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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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네 직무를 다하라”‌
2번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라
3번 우리의 때와는 상관없는 말씀 전파
4번 복음을 전하는 직무
고전 9: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빌 2:17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행 21:8 |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딛 2:15 |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행 10:42 |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서론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마지막이 되면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또한 우리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남겨주고 싶으십니까? 딱 한 가지만 말해줄 수 있다면 어떤 말을 남겨주고 싶으십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끝 부분에 해당합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에게 주어진 소임, 그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
Lexham 리서치 주석: 디모데후서 바울의 마지막 가르침 (딤후 3:10–4:8)

바울의 마지막 가르침

디모데후서 3:10–4:8

개관

디모데후서 3:10에서 바울은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특징(딤후 3:1–9)에서 다시 디모데에게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계속해서 성경에 의지하고 그가 받은 진리로 계속 훈련받으라고 권한다. (그는 바울과 어머니, 그리고 외조모로부터 성경을 배웠을 것이다; 참고, 딤후 3:10, 14–15). 편지 곳곳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을 보면, 에베소에서의 거짓 교사들과의 지속적인 긴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담대하고 끊임없이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독려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1–5에서 이 강조점을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신화를 좇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확고한 가르침이 필수적이라고 경고한다(딤후 4:4). 이 본문의 마지막 단락은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자신이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만족감을 표현한다(딤후 4:6–8).

구조

5. 디모데에게 사명을 위임함 (딤후 3:10-4:8)

a. 박해의 불가피성 (딤후 3:10–13)

b. 성경을 계속해서 의지하라는 권고 (딤후 3:14–17)

c. 가르침의 요약 및 마지막 권고 (딤후 4:1–5)

d. 바울의 마무리 간증 (딤후 4:6–8)

디모데후서에서의 위치

디모데후서 3:10–4:8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향한 권면을 매듭짓는다. 첫 단락인 디모데후서 3:10–17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역을 지속하라고 마지막으로 권고한다. 그는 디모데에게 또다시 자신을 따라야 할 본보기로 제시하면서 편지를 시작할 때 디모데후서1:8–14에서 제시한 패러다임을 다시 꺼내든다. 위더링턴(Witherington 2006, 362)은 후속하는 두 단락(딤후 4:1–8)을 맺음말(peroratio), 즉 앞선 이야기의 일부를 요약하고 강조하는 절정으로 본다. 가르침의 마지막 섹션에 이어서 바울은 디모데의 여행 계획과 관련된 내용과 디모데가 익히 알고 있을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말로 편지를 마무리한다(딤후 4:9–22).

정경에서의 위치

바울이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의 사역 경험들을 거론한 것(딤후 3:11)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선교 여행의 문맥 안에 놓일 수 있다(참고, 행 13:48–52; 14:1–20). 하나님이 그를 이전의 모든 환난에서 구하셨다는 디모데후서 3:11의 말은 시편 34:19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경건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삶에 대한 가르침은 다른 목회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을 반향한다(딛 2:12; 딤전 4:6; 6:11). 디모데후서 4:1의 “명령” 언어는 디모데전서 6:13을 반향하고, 진리를 전파하고 거짓 가르침을 반박하라는 명령도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의 명령을 따라간다(참고, 딤전 4:13; 5:20; 딛 1:13; 2:15). 거짓 가르침에 굴복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디모데전서에서 거짓 가르침에 대해 반복적으로 경고했던 것과도 연결된다(참고, 딤전 1:3–7; 4:1–5; 6:3–5, 20).

쟁점 한눈에 보기

• 박해의 불가피성

• 성경의 가치

•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위임함

• 핵심 단어 연구: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진”

• 핵심 단어 연구: ‘호 투 테우 안트로포스’(Ho Tou Theou Anthrōpos), “하나님의 사람”

• 핵심 단어 연구: ‘스펜도, 스펜도마이’(Spendō, Spendomai), “전제로 부어지다”

출발점: 영감과 무오

디모데후서 3:16은 성경에 관한 교리의 핵심 구절이다. 여기서 성경이 명시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된다(“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참고, 핵심 단어 연구: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진”). 이 구절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이라는 성경의 목적과 용도를 기술하기 때문이다. 성경 연구는 궁극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딤후 3:17). 대부분의 신학 교과서들은 성경의 권위, 영감, 무오에 대한 장황한 논의를 포함한다. 그루뎀(Grudem 1994)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45–138) 1–8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리”를 다룬다. 에릭슨(Erickson 1998, 224–85)은 10-12장을 하나님 말씀의 영감, 무오, 권위라는 주제에 할애한다. 헨리(Henry)의 책 『하나님, 계시, 권위』(God, Revelation and Authority) 제4권의 대부분은 성경의 권위, 무오, 영감을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특히 6–8장을 참고하라. Henry 1999, 4:129–219). 이러한 신학책들은 해당 본문의 내용을 포함하여, 어떤 디모데후서 주석보다도 훨씬 더 자세하게 이 복잡한 주제의 미묘한 문제들을 탐구한다. 최근에는 영감과 무오란 주제가 복음주의 그룹에서 격렬한 논쟁거리였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수많은 출판물들이 나왔다(예, Enns 2005; Allert 2007; Beale 2008). 성경 사전에서 성경무오와 영감을 다룬 글들 역시 이 주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유용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Lexham 리서치 주석: 디모데후서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위임함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위임함

앞서 설명한 것처럼(참고, “디모데후서에서의 위치”), 이 본문은 바울의 담론 구조에서 맺음말(peroratio)에 해당한다. 즉, 편지의 요지를 요약하고 되풀이하면서 정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1–5에 나오는 첫째 단락은 담대한 복음 사역자가 되고, 진리를 가르치며, 거짓 가르침에 대응하라는 요구를 갱신한다.

바울은 자신의 명령을 갱신하면서, 예수님의 미래의 “나타나심,” “왕국,”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을 강조하는 삽입절을 중간에 집어넣는다(비교, 행 10:42; 살후 2:8). 배슬러(Bassler 2002, 207)는 신 현현의 언어가 “이 마지막 장의 권면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배슬러는 이 단락이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언급으로 끝난다는 점에 주목한다(딤후 4:8). 이 동일한 구절 안에 최후 심판에 대한 여러 암시가 들어 있다. 바울이 받을 “의의 면류관”에 대한 언급, 예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날”이라는 문구 등이 그것이다. 편지의 이 대목에서 종말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를 앞서 가리키고, 또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 사역을 완수하라”(딤후 4:5; 개역개정 “네 직무를 다하라”)고 제시한 일에 헌신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최후 심판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말세”에 사역하고 있다는 바울의 관점과 부합한다(참고, 딤후 3:1). 디모데후서 4:3에서는 시급성의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여기서 바울은 “때가 이르러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가 완전히 도래한 것 같진 않기 때문에, 디모데는 복음 메시지에 귀기울이고 반응할 일부 사람들이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사역을 이어가야 한다.

이 본문의 마무리 단락(딤후 4:6–8)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 경력의 끝을 향해 가면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들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만족감을 내비친다. “이미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는 바울의 말은 대체로 바울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참고, 핵심 단어 연구: ‘스펜도, 스펜도마이’[Spendō, Spendomai], “전제로 부어지다”). 그는 자신이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자신의 투옥이 곧 죽음으로써 종결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바울은 서둘러 디모데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급한 요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딤후 4:9, 21).

• 배슬러(Bassler 2002, 194–214)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회서신의 모든 본문을 탐구한다. 디모데후서에서는 첫 번째 나타나심을 암시하는 성육신 주제가 1:9–10에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나타나심이 4:1–8에서 다뤄진다. 바울의 최후 권면을 둘러싼 종말론적 틀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앞서 가리키면서, 담대하게 사역하라는 그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동기를 제공한다.

“Epiphany Christology in the Pastoral Letters: Another Look” Pauline Conversations in Context: Essays in Honor of Calvin J. Roetzel

• 라안스마(Laansma 2009, 199–207)는 “주석” 섹션에서 이 본문이 다른 신약 본문과 언어적, 주제적으로 연결된 부분을 지적한다. 그는 여기서 특히 누가-행전과 다른 목회서신의 관계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에 더 이상 귀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특징은 목회서신에서 거짓 가르침이 묘사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 본문에 대한 그의 주석 전체는, 고난받을 준비를 하고, 가르침받은 것을 굳게 지키고, 인내로써 사역을 수행하라는 편지의 주요 주제와 잘 들어맞는다. 그는 특히 이 단락의 시작과 끝에서 최후 심판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시급성”에 주목한다(딤후 4:1, 8).

“2 Timothy 2:14–26” Cornerstone Biblical Commentary: 1–2 Timothy, Titus & Hebrews

• 라이펠트(Liefeld 1999, 286–90)는 디모데후서 4장을 바울의 “최후 발언의 기록”이라 부른다. 그는 디모데후서 4:1–8을, 디모데에게 요청하는 부분인 4:1–5와 사역자로서의 자기 삶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4:6–8로 나눈다. 최후 심판의 주제에 대해 라이펠트는 요한계시록 20:11–15, 고린도후서 5:9–10, 고린도전서 3:12–15를 인용하면서, 미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전망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바울의 요구”에 무게를 더하는지를 보여 준다. 디모데에게 전한 직접적인 명령은 모두 에베소에서 거짓 가르침에 대응하면서 강력하고 확고한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 사람들이 결국 건전한 교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디모데는 힘써 가르쳐야 한다. 라이펠트는 디모데후서 4:6–8의 바울의 최후 진술이, 예를 들어, 자신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거나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바울이 이 편지들을 작성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바울이 “몇 가지 성취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게 된 데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이해할 만하다고 공감한다.

“2 Timothy 4:1–8” NIVAC: 1 & 2 Timothy, Titus

• 타우너(Towner 2006, 594–618)는 디모데후서 4:1–5를 명령과 그 이유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디모데후서 4:6–8의 사적인 발언들은 바울을 디모데를 위한 본으로 재차 거론하고, 바울의 때가 거의 끝에 이르렀음을 주목시켜 명령의 시급성을 더함으로써 이 명령을 강화한다. 그는 디모데후서 4:1의 종말 이미지 역시 디모데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시급성의 분위기를 더한다고 설명한다. 심판, 재림, 왕국의 종말론적 요소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미래가 ... 지금도 현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면서 디모데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이 명령의 근거는 에베소에서의 지속적인 배교 위협에서 비롯된 것이다(참고, 딤후 4:3–4).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역 경험을 디모데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디모데후서가 줄곧 그랬던 것처럼 디모데에게 명령하면서 바울 자신의 인격적인 본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패턴을 취한다.

“2 Timothy 4:1–8” NICNT: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 위더링턴(Witherington 2006, 362–70)은 이 단락이 앞의 주장들을 요약하고(recapitulatio) 강력한 정서적 호소(conquestio)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단락을 수사학적 결어(peroratio)라는 형식적 범주로 설명한다. 또한 이 구절들은, 맺음말이 가진 또 하나의 전형적인 특징을 따라, 편지의 몇 가지 주제들을 확장한다. 또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최후 심판에 대한 언급이 이 단락의 구조를 형성하면서 독특한 수사학적 단위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2 Timothy 4:1–8” Letters and Homilies for Hellenized Christians, Volume I: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Titus, 1–2 Timothy and 1–3 John

4:1-2
행 10:42 |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나타나심 - 에피파네이아
Lexham 리서치 주석: 디모데후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 “나타나심”

‘에피파네이아’(Epiphaneia), “나타나심.” 신약에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는 “출현” 또는 “나타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에피파이노’(epiphainō, “보여 주다,” “자신을 드러내다”; 또는 “밝히다”)에서 유래한다. 예를 들어, 디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에피파이노, epiphainō)”(딛 2:11), “우리 구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타났다(에피파이노, epiphainō)”(딛 3:4 ESV)고 말한다. 초기 그리스 문헌에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를 비롯한 ‘에피파이노’(epiphainō) 관련 단어들은 신전 내에서 신들이 출현하거나 신들의 도움이 나타난 것과 연결되었다.

Lexham 리서치 주석: 디모데후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 “나타나심”

신약 내에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 “나타남”)는 서신서에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대체로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에피파네이아, epiphaneia) ... 불법한 자를” 물리치실 것이다(살후 2:8).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딤전 6:14), 그리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 2:13 ESV)은 이 세상이 다음 세대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묘사한다.

디모데후서 내에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는 세 번 나온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을 고대하는데, 이는 다른 신약 본문에서의 용례와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나타남”(에피파네이아, epiphaneia)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주된 요소가 될 것이다(딤후 4:1). 또한 바울은 “그의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 epiphaneia)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상급(“의의 면류관”)을 이야기한다(딤후 4:8). 디모데후서 4:1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기대를 고려할 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는 언급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있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과 공의에 대한 소망어린 기대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디모데후서는 유일하게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를 사용해 그리스도의 첫 번째 나타나심(즉, 그의 탄생과 지상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예를 포함한다. 해당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자신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것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 epiphaneia)으로 말미암아 드러났다”(딤후 1:9b–10a ESV). 이같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과거적인 의미로 언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딤후 4:8)는 말 역시 그의 두 번째 나타나심보다는 첫 번째 강림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신앙이 온 세상에 확산 될 수 있도록 디모데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디모데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실 것을 믿음으로,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은 지금도 지극히 중요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수십억의 인구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며 충성된 신자들이 자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길 바라십니다. 그리스도 편에 서거나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말하는 일이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붙잡을 준비를 하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용감하며 민감하길 바랍니다. 목회자이거나 교회의 리더라면 자기 계획이나 기준이나 영리한 말을 의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성령께서 회중 가운데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2
딛 2:15 |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며 디모데를 독려합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디모데가 박해의 어려운 시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죄를 지적하는 성경 구절을 건너뛰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중단 없이 복음을 전하라며 디모데를 권면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을 섬길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에 민감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전파하다 - 케뤼쏘
‘케뤼그마’(Kērygma), “선포.” ‘케뤼그마’(kērygma)란 단어는 아마도 명사 ‘케뤽스’(kēryx, “선포자”; 참고, 핵심 단어 연구: ‘케뤽스’[Kēryx], “선포자”)에 기초하며, ‘케뤽스’(kēryx)라 불리는 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를 가리킬 것이다. 신약 내에서, 관련 동사 ‘케뤼쏘’(kēryssō “선포하다”)는 ‘케뤼그마’(kērygma)나 ‘케뤽스’(kēryx)보다 훨씬 일반적이지만, ‘케뤼쏘’(kēryssō)는 공적인 선포라는 매우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약의 여러 단어들이 공적인 발언과 관련해 등장하기 때문에 “설교” 또는 “선포”로 번역될 수 있다.
신약의 여러 예들에서, ‘케뤼그마’(kērygma)는 공적인 설교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설교(케뤼그마, kērygma)”(개역개정 “요나의 전도”)를 언급하고(마 12:41; 눅 11:32 ESV),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케뤼그마, kērygma)”(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를 언급한다(롬 16:25 ESV). 이러한 예에서 ‘케뤼그마’(kērygma)는 메시지가 결합된 설교 행위를 짧게 묘사한 것으로, 그 안에 전체를 품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곳에서 ‘케뤼그마’(kērygma)의 의미를 확장하여 “선포”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이 어휘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조우는 설교자의 메시지 자체와 청중이 진리와 대면하는 것 모두와 관련된다.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선포”(케뤼그마, kērygma)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설교한(케뤼그마, kērygma) 것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ESV). ‘케뤼그마’(kērygma)의 중요한 요소는 윤색된 메시지가 아니라 “성령과 능력의 입증”이다(고전 2:4 ESV). ‘케뤼그마’(kērygma)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역(그리고 그것이 신앙에서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설교(케뤼그마, kērygma)도 헛되고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고전 15:14 ESV).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령으로 내게 맡겨진 설교(케뤼그마, kērygma)”(딛 1:3 ESV)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케뤼그마’(kērygma)를 전파하는 역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선포 활동을 보호하시고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파하도록 권능을 주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 4:17의 바울의 진술은 이러한 확신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나를 통해 그 메시지(케뤼그마, kērygma)가 온전히 선포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다”(ESV). 바울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복음 전파와 선교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명사 ‘유앙겔리온’(euangelion, “좋은 소식”)과 동사 ‘유앙겔리조’(euangelizō “좋은 소식을 알리다”)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예, 마 4:23; 눅 4:43; 행 5:42; 벧전 1:12; 4:6). 또한 바울은 이 어구들을 사용해 자신의 사도적 소명과 선교 사역에 대해 이야기한다(예, 롬 1:1; 15:20; 고전 9:17; 15:1–2; 갈 2:7; 빌 1:16).
말씀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때와는 상관없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즉 말씀전파는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야지, 나의 때에 따라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손이 아파서 말씀 전하지 못합니다. 나는 발이 아파서 말씀전하지 못합니다.가 아니라 항상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때에 상관없이 전하려면, 항상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언제든지 주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라는 말씀과 같이, 언제든 그러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기를 늘 기도하고,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항상 준비해야, 그래야 내 때와는 상관없이 언제든지 말씀을 전할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양육과 훈련을 하시되 내 힘으로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힘 주시면 할 수 있음을 믿고, 우리는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합니다. 경책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하나님께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진리에 기꺼이 귀기울여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신자들을 제자로 훈련시키고 있다면 인내심을 갖고 과녁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진리로 경책하고 권하기를 바랍니다.
4:3-5
많은 연사들과 교사들과 작가들이 지식 추구에 관해 말합니다. 그러나 흔히 이들은 지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권력을 원합니다. 이런 사람은 ‘바른 교훈’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신화]를 따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비진리와 타협하는 교회에서부터 대학 캠퍼스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성경보다는 좀 더 많은 계몽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량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여러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절대 진리나 그 어떤 판단 기준에도 무관심하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② 선정성을 위해 진리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주목을 받고 사람들이 끌려오게 하는 진리를 원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것,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이 이들의 진리가 되어 절대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에게 다르게 말하려 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습니다.
③ 자신의 이기적 욕구에 일치하는 관점만 끌어모읍니다. 이들은 객관성을 공언하지만 자기 필요와 욕구를 우연히 뒷받침할 뿐인 개인 경험을 사용햐 자신의 관점을 변호합니다.
이런 선생들에게 추종자가 붙는 이유는 이들이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귀를 즐겁게 하는’, 새번역)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허탄한 신화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숱한 곳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디모데처럼 모든 일에 신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4:4 고난을 받으며...

적용 개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의미 있는 목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이를 위해 기꺼이 어떤 고통도 감내하려 한다. 다른 이들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다만 자신의 삶을 사소한 목적들에 맞추며 살아간다. 바울에게 복음, 즉 “좋은 소식”은 그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유일한 목적이며, 그는 복음에 충성하기 위해 큰 어려움을 감내한다. 복음은 그를 삶의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 즉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시킨다(딤후 1:9).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딤후 1:12), 디모데에게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지시한다(딤후 1:8).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부끄럽게 여기기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무의 일부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에 대해 생각할 때(딤후 1:7–8), 우리는 이것이 고난으로부터의 보호 내지는 회피를 포함하는 것이라며 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은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말한다(딤후 1:12).

자신의 후배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옥중편지를 쓸 대담한 멘토가 필요하다(딤후 1:8).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렇게 한다. 그는 자기 삶의 중심이 되는 목적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서의 사역에 있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는다”는 예리한 설명을 덧붙인다(딤후 1:12a). 그는 디모데(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에도 맞서 헌신할 수 있도록 고무하기 원한다.

4:5
사람들이나 환경이 당신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고 거칠게 대할 때 주어진 일에 집중하려면 서둘러 대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역을 하든지 모든 상황에서 신중하다면, 유혹을 도덕적으로 경계하고 압력에 저항하며,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4:6-8
빌 2:17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 - 스펜도, 전제로 부어지다 - 스펜도마이
‘스펜도, 스펜도마이’(Spendō, Spendomai), “전제로 부어지다.” 동사 ‘스펜도’(spendō)는 헌주하듯이 전제로 붓는 행위를 가리키고, 동사 ‘스펜도마이’(spendomai)는 이것의 수동형이다(“제물로 부어지다”). 신약 내에서 ‘스펜도’(spendō)는 두 번 사용되는데, 모두 수동태인 ‘스펜도마이’(spendomai)로 나타나며, 때로는 어휘 사전에서도 수동태인 ‘스펜도마이’(spendomai)가 기본형으로 수록된다.
고대 세계에서 전제는 일반적으로 제단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이었고, 이는 아마도 부수적인 헌물로서 신에게 바치는 음식과 함께 드려지는 음료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성전 제의에서 포도주로 드리는 전제의 방식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들은 속죄를 위한 피의 희생과 별개로 취급되었고, 사용하는 용어도 달랐다.
빌립보서 2:17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믿음의 희생 제물 위에 전제로 부어져야[스펜도마이, spendomai]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할 것이라”(ESV)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그의 생명을 바치게 될 “전제”로 칭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피를 전제로 부어지는 액체로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비유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생명이 부어지는 것으로 이야기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성전에서 드리는 피의 제사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전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의 생명은 빌립보의 이방인 신자들의 믿음의 제물과 함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4:6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전제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내가 이미 전제로 부어지고[스펜도마이, spendomai], 나의 떠날 시간이 가까움이라”(ESV). 여기서 희생 제사 장면이 빌립보서 2:17보다 덜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바울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바쳐지는 자신의 임박한 순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는 디모데를 향해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어떤 운명이 뒤따르는지를 보여 줄 뚜렷한 예시로 의도했을 것이다.

적용 개관

신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주제 중 하나는 인격적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령에 의한 즉각적인 품성의 변화가 아닌 것은 자기 의에 따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변화가 철저한 영적 훈련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인격적인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자에게 성경의 중심적인 역할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ESV)고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딤후 3:15 ESV). 바울은 성경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것 외에도 “건전한 가르침”이, 자기 기만으로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으로 서게 할 방법임을 암시한다(딤후 4:3–4).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파하고 ...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고 지시하고(딤후 4:2 ESV),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공한다.

하지만, 가르침 자체가 안전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모두가 “자기 사욕을 만족시키고 ... 진리를 듣기를 외면하면서”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딤후 4:3–4 ESV). 가르침의 융통성에는 성경의 표준으로 평가받는 일이 요구되고, 따라서 가르침은 단순한 의견이나 감상 따위가 아니다. 오직 “건전한 가르침”만이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다.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서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스비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상을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차분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영원의 빛 아래서 사십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다시 뵙길 자신 있게 기대하고 고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별 볼일 없는 자들로부터 보통 사람과 바울 같은 믿음의 거인가지 모든 신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늘의 상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아무리 힘들지라도 계속 싸울수 있도록 디모데와 우리를 격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날, 우리가 그분을 위해 겪은 모든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4:8
계 2:10-11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로마 시대의 운동경기에서는 월계관, 곧 면류관을 우승자에게 씌워 주었습니다. 승리와 영예의 상징으로서 월계관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선망하던 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의의 면류관’을 말합니다(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대해 주어질 상에 대해서는 고후 5:10; 마 19:27;을 보라). 바울은 이 세상의 상은 받지 못할테지만,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만나든 낙담이나 박해나 죽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상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기를 주관하고 그 경기의 승리자에게 관을 씌워줄 재판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당대 시대에 쉬운 세계관은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그가 후에 관을 씌워주는 주권자로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을 받고자 믿고, 믿을뿐만 아니라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상이 반드시 자신에게 씌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좌절이나 낙담, 박해, 죽음이 자신을 감싸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인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우승자에게 씌워줄 관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간직하고 소망하고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선한 싸움을 끝까지 달려가 그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기적으로 죽음을 1년여 앞두고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60대 중반을 넘긴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돌아보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십시다.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7절 말씀처럼 정말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그 길을 달려가 마쳤는가? 그래서 믿음을 지켰는가?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금방 또 한 해가 저물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내다보면 금방 어느새 우리의 달려간 길의 성적표가 우리 눈 앞에 보이게 될 것입니다. <논어>에는 ‘일삼성' 이란 증자의 말이 나옵니다. 날마다 세 번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가? 우리는 하루에 세 번 다 돌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오늘이 가기 전에 또는 내일이 가기전에, 내가 정말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인지? 정말 구원받은 자가 맞는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1. 먼저,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입니다. 우리에게는 싸우고 있는가? 겠지요.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는 자입니다. ()
에베소서 2:16 NKRV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
디모데전서 6:12 NKRV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영적 싸움의 승리를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베드로전서 5:6 NKRV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영적 승리를 위해서는 영적 무장을 든든히 해야 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8 NKRV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영적 군사는 온전한 헌신을 해야 합니다. ()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4 NKRV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선한 싸움에 해당하는 ‘톤 아고나 톤 칼론'이 문장 서두에 나와서 강조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는 바울 자신이 싸운 싸움이 다른 싸움과는 구별되는 선한 싸움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투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투쟁의 대상은 비 진리이고, 악한 사단의 권세들 이었습니다. 자신도 한 때, 복음을 핍박하던 때가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의 용사로 변화되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으로 채워졌다.
에베소서 6:11 NKRV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4–17 NKRV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돌아봅시다. 아니 당장 한 주만이라도 돌아봅시다. 영적인 무장을 든든히 했습니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나아가셨습니까? 아니면 싸움터에 나아가지도 않고 타협 하셨습니까? 무서워서 싸워보지도 못하셨습니까? 골리앗 때문에…
얼마든지 양보하고, 얼마든지 져줄 수 있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린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달려갈 길을 마쳤는가? 잘 달려가고 있는가?

앞서 군사의 비유로 영적인 삶을 설명했다면, 이제는 운동장의 선수를 비유로 삶을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3:14 NKRV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달려갈 길’에 해당하는 ‘드로몬’은 경주 코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하는 것은, 마라톤 전체 코스를 완주한 자의 환희에 찬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승리가 아니라, 완주해서 승리입니다.
고린도전서 9:26 NKRV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9:25 NKRV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달려갈 길’에 해당하는 ‘드로몬’은 경주 코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하는 것은, 마라톤 전체 코스를 완주한 자의 환희에 찬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전 9:25
사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의 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쉼 없이 복음 전파에 전력하였습니다. 회당, 광장,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로써 전하고,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받았고, 40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면서도, 3차에 걸친 세계선교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의 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쉼 없이 복음 전파에 전력하였습니다. 회당, 광장,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로써 전하고,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받았고, 40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면서도, 3차에 걸친 세계선교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사도행전 20:24 NKRV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2023년 9월 13일 어느 화창한 날,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경주는 어떠하고 있습니까? 한 1km, 2km뛰어가다가 벌써 지쳐버린 것은 아닌지요? 어떻습니까? 어려움들을 만나서 경주를 멈추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니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뛰면 다행이지만, 혹여나 뒤로 돌아가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누가 잠깐 방해한다고 금방 지쳐 나가떨어져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끝까~지 우리의 마땅히 달려가야 할 길을 잘 달려가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날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2:16 NKRV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아멘.

3. 마지막으로 믿음을 지켰는가?

바울은 마지막으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지켰다는 ‘테테레카'는 보존하다 라는 뜻으로 ‘테레오'의 현재 완료형입니다. have p.p. ~ing 줄곧 지켜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이후에서 시작하여 계속 믿음을 지켜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후 약 1년 뒤, 로마 황제 네로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사도행전 14:22 NKRV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제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이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까? 믿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감으로 믿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신앙의 양심을 더럽게 하진 않았습니까? 마음 속에 믿음의 울림이 있는데도, 욕심에 따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바울의 회고록을 보았습니다. 짧지만 장엄하고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말들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달려갈 길을 마쳤는가? 믿음을 지켰는가?
의의 면류관은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스레 우리에게 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평생 달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징표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지킴으로 의의면류관 다 받으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랑거리 되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 이 관의 특징은 썩지 않는 관이라고 합니다.
고전 9:24-27고전 9:24-27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의 세계관은 철저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고 싸우고 몸을 쳐 복종한다는 표현들을 보십시오. 인생을 뭘로 해석하는가? 운동장에서 스포츠하는,, 경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라는 것입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프로선수이며, 그들은 그 한 경기를 이기기 위해 평생을 훈련합니다. 그리고 늘 그 경기에서 이기고 승리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가르치고 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은혜한테 통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한국 개신교의 3세대, 4세대, 많게는 5세대 구성원들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손자 손녀가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누구보다 그 어든때보다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또한 마찬가지로 그 어느때보다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 300년 걸렸습니다. 미국교회 200년 걸렸습니다. 한국교회 100년이 조금 넘은 지금 이때에 가족구성원 외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 말씀을 정말 가슴에 품고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날마다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 말씀이 정말 듣기 싫은 말씀이라면 말씀을 최대한 새롭게 해석을 해보고 또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원어를 보고 영어를 봐도,, 다른 뜻보다는 하나님 다시 나타나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 쏟아낸다는 전제로서, 또는 선한 싸움을 마쳤다는 표현 등으로 우리에게 정말 마지막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목회자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한 건물 한 교회예배당을 온전히 가꾸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전도자의 삶은 그가 씌워주실 썩지 않을 의의면류관을 쓸 때까지는 끝까지 달려가는 삶입니다. 오늘날 이 권면과 마음과 자세를 좀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지칠 기색이 없고 조금 힘들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쓰러져도 일어나시고 넘어져도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우릴 대신하여 십자가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우릴 위해 십자가 지셨는데, 우리는 그 무엇도 못하겠습니까?
다만, 이것이 율법으로 들리지 않고 오늘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만약 아직도 이러한 말씀이 정죄하듯이, 여전히 불편하게 들리신다면 성령님께 말씀을 조명하여달라고 깊~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성전을 허무시고 우리 몸을 거룩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즉 우리 안에 주님 거하실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임하여 좌정하고 계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말씀, 복음 전하라는 이러한 말씀을 전도하는 사람 따로 선교하는 사람 따로라고 생각하신다면 딱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남을 정죄하고 비판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하라는 새 계명입니다. 옛 계명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릴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 즉 우리 안에, 우리 마음에 하시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두 돌판을 여전히 두 손에 쥐고 이것을 내가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벌벌떠는 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정말정말 놀랍게도 우리의 이 더러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우리 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고 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주신 새 계명은 이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릴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말씀을 그저 한낱 초등학문의 숙제처럼 하라니까 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못해 지쳐 쓰러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주님 날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저 주님의 사랑하는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네 주님,, 제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 힘주시면, 주님 능력주시면 고난을 받을지언정? 이 말씀 전하는 일에 제 직무를 다 하겠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이길 힘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고 그저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지요…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자들만이 이 말씀을 듣고 중간에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복음 전하기 위해 날마다 운동장에서 뛰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한 마리의 잃은 양 찾기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위대한 직무를,,,,,,,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거룩하고 귀한 직무를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우리가 과연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분의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제자’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그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를 보석보다 존귀한 자들로 우리를 지으시고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이, 그 재판장이신 주님이 맡기신 이 사역을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자들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저 하늘의 영광스러운 의의 관을 씌움받기 위한 것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바울처럼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고 애씁시다. 복음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평생 달려도 다 갚지 못할 엄청난 가치관입니다. 앞으로 새생명전도단, 도고기도단,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와 구제 등 여러가지 전도하고 구제하며 복음 전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를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되었고, 조금 늦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는 자들이기에,,, 계속하여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함께 달려가길 소망합니다.
마지막 말씀 보시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받으시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이 사모함을 가져야 될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반드시 주가 주실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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