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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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 1:22-23(신약 310쪽)
설교제목: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Ephesians 1:22–23 NKRV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참 행복합니다.’
# 축복후
오늘은 교회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 분들께서는 ‘교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을 텐데요. 예를 들면, 십자가, 종탑, 예배당, 교우들, 사역자들 그 외 교회에서 했던 여러 활동이 생각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제가 지금껏 지나왔던 교회의 건물과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 그 속해서 했던 여러 활동이 떠오릅니다.
제게 있는 오래되고 강렬하게 남은 기억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중학생이던 때였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성극을 준비했는데요. 제가 교회 간 아내를 잡으러 온 남편 역할이었습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술에 취해 막무가내로 교회에 쳐들어가서 아내를 데리러 오는 장면을 연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추측해보면 이를 통해 교회에 발을 들인 남편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일 겁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사실 제가 내향적인 성향이라 그것이 제게 참 힘들었습니다. 얼굴에 매직으로 수염을 덕지덕지 그리고서요. 술에 취한 연기를 하면서, 큰 소리로 대사를 내뱉어야 하는 모든 것이 제 성향과 기질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하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그 역할에 따른 한 장면이 아주 선명히 기억납니다. 당시 제가 속한 교회 본당 입구에서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와서요. 아내 역할을 맡은 친구에게 다가가 소리치며 밖으로 끌고 나가려던 장면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추억이 됐지만, 당시에 제게는 아주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저를 변화시켜갔다고 말입니다. 아마 저의 성향과 기질대로만 삶을 살았다면 결코 그러한 활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되도록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거나, 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으로 바뀌는 그런 극적인 변화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요. 분명 교회는 저 자신을 넘어서게 하고 저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곳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관한 생각이나 추억 말고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답부터 말씀을 드리면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로 사용된 단어가 본래 그러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좀 복잡할 수 있지만요. 한번 들어보세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교회는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민회’를 뜻하는 말인데요. 쉽게 말하면, 특별한 활동을 위해 참여하는 모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성경에 사용한 것은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 ‘카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카할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히브리어 카할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에클레시아’라고 했습니다. 또한 에클레시아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인데요. ‘밖으로’라는 뜻을 가진 ‘에크’라는 단어와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니깐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우리가 교회입니다’라는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생각할 것은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또는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움직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저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다움을 이루기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관련해서 2017년에 나온 뉴스앤조이 기사의 일부를 잠깐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내용이 좀 불편하게 다가오실 분들도 계실테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기사의 제목이 이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들의 ‘추락’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금란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통한다. 수십 년 전 교회를 개척한 조용기 목사와 김홍도 목사는 한국에서 '메가처치' 시대를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례없는 교회 성장을 이루며 이름을 떨쳤지만 말로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조용기 목사는 2017년 5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주식거래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50억이 넘는 피해를 끼쳤다. 김홍도 목사는 '사문서 위조, 위조 사문서 행사, 무고, 명예훼손, 사기 미수'로 재판을 받아 왔다. 원심은 명예훼손만 유죄로 인정했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김 목사가 서류 내용이 허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 2017년 6월 7일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김 목사는 다시 법정에 서야 할 처지에 놓였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돈'이다. 조 목사는 큰아들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교회 돈으로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이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김 목사는 미국 선교 단체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선교 단체는 지원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김 목사는 이 과정에서 위법을 저지르면서 법정에 서야 했다.
[출처: 뉴스앤조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들의 '추락'
물론 이것은 일부 교회의 문제이거나 일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에 소개되는 교회는 이렇게 나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 이것은 바꿔말하면, 영향력 있는 교회 또는 성공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교회는 본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일부 교회의 문제가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일부 교회의 문제 또한 우리 교회의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세계가 놀랄 만큼의 큰 교회를 이루었는데요.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교회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또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요.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성경적 교회관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교회를 건물로써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교회의 규모와 시설에 마음을 크게 둡니다. 그래서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지, 얼마나 좋은 시설과 넉넉한 공간을 갖추고 있는지를 더 주목하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에 제가 다른 곳에서 사역할 때요. 이러한 문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어린이 예배가 있는지, 있다면 몇 명이 모이고, 어린이를 위한 시설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것이 교회를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교회가 그와 같은 가치로 평가되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앞선 기사에서 돈 문제를 일으킨 목회자들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생각해 봅니다. 해당 목사님들은 젊은 시절에 교회를 개척해서 이른바 메가처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룩한 분이시죠. 그런 역사가 한편으로 교회를 더욱더 열심으로 섬기게 했을 테지만요. 또 다른 다르게는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주인 행세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통해 교회는 세워지고 교회는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그것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 입니다. 다시 한번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 22-23절(신약 310쪽)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Ephesians 1:22–23 NKRV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건 제 생각은 아니고 이 분야에 전문가인 한 신학자의 설명인데요. 그분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말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를 이룹니다. 앞서 잠깐 언급을 했는데요. 오늘날 우리는 여러 지역과 나라에 흩어진 개별교회로 존재하지만, 이 모든 교회가 전체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각각의 개별교회가 모여서 전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개별적인 단체들의 합자회자가 아니다. 개별교회가 모여서 전체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요. 전체교회가 나뉘어 개별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 자체가 여러 곳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황등교회도 앞서 부정적으로 소개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금란교회도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에 상관없이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그 몸에 가치나 역할에 있어서 차별은 없습니다. 모두가 귀한 주님의 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유기적입니다. 예를 들면,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의 어떤 곳에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가령, 우리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른 신체의 부위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 몸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 두통이 오면 어떤가요? 머리가 아픈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온몸이 아픈 것처럼 힘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임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누고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나와 함께 예배하는 분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아픔과 그 슬픔과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지만, 그것이 아무런 색깔도 없고 아무런 차이도 없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다양성이 있고 그에 따른 고유성이 존중되는 곳입니다. 대표적인 것을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장 4절(신약 277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성령의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은 여러 종류의 은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것을 몸의 비유해서도 얘기하는데요. 우리의 한 몸은 각각의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지체들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요. 눈이 입을 대신할 수 없고 코가 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유한 지체들이 각각 제 기능을 다하고 그러함을 통해 온전한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각 사람이 존중받고 인정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 것이 아닙니다. 각각 받은 은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고 그 은사에 차등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일컫습니다. 몸은 머리를 따릅니다. 머리가 사라진 몸은 작동하지 않는 것이고,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와 결합하여 있어야 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또 우리가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머리가 되려고 하거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분리되려고 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 앞에 무너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혹은 그것을 대체할 많은 종류의 우상을 세웁니다. 우상이 꼭 신의 형상을 새겨놓은 어떤 구조물이라고 생각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가치와 생각들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마저 하나님보다 앞세 우는 경우에는 우상이 됩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곳이 교회입니다.
끝으로 다섯 번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자라는 곳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중요한 얘기이니깐 성경을 같이 찾아보면서 얘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5-16절(신약 314쪽)입니다. 찾아서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Ephesians 4:15–16 NKRV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말해줍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앞서 우리가 나눈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덧붙여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함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교회는 완성된 곳이 아닙니다. 완성을 이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완벽한 교회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교회의 모습에 관해서 되짚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교회가 하나를 이룬다고 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 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밖에 있는 교회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앞서 소개해드린 뉴스 기사와 같이 교회의 부정적인 사건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아마도 그 교회를 비판하거나 우리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 밖에 이야기에 관심하지 않고 또 우리는 이 시대 속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의 문제에 관심갇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 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까?
또 교회는 유기적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몸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아프다고 했는데요.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 교회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삶을 나누는 곳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가보면 그것이 더 확연해집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유기적인 공동체입니까?
그리고 교회는 다양성과 그에 따른 고유성이 존중된다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교회는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도 점점 구성원들이 채워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싫어하고 순수하게 열심히 따르는 이들만을 선호하지 않습니까? 뿐만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과 관심와 문화가 소통을 다양하게 하기보다 서로를 제한하고 관계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정 우리는 고유성을 인정하는 공동체입니까?
끝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곳이라고 했는데요. 교회에 왜 그렇게 서로 머리가 되려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가려지고 또는 대체되어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많은 것들로 교회가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소개한 대형교회만이 큰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대부분의 교회가 오늘 성경이 말하고 또 그것에 근거한 교회다움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이 땅에서의 교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앞서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의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교회는 ‘자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란다는 것은 여러 시행착오와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하기까지 그 말을 2만 번 이상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통 생후 8개월에서 12개월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한다고 하는데요. 물론 그것보다 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요. 또 아이가 걷기까지 필요한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목을 가누고 뒤집고 배밀이하고 기어 다니고 잡고서며 비로소 걷기에 이릅니다. 이 모든 과정에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라는 것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막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걷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자랄 때까지 기다리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바로 그렇게 자라는 곳입니다. 앞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가 길게 떠들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완성된 곳이 아니라, 완성 되어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라고 성숙해지기 위해 끝임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용납하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저는 설교의 시작에 교회가 저를 변화시키는 곳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변화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더딘 과정을 거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이 용납받고 사랑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누군가는 더 용납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누군가는 더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변화로 이끕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를 평가절하할지라도 교회는 그렇지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끝임없이 우리가 자랄 것을 믿고 기다리며 인내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이러한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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