교육,
제자 교육을 시키려면,
대단한 학식이 있는, 그런 사람을 불러다가 시켜야지, 물고기 잡아서 먹고 사는 베드로와 안드레 같은 사람을 불러서 뭐에다가 쓰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사역은 학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학식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
이런 가슴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던지고 사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을 부르십니다.
19절을 보세요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사니”
내가 너희를 사람의 어부,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낚아채서, 하나님께 갖다 드리는,
사람의 어부가 되게 하겠다.
너 내 제자가 되어라.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사가, 선지자 엘리야의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제쳐두고, 따라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리가고 한 사람을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되어 있고,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든 것을 제쳐두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데려감을 받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지만,
두 사람이 똑같이, 일하고 있고,
공부하고 있고,
직장생활하고 있고,
생업을 감당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이 언제 오시나? 언제나 나를 부르시려나? 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데려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는, 이들의 반응을 ‘즉시’라는 단어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20절인데,
“그들이 곧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22절에,
그들이 곧 즉시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급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
이 자세,
이것이 제자의 자세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반응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자 훈련받는다고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자 훈련은 다 받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형식적인 껍데기 신앙인은 아닌가?
물어봐야 합니다.
교회 왔다갔다 하는 것도 은혜에요.
제가 전도하고 사람들 세워도 보고 해보니까,
정말 교회 왔다갔다 하는 것도 은혜더라고요.
그런데요 여러분.
성경은,
교회 왔다갔다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믿음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더더욱 빚진 자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내가 죄를 갚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제자인 것이죠.
(같이 찬양합시다.)
이것이 영원한 삶.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때론 희망의 메시지로,
때론 아픔과 고난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얼마나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찬양합시다.
(기도합시다)
우리는 누군가를 닮아가고, 따라가고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냐, 세상이냐의 차이에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하나님, 이 시간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은혜를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영원하고, 세상을 따르는 삶이 일시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더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주님, 주님을 의지하오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 시대가 정말 어둡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이방의 갈릴리처럼, 흑암에 앉은, 사망과 죽음의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시는 줄 믿사오니,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 청년부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은혜가 있도록, 복음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무지하여 빛이 아니라 흑암을 따르고,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걸어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임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시적이고 헛된 것에 얽매여 우리 인생을 낭비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도록 우리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모여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일상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바르게 예배함으로 삶에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저와 모든 청년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번역
12 그가 들었다, 요한이 파라디도미(부과 수동 / 배반하다, 내어주다, 잡히다, 넘겨지다)된 것을. 그가 아나코레오(돌아가다, 떠나가다, 물러가다)하였다, 갈릴리로
아나코레오 : 어떤 장소에서 다른 방향으로 멀리 움직이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사 χωρέω는 호메로스에서 12번 등장하는데, 항상 "공간을 만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이는 종종 (전투에서) 땅을 내주거나 심지어 철수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양보하고, 내어주며, 그들에게 공간을 내어주었습니다.
παραδίδωμι는 신약에서 거의 120회 등장하지만, 그 중 90회 이상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발견됩니다( 마태복음에서만 31회). 동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허락하거나, 맡기거나, 전달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예: 마 11:27 par.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25:20 [금을소작인에게 맡기셨다], 눅 4:6 [사탄에게 권세를 주셨다], 고전 15:24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께 넘기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칭찬(행 14:26, 15:40) 등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용도는 사람을 권위자나 심판에 넘기는 부정적인 의미와 가르침을 전달하는 긍정적인(또는 중립적인)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παραδίδωμι의 가장 빈번한 의미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이 인도되었다는 진술(마 4:12)은 그가 투옥되어 처형된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는 재판관에게 인도하고(마 5:25), 재판관은 장교에게 인도합니다(눅 12:58). 예수의 추종자들은 공회(마 10:17)와 회당(눅 21:12)에 인도되어 억압과 순교를 당합니다(마 24:9). 신자들은 가족에 의해 죽음으로 인도될 것입니다(막 13:12). 회심하기 전,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행 8:3, 22:4, 베드로의 체포, 12:4 참조 ).
13 그리고 나자라(나사렛)을 카탈레이포(떠나다, 남겨두다, 버려두다)하였다, 가서 그가 살았다, 가버나움에, 해변에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 경계 구역(행정구역)에,
카타레이포 : 떠나다, 버려두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고향 땅을 버렸습니다.
이 단어는 종종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떠나서(예: 마 16:4, 행 18:19, 때로는 죽어서, 막 12:19, 21[ 19-20, 22절의 ἀφίημι G918참조 ]) 사람들과 헤어질 때 사용되지만, 장소를 떠날 때(예: 마 4:13)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건을 두고 떠나는 것(예: 막 14:52 [옷]; 눅 5:28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거나 포기하다
[묵상] 제자들도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예수님도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을 버려두고 떠났다.
예수님은 ‘주소 변경’ 신청하였다.
스불론과 납달리 행정구역의
해변의 가버나움, 거기서 살았다.
벳새다를 포함하는 빌립의 영토와 초라진을 포함하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 사이의 경계에 있었으며 통행료소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9:9) 및 군 주둔지(북쪽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비 유대인 백부장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 (마 4:13)으로 가셨고, 그곳이 그의 집이 되었습니다(ἡ ἰδία πόλις, 9:1). 그곳에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막 1:21 , 참조 눅 4:31, 요 6:59), 그곳에 "집으로" 오가셨으며(막 1:29, 2:1, 9 : 33, Matt 17:24f., 참조 요 2 : 12, 6:17, 24), 그곳에서 큰 일을 행하셨고(눅 4:23, 참조 마 11:20) 그럼에도 불신으로 인해 도시를 저주하셨습니다(마 11:23 , 참조 눅 10:15).
예수님 탄생 당시 갈릴리는 헤롯 1세( 주전 37-4년)의 통치하에 있던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과 유언에 따르면 갈릴리는 페레아와 함께 헤롯 안티파()에게,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르켈라오에게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가 갈릴리로 이주한 근거가 되었습니다(2:22). 한때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렸던 이 지역은 예수님 당시에는 유망한고리 땅이었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점령 끝에 유대인들이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갈릴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열심당원들의 유대 민족 운동의 온상이 되었으며, 예루살렘 함락(서 기 70년) 이후에는 유대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4 그것은 성취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플레로오 : 성취하다, 가득 채우다
때때로 선지자의 이름이 성경으로 인용 된 단어 ( 마 3:3; 4:14; 8:17; 12:17; 13:14, 35[v.l . ]; 15:7; 막 1:2; 7:6; 눅 3 : 4; 4:1 7; 요 1:23; 12:38-39, 41; 행 8:28, 30; 28:25; 롬 9:27, 29; 10:16, 20; 15:12; 마 2:17의 예레미야; 27:9; 참조: 16:14; 대하 36:21). 때로는 단순히 "예언자"를 지칭하기도 합니다(마 1:22, 2:5, 1 5, 21:4). 마태는 전치사 διά G1328 ("선지자를 통해", 10×)을 사용하여 예언 활동을 종속적인 활동으로 명시적으로 특징지었습니다. 성경과 그 뒤에 있는 구절과 마태의 진정한 저자는 하나님 자신입니다(여기서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 [ ὑπό G5679] 말씀하신 것"( 마 1:22; 2:15)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세요) . 다시 손(행 3:18)을 선언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친히 이루셨다.”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 요단 건너편, 갈릴리여, 이방인들의
해변 길은 예수님이 사시는 지역이다.
이방인들의 갈릴리여,
16 어둠(스코티아)에 주저앉은(카쎄마이 / 앉다, 거하다, 앉았다) 백성들이 거대한(메가스) 빛(포스)을 보았다, 그리고 주저앉은(카쎄마이) 자들에게, 땅과 그늘, 죽음의. 빛이 그들에게 마나텔로(떠오르다, 돋다)하였다.
어둠에 앉은 백성들 = 죽음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
거대한 빛을 보았다 / 빛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경우, 의 λαός는 민족적, 문화적 및/또는 정치적 정체성으로 결합된 다수의 인간을 지칭할 때 영어의 people과 거의 일치하며, 따라서 종종 "국가"를 의미합니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불확실하게 주위를 더듬습니다(플라톤 파이돈 99b).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둠은 "객관적인 위험과 주관적인 불안의 영역"으로 나타납니다(H. Conzelmann, TDNT 7:424).
어둠은 태초의 바다 또는 혼돈과 관련하여 처음 언급됩니다(창 1:2).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모두 창조하십니다(사 45:7). 그분은 낮이 밤을 따르게 하십니다(시 104:20[103:20], 아모스 5:8, 창 1:4-5, 18 참조 ). 애굽에 어둠을 보내셨을 때처럼 구원 활동에서 어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출 10:22, 시 105:28[104:28]).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헬라어 세계에서 어둠은 "생명에 대한 위협, 나에게 나쁜 것, 도덕적 악의 의미에서 해롭거나 악한 모든 범위, 즉 치명적인 것"을 묘사합니다(TDNT 7:428). 따라서 구약에서는 어둠을 제한, 구속, 고통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사 9:1). 인류는본질적으로 이 영역을 갈망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땅을 바라보며 고통과 어둠과 두려운 어둠만 보게 될 것이며, 완전한 어둠 속으로 밀려날 것입니다."(8:22; 참조, 60:2). 여기서 어둠이라는 용어는 주로 신학적 고려의 영향을 받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빛이 비추지 않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면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시 107:10-11[106:10]).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어둠을 비추십니다.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다니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시 23:4 [22:4], 참조: 112:4 [111:4], 사 50:10, 미 7:8).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않으며(시 139:11-12[138:11-12]), 그분의 인도를 받는 자에게도 어둠은 어둡지 않습니다( 사 42:7, 16; 49:9참조 ).
σκότος와 σκοτεινός라는 용어는 선한 눈/악한 눈과 빛 또는 어둠으로 가득 찬 몸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악과 명시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마 6:22-23 , 눅 11:34-36,
구속받지 못한 인간은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마 4:16, 이사야 인용). 그들은 죽음의 어둠을 피할 수 없습니다(눅 1:79, θάνατος G2505 참조).
17 이 때로부터 예수께서 아르코(시작하다, 다스리다)하셨다, 설교하기(케륏쏘 / 선포하다, 가르치다), 그리고 이르시되, 너희는 회개하라(메타노에오 / 명령), 그 하늘들의 그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하늘들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아르코:
어원은 "시작하다, 첫 번째가 되다, 시작을 하다"라는 시간적 의미였으나자연스럽게 "서열에서 첫 번째가 되다, 지도자가 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명사 ἀρχή developed 헬라어 철학에서 특별한 의미: (a)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나타내며, 그 끝은 처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시작하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 완전한 모습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정해진 때가 '성취되었다'"(R. A. Guelich, Mark 1-8:26 [1989], 44).
ασιλεύς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지상의 왕에게 적용됩니다: 파라오(행 7:10, 히 11:23, 27), 헤롯 대왕(마 2:1-18, 눅 1:5), 헤롯 안티파스(마 14:8),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1, 20),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5:13-14 외.), 나바테안 아레타스(고후 11:32), 로마 황제(딤전 2:2, 벧전 2:13, 계 17:9-18) 등이 해당됩니다. 이러한 통치자들은 "땅의 왕"(마 17:25, 행 4:26, 계 1:5, 6:15), "게의 왕"(눅 22:25) 또는 "온 세상의 왕"(계 16:14, 참조. 시 2:2, 89:27, TDNT 1:576-77 참조)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왕들을 손에 든 지팡이로 사용하셔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시며, 그들이 순종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계 17:2-14; 19:18-21; 21:24).
18 걸으시다가, 갈릴리 바다 옆을, 그가 형제 둘을 보았다, 베드로라 말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아스를, 그들이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바다에. 왜냐하면 그들이 어부이기 때문이다(에이미 / 미완료)
ἀδελφός라는 용어는 어원적으로 "같은 자궁에서"(δελφύς, "자궁", 접두사 알파가 붙어서 통일성 또는 연결의 표시로 사용됨)라는 뜻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로 육체적 의미에서 "형제"라는 명사로 사용되며, 이와 유사하게 ἀδελφή는 단순히 "자매"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
δελφός를 더 확장하여 공통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남성및 여성)을 포함하는 것은 동양의 영향을 받아 처음 도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19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듀테(오라, 따르라) 나의 뒤를(오피소 / 다음, 뒤, 후에). 그리고 내가 만들 것이다(미래), 너희를, 사람들의 어부들로.
듀테,
나의 뒤를
나의 다음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가 되어라.
다음 세대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δεῦτε 데우테 (오다) 여기, (오다) 켜다(imv.)* *.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뒤에 오는 동사 또는 가정법과 함께 격려의 입자로 나타납니다(막 12:7 par. 마 21:38/누가20:14 v .l.; 마 28:6, 참조. 막 4:29; 21:12; 계 19:17). 또한 절대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막 1:17 par. 마 4:19; 막 6:31; 마 11:28; 22:4; 25:34).
신약 1 명사 ἄνθρωπος는 신약 전체에서 약 550회 등장합니다. 여기에서도 이 용어는 한편으로는 동물(예: 마 12:12, 1 C또는 15:39)과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예: 마 10:32, 요 10:33)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20 즉시(유세오스), 그들이 아피에미(허락하다, 떠나다, 버려두다)하였다, 그 그물들을. 그들이 그를 따랐다(아콜루쎄오 / 따르다, 뒤좇다).
그들이 따랐다, 그를
신약 1 동사 ἀφίημι는 신약에서 140회 이상( ) 나오지만 대부분 복음서(마태 47회, 마가 34회, 누가 31회, 요한 15회)에서 발견되며, "용서하다"라는 의미는 공관복음 참조의 약 1/3( ) 에서 나옵니다.
21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나아가셨다, 그가 보셨다, 다른 두 형제, 세베대의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배에서 세배대와 함께, 그의 아버지, 카타르티조(준비하다, 깁다, 온전하게 하다, 회복하다)하는 것을, 그들의 그물(딕튀온)들을, 그가 불렀다, 그들을
그가 불렀다, 그들을
복합어 προβαίνω는 하나의 문맥(마 4:21 = 막 1:19)에서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단순한 공간적 의미로 사용
동사 καταρτίζω는 신약에서 13번 등장합니다. 마 4:21( 막 1:19과 유사)에서 이 동사는 일상 생활의 맥락에서 발견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어망을 "준비"(즉, "복원,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22 그런데 즉시(오세오스), 그들이 아피에미(버리다)하였다, 그 배와 그들의 아버지를. 그들이 아콜루쎄오(따르다, 뒤좇다)하였다, 그를
그들이 따랐다, 그를
구약성경의 신약성경 사용에 대한 해설
이 구절은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복음의 본론은 4:17에서 예수께서 "그때부터" 갈릴리 전역에서 왕국에 대한메시지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Kingsbury 1975; Bauer 1989 참조). 마태가 서술 할만큼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예수의 사역 준비의 마지막 사건은 나사렛에서 갈릴리 거주지로 가버나움으로 이사 한 것입니다 ( 4:13). 마태는 이 움직임에서 이사야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 이사야 예언의 명백한 성취를 봅니다(4:14).
원전 8세기에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이스라엘 북부를 침략하여 이 지역을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오스왈트 1986-1998: 2:237).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 땅에서 그들에게 새벽이 밝았다는 것은 처음에는 유배에서 돌아온 것을 의미 할 것입니다. "보았다"와 "새벽이 밝았다"는 "볼 것이다"와 "새벽이 밝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 시제를 예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스불론 지역"과 "납달리 땅"에 대한 언급 바로 뒤에 "바다의 길"을 배치한 다음 "그리고 그 근처에 사는 나머지 사람들"을 추가합니다. "이방인의 갈릴리" 뒤에는 " 유대인의 지역"이라는 문구가 무심코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LXX를 따르되 히브리어와 더 일치하도록 몇 가지 점에서 번역을 개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구약 시대에 단기적인 성취를 인식했지만 메시아 예수의 오심에서 장기적인 성취도 보았습니다. 유배로부터의 육체적 해방은 메시아 시대의 영적 해방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루즈 (1989 : 196)는 더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이사야 9 : 6이 다윗 왕에 의해 성취 된 적이 없다는 데 동의하며"처음부터 우리의 예측에는 역사적으로 결코 닫히지 않는 개방성이 있습니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특정 지리적 위치를 구약의 예언과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요르단 강 근처 갈릴리 바다에 있는 가버나움은 이사야 시대보다 1세기에 훨씬 더 많은 이방인이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그는 또한 메시아의 사역자ry가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어두운 구석에 영적인 빛을 비추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요한복음과 후대의 랍비들에게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어느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죽음이 아닌 영적인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유대인 자격을 확립한 마태는 이제 예수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율법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모세ic 언약을 성취하고 초월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Moo 1984 참조).
갈릴리 전역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요약한 내용(마 4:23-25)에서 많은 질병을 고치신 에 대한 언급은 메시아 시대, 특히 이사야의 치유와 관련된 치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Matthew: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가버나움은 호숫가의 번화한 도시로서 나사렛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더 많은 청중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나사렛을 떠난 것은 누가복음 4:16-30에 기록된 동족의 예수에 대한 거부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의 갈릴리는 이사야 시대보다 훨씬 더 적절한 설명이었는데, 하스모나아 통치자들이 의도적으로 유대교화 정책을 채택할 때까지 계속된 인구 이동으로 인해 이방인 인구가 주를 이루었고, 그 결과인구가 완전히 섞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역이 유대인 메시아의 계시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당화될 필요가 있었고(참조, 2:23), 마태는 그 정당성을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황폐화 이후 갈릴리에 새로운 빛이 밝아오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새로운 사역의 핵심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3:2)와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며,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반향될 것입니다(10:7). 예수께서는 새로운 상황, 즉 천국 사역의 도래에 대한 결정적인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3: 2, 참조).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태복음에서는 갈릴리 바다 (참조. 15:29)를 단순히 '바다'라고 불렀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호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약 13마일(21 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어업이 번성했고 어부들도 반드시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세베대의 가족은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막 1:20).
시몬의 이름은 유대인이지만 안드레의 이름(벳새다 출신 빌립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요 1:44, 참조. 요 12:20-22)은 갈릴리의 혼합 문화를 반영하는 그리스어입니다.
나를 따르라 (문자 그대로 '나를 따르라')는 말은 랍비의 제자들( 데이비스, 422-423쪽 참조)이 말 그대로 랍비를 따라다니며 그의 가르침을 흡수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는 랍비의 소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훌륭한 교사라면 그러한 '추종자' 그룹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듣고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부르셨습니다.예레미야 16장 16 절에 사람을 낚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는 심판을 위해 사람을 잡으라는 말씀이었으며( 아모스 4장 2절 참조), 예수님의 '어부'는 사람을 심판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여기와 22절에 나오는 어부들의 준비된 응답은 예수님 소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 만남이 처음은 아니었지만(요 1:35-42, 참조. 눅 5:3), 예수께서 순회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집을 떠나라고 요구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y. 집과 재산을 처분하거나 가족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아니었지만(예: 8:14; 요 21:3), 그들의 정상적인 생활 방식에 완전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참조: 19:27-29).
요한은 이미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요한복음 1:35-40의 이름 없는 제자) 중 한 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태는 바로 이어서 배와 아버지의 버림을 따로 언급함으로써(참조, 막 1:20) 그들이 포기한 정도와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핸드북
이 섹션 전체에서 예수님에 대한 대명사만 사용되었으므로 그리스어 본문에서 예수님과 유혹의 이야기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험 받은 그가
시험에서 이긴 그가
마귀를 정복하신 그가
체포되었다(TEV "감옥에 갇혔다")는 첫 번째 의미로 "(경찰 또는 법원에) 넘겨지다"를 가진 동사를 번역합니다. 킹제임스성경(KJV)은 "감옥에 갇혔다"라고 번역하고, 브리검영어는 "감옥에 갇혔다"라고 번역합니다. 대부분의 번역은 "체포되었다"라는 덜 구체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때 사용된 동사(26:15)와 동일하며, 신자들을 체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10:17, 19, 21; 24:9, 10 참조). 체포되었다는 것은 종종 적극적인 센텐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당국이 요한을 감옥에 넣었다." 또는 "헤롯 왕이 병사들을 보내 요한을 체포했다."와 같이.
어둠은 밤과 같은 물리적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도덕적 어둠을 의미합니다. 모든 문화권에서 이 그림을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번역가들은 "도덕적 어둠", "죄의 어둠" 또는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올바른 삶의 길을 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구원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지역과 그늘에 사는(또는 앉아있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하나님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진정한 생명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부터
마태복음 4:17
거의 모든 번역본이 이 구절로 새 단락을 시작하며, UBS 그리스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어 문장 구조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있던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신 후 세례 요한은 체포되었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일하고 싶었던 곳에 자리를 잡으셨기 때문에 설교를 시작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번역자는 "그때부터 설교를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었다" 또는 "그때부터 예수님 자신이 설교를 시작했다." 와 같은 문구로 이 강조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제 설교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네 명의 어부에게 자신을 섬기도록(또는 제자가 되도록) 초대(또는 명령)하십니다."
이 호수의 길이는 약 20킬로미터, 폭은 13킬로미터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베드로라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1:16).(막 3:16)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님이 나중에 시몬에게 주신 이름이지만, 마태는 아마도 독자들이 시몬을 알고 있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복음서 처음부터 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이것이 그들의 직업, 즉생계를 유지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람을 잡는다"는 개념은 예레미야 16:16에서처럼 랍비어와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렸다, 즉 "그들은 바로 그곳에 그물을 버렸다", "그들은 그물을 버렸다" 또는 "그들은 그물 작업을 그만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불러서 자신을 따르라" 또는 "그들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베대가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전화하셨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NIV SB
4:14-16 이사야 9:6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신성한 메시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상당히 직접적인 예측입니다.
4:15 이방인의 갈릴리. 기원전 8세기부터 갈릴리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 거주자가 비례적으로 더 많았습니다(참조: 누가복음 1장:79; 2:32).
4:18-16:20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주요 단계. 예수님의 공적 사역, 특히 갈릴리에서의 공적 사역의 하이라이트 를 소개합니다.
4:18-25 갈릴리 사역 소개.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며알링은 5장에서 시작되는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의 무대를 마련합니다.
4:18-22 두 쌍의 어부 형제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사진, 1770, 1833쪽 참조). 랍비들은 보통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정을 뒤집으십니다. 요한복음 1장 35-51절은 제자 중 일부가 이전에 예수님을 접한 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의 즉각성을 강조합니다.
NIV Cultural Backgrounds Study Bible: Bringing to Life the Ancient World of Scripture
4:13 가버나움. 갈릴리 바다에 있는 인구 1,000명 또는 2,000명 정도의 어촌 마을.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가장 큰 두 도시인 세포리아와 디베랴에서 사역하셨다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다른 지역과 접촉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후대의 자료에 따르면 가버나움은 예수를 따르는 갈릴리 제자들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4:22 즉시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가족과 생계를 떠난다는 것은 드물고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보통 10대였으며, 예수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이 범위에 속했을 것입니다.
모두를 위한 마태복음, 1부: 1장~15장
예수님은 왕국 운동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가 태어나기 약 60년 전에 그의 고국을 정복했습니다. 로마는 수많은 이교도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정복한 나라였습니다. 눈은 헤롯 대왕과 그 뒤를 이은 그의 아들들을 꼭두각시 군주로 임명하여 그들의 더러운 일을 대신하도록 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두 가지 조치에 모두 분개했고,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피지배 민족처럼 단순히 자유를 갈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과 자신, 세상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유를 원했습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한 분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면 이교도 외국인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언젠가 그들을 구출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경전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특히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마침내 정의( )와 평화를 가져올 왕, 거꾸로 된 세상을 다시 바로 세울 왕 말이죠. 혁명가들은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그들이 갈망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의 주권적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가 급행 열차처럼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하고 계셨습니다.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주목하고 길을 비켜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희망뿐만 아니라 위험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다가오고 있다면 정의를 왜곡하거나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있을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좋은 옛말은: '회개하라!'
이 단어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종종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다',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가다', 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반대 방향으로 가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느끼는지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4명의 제자들은 방향을 바꾸어, 예수를 따랐다.
그 당시에 방향을 바꾸지 않고 예수를 떠나려고 하던 많은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싸움을 계속하기를 열망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회개의 메시지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죄에 대해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도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랐겠지만),민족으로서 폭력 혁명의 벼랑 끝으로 돌진하는 것을 멈추고 그 반대 방향, 즉 자신과 세상을 위해 빛과 평화, 치유와 용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 배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일상적인 삶과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무엇인지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소상인이었고, 큰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가족 단위로 일했습니다. 물고기도 풍부했고 좋은 시장도 있었습니다. 군인, 나그네, 순례자, 행상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오가는 국제적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항상판매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일이었고 때로는 위험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적당히 안전했지만 사치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랑하는 설교자를 따랐을까요?
예수님은 결코 단순하고 단순한 치료자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이 그의 사역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에게 치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시는 새로운 일의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주권적이고 구원하는 통치가 마침내 그를 통해 이스라엘과 세상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어떻게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곧 어부들은 호수 옆에서 조용히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북적이는 인파의 한가운데서 고기를 잡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진정으로 시작되었고, 그들은 그 선교에 휘말렸습니다.
성경 지식 해설
4:12-16. 마태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그의 기록에서 중요한 시간적 요소를 제시했습니다. 요한의 투옥 이유( )는 여기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언급되었습니다(14:3). 예수님은 요한의 투옥 사실을 알게 되자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6-30에 나자르를 떠난 이유에 대해 설명되어 있습니다eth). 이 지역은 여호수아 시대 정복 이후 스불론 지 파와 납달리 지파가 정착한 지역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지역에 빛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고(사 9:1-2), 마태복음은 이 예언의 성취로 예수의 이 운동을 기록했습니다(aw). 메시아의 사역 중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빛이 되어 어둠에 빛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참조: 요 1:9, 12:46).
4:17.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친숙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참조, 3:2). 요한의 두 가지 메시지는 이제 메시아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 땅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려면 회개는 필수였습니다.
4:17 그때부터. 16:21에도 등장하는 이 구절은 준비 기간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6:21에 다시 등장한 이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왕국의 도래에서 왕의 고난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4:23 가르치고 ... 선포하고 ... 치유한다. 가르침은 산상수훈( 5-7장)과 하나님 나라의 비유(13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목적을 전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며, 역사에서 그분의 주권적인 목적이 마침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치유와 가르침과 설교는 이 왕국이 도래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11:5).
왜 유대인(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이방인)에게 복음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New Testament (Second Edition
4:18.대부분의 갈릴리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특히 소금에 절인 생선, 밀, 보리에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생선 그레이비와 같은 생선 제품도 흔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생선에는 큰 잉어가 포함되었으며, 생선을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절여서 보존했습니다. 피어부들은 갈릴리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던 수많은 농민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은 아마, 파피루스 또는 대마로 짠 밧줄이나 끈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3:47의 더 큰 드래그넷과 대조); 주조 그물은 배에 의해 당겨진 좁은 끝과 납으로 가라앉은 넓은 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갈릴리 어선을 발견했습니다.
4:19-20.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랍비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오직가장 급진적인 선생님들만이 자신의 제자를 불렀습니다.
4:21-22. 어부들은 갈릴리 지역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수입이 많았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수입이 적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아버지와 가업을 버리고 떠났으며, 그러한 포기는 지역 사회에서 쉽게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탈을 급진적인 제자도의 확실한 신호로 인식할 것입니다.)
Matthew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갈릴리의 혼합 인구에서 온 평범한 사람들을 조력자로 부르셨습니다. 종교적 지식은 종종 진정한 믿음에 의해 요구되는 행동을 방해합니다.
NIGTC
4:12 11절과 12절 사이에는 마태가 채우려고 시도하지 않은 시간적 간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예: 3:1 대조); 요한의 사역은 계속되지만 이 기간 동안 예수에게 어떤 역할도 부여되지 않습니다.63 요한의 체포(및 후속 처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4:1-12까지 보류되어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페레아(요한이 체포된 곳)와 갈릴리(e)를 모두 통치했으므로, 세례 요한의 철수는 안티파스의 영토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활동하다가 결국 체포된 지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가복음(1:14-15)에서 요한의 체포가 그 자체로 예수의 공적 사역을 촉발하는 것으로 제시된d라면, 마태복음 4:13-16의 삽입과 12절과 2:22 사이의연결은64 마태복음 독자로 하여금 위험 지역에서 신중한 철수알을 먼저 생각하도록 권장합니다.65 마태는 여기서 요한과 예수의 운명에 대한 마가복음의 관심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유사성을 인식하도록 의도했을 것입니다.66 확실히 우리는 2:1-23에서 아기 예수에게 제기된 위협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Faithlife Study Bible
설교하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케리소는 현대 동사 '설교하다'가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선언을 의미합니다. 종종 국빈 방문 선언이나 과세 변경과 같은 주권자의 공식적인 선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야훼의 통치와 다스림이라는 구약성서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왕국을 모든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영원한 영역이라고 말합니다(시 145:13). 이사야는 야훼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고(사 33:22),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를 sp예견합니다(사 52:7). 구약성경은 온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때에 대한 큰 기대감을 묘사합니다(사 2장).
1세기 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말라기 3:1-5, 스가랴 9:9-10, 이사야 9:1-7, 이사야 52:13-53:12 등의 구절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이 통치를 시작할 것이라고믿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왕국이 정치적 또는 군사적 수단(마 26:51-53, 눅 22:47-53 비교)을 통해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왕국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서 해방시킨 사람들에게 왕국이 임했다고 선포하셨고(마 12:28), 왕국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막 10:15), 왕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눅 6:20).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 섬겼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 실재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또한 왕국이 미래의 현실이라고 가정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즉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떠나야 하는 한 통치자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며 제자들의 기대를 바꾸셨습니다(눅 19:11-27). 그리고 그 동안 충실한 종들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왕국에 대해 상속받을 수 있고(고전 6:9-10) 멸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5:50). 이 예들은 하나님의 왕도m이 미래의 현실임을 증거합니다.
조지 엘든 래드의 유명한 문구를 빌리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아직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고(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하나님 나라가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고,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긴장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신과 깨어짐, 그리고 죄를 보며 하나님의 뜻이 아직 완전히 표현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현재 현실로서의 왕국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는 미래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러한 초점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지금 여기에서의 삶 사이의 관계를 쉽게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천국의 경험을이 땅에 가져다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권능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 현실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아직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은 영역이 없는지물어보게 합니다.
모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계21:4-5)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마 4:17).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듯이(마 6:9-15)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이크 골드스워디
4:19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아마도 직업의 변화를 묘사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았다면, 이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물을 말려서 보관했습니다. 그물은 종종 수선이 필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