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의를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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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72:1-4(구약 854쪽)
설교제목: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십시오.
Psalm 72:1–4 NKRV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보게된 어떤 드라마가 있습니다. 최근 SBS에서 방영중인 드라마인데요. ‘국민사형투표’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드라마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진 않아서 내용을 세부적으로는 모르는데요.
대략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범죄에 관한 처벌이 온당하지 못하니,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정당한 죄값을 치루지 않은 범죄자를 국민투표로 사형에 처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법을 수호하는 경찰과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이런 일을 벌이는 강아지탈을 쓴 인물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과연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분명 우리는 때때로 범죄자들의 처벌이 온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근래에 석방된 범죄자 중에 조두순이라는 아동성폭행범이 있습니다. 아마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서 잘 아실 겁니다. 8세의 초등학생 아이를 성폭행하였고 그것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최근에 출소하였습니다. 이에 분괴한 시민들이 그가 출소할 때 몰려가서 그의 출소의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끔직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이는 그 끔찍한 기억이 다 지워지지도 않은채로 어쩌면 또 다른 불안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법의 집행이 그 경우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죠. 또 우리가 근래에 이슈가 되었던 이중에 정명석이라는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석방이 되었는데요. 그의 추악함이 최근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잘 보도가 되었죠. 이렇게보면 세상에서 집행되는 법이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법의 문제를 꼬집고 또 보다 속시원한 처벌이나 복수를 하는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들이 근래에 성행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건 최근에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홍길동전도 따지고보면, 악한 이들이 잘먹고 잘사는 모습에 분괴해서 이른바 의적으로 분한 홍길동의 모험담을 통해 당시 양반이 아닌 일반 민중들의 마음을 시원케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 한 것인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 1. 정의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
그렇다면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처럼 온전한 법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범죄자를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하에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까?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 격에 해당하는 한 경찰이 국민사형투표를 일으키는 인물에게 가닿도록 언론을 통해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정의로운 것 같지, 당신은 결코 정의롭지 않아. 당신도 결국 살인자에 불과해. 누가 당신에게 심판의 권리를 주었지.’ 저는 이말이 퍽와닿았습니다. 기분상으로는 악질 범죄자를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속시원하고 옳아보이는 것 같은데, 실상 그와 같은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단 말입니까?
물론 오늘날은 경찰과 같은 사법기관이 그것을 주로 행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법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기관이기 때문이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실수와 허점이 있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앞서의 이야기처럼 만족스러운 판결이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 국민정서에 우리가 법의 집행자라면 더 확실하게 처벌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회법적인 테두리를 넘어서 신앙 안에서도 심판의 영역은 인간에서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아는 대표적인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여기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 우리는 결코 심판자가 아니고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정의는 없습니다.
< 2. 정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
반대로 말하면, 정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시라고 이름붙은 이 시는요. 마치 다윗이 왕위를 이어받는 솔로몬을 위한 기도처럼 보여집니다. 그 외에도 이 시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어떤 왕이 되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왕은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왕의 판단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력에 다른 것임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정의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왕은 그것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신학자 김근주 교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공의와 정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고 공의 그의 표현으로는 공평은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와 정의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것이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정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경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게 여겨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 3. 하나님의 정의는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종의 일력시장 같은 곳에 가서 일꾼을 데려와서 자신의 포도원에 일을시킵니다. 아침 일찍부터 데려온 일꾼도 있었고 일이 마치기 약 한 시간 전에 데려온 일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꾼들에게 차별없이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지불합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온 일꾼들이 반발합니다. 자신보다 적게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우리는 그것보다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이를 거절하며 이야기 합니다. 처음부터 품삯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한 것이니 그 이상하도 그 이하도 줄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비유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의미에선 주인이 노동착취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 본문을 놓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연구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에 해당됩니다. 달리 말하면 한 데나리온을 집으로 들고가야 그날 하루 자신을 포함한 식구들이 편히 먹고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사실 그들의 일꾼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댓가를 차등없이 지불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언뜻 하나님의 정의는 이상해 보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기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한만큼 그 댓가를 받는 것이 정의롭고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는 내가 많이 일하면 많이 받고 적게 일하면 적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다름입니다. 적게 받는 사람도 생명을 위협당하지 않도록 필요한 양만큼을 주는 것이고 적게 받는 사람의 몫을 다른 사람이 빼앗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도 이렇게 나옵니다. 다같이 시편 72편 4절(구약854쪽)을 같이 읽어봅시다.
Psalm 72:4 NKRV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하나님은 마치 약자들의 편인 것처럼 가난한 백성, 궁핍한 자를 도우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부자나 넉넉한 자를 도우라는 얘기는 성경에서 구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다소 편향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약자를 보호함을 통해 어느 누구 소외되지 않는 가장 완전한 정의를 이루고 계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따를 정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 섬기는 것 말입니다. 물론 모든 약자가 정의롭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약자를 살아갈 수 있게 하여 모든 사람이 온전히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바라건데 저는 오늘 우리가 나의 기준과 나의 생각에 따른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정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가운데 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관심하고 그들의 생존에 힘을 보태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서 오늘도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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