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의 복

팔복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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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4
한 10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루이카스’ 혹은 ‘루활’이라고도 하는 모임이 아주 활발하다고 합니다. 이 ‘루활’은 우리말로 하면 ‘눈물활동모임’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이 루활에 대해 정보를 찾아보니까 이렇게 설명합니다. “울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눈물을 흘리며 심신의 치유를 도모하는 활동모임” 즉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슬픈 영화를 보고 슬픈 노래를 듣고 또 슬픈 드라마를 보고 실컷 울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모임이라는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요. 이 루활이 처음 시작될 때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갈수록 남자들 그것도 4·50대 중년 남자들이 30%가 넘을 정도로 큰 유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저같은 40대 후반에 남성의 입장으로 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슬픈 영화를 본다고해서 막 통곡하면서 우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내용을 보면서 이렇게라도 그 마음에 있는 쌓인 스트레스를 그 풀려고 하는 현대인들의 그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씁쓸하더라고요.
심지어 일본의 눈물 치료전문가들이 이런 눈물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내놨는데 그 첫 번째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마음껏 울어라” 그리고 두 번째가 “실컷 울고 난 후에 마무리는 긍정적으로 해라” 그다음 세 번째가 “울음 참기를 강요받아온 남자는 더 격렬하게 울어야 한다”
저는 이런 조언 중에서 맨 앞에 나오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마음껏 울어라” 물론 이런 모임에서 그냥 낯선 사람 앞에서 슬픈 영화 보고 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울음을 이해해주는 사람 앞에서 울어야 그 눈물이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교회라는 공동체만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한 교회에서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 40년 신앙생활을 함께 해 온 분들과의 관계야말로 루활 모임보다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식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고인을 개인적으로 알든 모르든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지만 믿는 자들의 애도는 먼저 찾아가서 아픔과 슬픔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지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한 방법이지 않을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박영호 목사님이 쓴 「다시 만나는 교회」라는 책을 보면, ”좋은 교회는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면제될 것을 약속하는 교회가 아니라, 아플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참 옳은 말 아닌가요?
그런가하면 제가 청년 사역을 할 때는요. 설교만 하러 올라가면 일단 울음을 참는 게 제 일이었어요. 그 당시 한 120명 되는 그 청년들이요. 한 주간 이리 터지고 저리 깨지고 정말 더이상 갈데없어서 이 예배당에 위로받으러 나왔거든요. 제가 그 얼굴들을 보면은요.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요. 여러분. 지금은 제가 어떨까요? 지금은 웬만해서는 눈물도 안 나와요. 제가 청년 사역을 할 때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애통함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늘 가난해지고 영적으로 파산신청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영육 간에 배가 불렀는지 눈물이 마른 저를 보게 됩니다. 목회 경력이 쌓일수록 영적으로 오히려 메말라 버리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팔복의 두 번째 말씀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절 합독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같은 본문을 새번역 성경을 보니까 “슬퍼하는 사람”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팔복의 사람은요. 각기 여덟 가지 다른 성향을 지닌 여덟 명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각기 여덟 명의 다른 복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고요. 이 팔복은 한 사람입니다. 이 한 사람이 이런 양상도 보이고 저런 양상도 보이고 또 다른 모습도 보이고 이것들을 정리해 놓은 게 팔복이거든요.
그래서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의 가난을 말씀드렸는데요. 영적인 측면에서 가난 다시 말해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나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력한 파산된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게 ‘애통’이라는 거예요. 이 흐름을 아시겠죠? 이 팔복을 가지고 어제는 A라는 사람의 모습이고 오늘은 B라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정말 나는 심령이 가난하다’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저절로 나오는 게 눈물 아닌가요? 애통함이죠. 그 일본사람들처럼 모여서 슬픈 노래나 영화를 보면서 ‘이래도 안 울래?’ 이러면서 인위적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애통’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펜데오’는 일반적인 슬픔이나 울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영화보다가 흘리는 눈물 정도의 그런 슬픔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울음, 창자가 끊어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한 울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린 울음이 바로 펜데오 ‘애통’입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장례가 나면 부잣집에서는 돈을 주고 곡(哭)하는 사람을 사서 문상객이 오면 곡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추어 베옷을 입은 상주들도 일어나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곡을 하다가 문상객이 떠나면 곡소리도 끝났습니다.
실제로 제가 막 결혼했을 때 시골에 사시는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인데요. 그때 기억에 남는 게 상주인 사촌 형님이 상복을 입고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람들과 대화하고 술자리도 같이하고 하다가 조문객이 오면 “아이고 아이고” 상주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아이고 아이고!”하는 울음에서는 아무리 친척이지만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사촌 형제들이 언제 진짜 울었는지 아세요? 고인의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을 나갈 때 그제야 떠나보낼 수 없다는 듯이 관을 붙잡고 울더라고요. 그때는 체면도 격식도 없어요. 생전에 큰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한자어를 번역한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이 ‘펜데오’를 슬플 ‘애(哀)’자에 서럽게 울 ‘통(痛)’자를 붙여 애통(哀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자를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참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통' 자를 '아플' 통(痛)으로 바꾸어 '통곡(痛哭)이라고 하고 '애곡’(哀)이라고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깊은 슬픔’에서 우러난 '고통스러운 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조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애통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지, 원망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통과 원망은 분명히 다른 것이죠.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쓴 <관계 훈련>이라는 책에 보면 이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탄식을 명령하고 원망을 금하셨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탄식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고 원망은 하나님에 관해 원망하는 것이다. 탄식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원망은 하나님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되시죠? 원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지만, 애통은 하나님을 얻는 길이 됩니다. 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애통은 오히려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런 '애통'을 잘 표현한 장면이 어딘지 아세요? 바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형들 때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월을 참고 견디다가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을 데리고 왔지만, 이미 노쇠해 버린 아버지는 오래 살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게 되잖아요?
야곱이 사망한 후 “나를 조상들의 묘지에 묻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요셉이 형들과 함께 상여를 메고 애굽을 출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이를 때 창세기 50장 10절을 보니까요. “크게 울고 애통했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를 위해 칠일 동안 '애곡’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의 일곱 편의 회개시 중의 하나인 시편 6편에서 다윗은요. 그 어떤 시편에서보다 다윗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 탄식하는 내용도 있지만, 자신의 쇠약해진 심령을 잘 표현한 구절이 6절인데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여러분, 이게 바로 애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제가 읽어드린 것처럼 다윗이 그렇게 얌전하게 애통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탄식함으로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십니다. 오 주여!” 이게 바로 다윗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었던 진짜 심령이 가난한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요셉이나 다윗과 달리 하나님의 등 뒤에서 원망하는 자는 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징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 저뿐만 아니라, 성도님들을 보면 너무도 메말라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심령이 메마르고 보니까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누군가가 실수를 하면 이상하게 짜증부터 나는 거예요. 제 안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장판 속에 숨어 있던 습기가 되어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더라고요. 때로는 교인들의 안타까운 상황에도 겉으로만 “아이고 아이고!”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저같이 메마른 채 “아이고 아이고!”만 할 때는요. 슬픈 영화나 노래를 들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메말라버린 심령을 회복시켜야 할 애통의 자리로 나와야 해결이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지 왜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애통함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까? 바로 자기의 죄를 두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레위기의 제사가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등 각을 떠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놓고 왜 그리도 복잡한지 아십니까? 정결법을 판정하는 기준은 왜 그리도 많을까요? 그만큼 죄의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죄들을 해결하려면 복잡한 죄들을 파악하고 각각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단 한 번의 제사로 이렇게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축복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제 다시는 복잡한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죄가 없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지 우리가 진짜 죄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흠 없는 어린양’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죄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중독의 문제로 거짓과 탐욕의 문제로, 숨기고 싶은 어두운 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큰 해를 입하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흔들어 놓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균실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코로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백신접종을 3차까지 완료하고도 확진이 되고 또 다른 변이 발생에 긴장했던 게 우리 인간 아닙니까? 다시는 구약의 복잡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큰 축복을 얻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죄에 대한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눈물 흘리고 슬퍼한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더 애통해하고 슬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희에 찬 눈물과 감격도 있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애통함이 생기는 것이죠. 그것은 슬픈 영화 몇 편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두고 애통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피 흘림 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가 없다고 선언해 주셨고 그렇게 단 한 번의 제사로 정결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자리에만 머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제사로 죄사함의 정결을 얻었지만, 거룩을 향해 달려 나가지 못하는, 내 안에 여전히 나를 묶어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으려는 이 어둠의 역사들, 내 안에 죄성들을 두고 애통하며 십자가에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어준 분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아무런 고민도 노력도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엄중하시고 단호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함에 애통해하는지 모릅니다.
애통함에 대해 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데요. 제가 전도사 사역을 할 때요. 그날은 평범한 수요예배였습니다. 당시에 앞에서 찬양단 싱어를 하는 한 자매가 있었는데 교회 직원이었거든요. 그런데 좀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찬양을 부르다가 갑자기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찬양을 하는 도중에 내려오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요. 어떤 찬양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런데 자기 안에 정결하지 못한 부분 때문에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그 자매가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요. 사실 좀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직원이었다고 했잖아요? 제가 교역자라는 권위만 내세우고 ‘복음은 이런거다’ ‘찬양단의 자세는 이런 거다’ 가르치려고만 했지 사실 저는 그런 애통함을 잘 몰랐거든요.
여러분, 그 자매처럼 하나님의 임재로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일수록,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추악한 우상을 발견하게 되고 죄를 경계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전에는 죄를 멀리하는 게 어려웠는데, 나를 살리사 나의 죄를 대신해 죽은 저 십자가의 구원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내려는 애통함이 있는 자들에게는 죄를 가까이하는 게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나를 주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이제야 다윗의 심정을 좀 알겠고요. 바울이 그 자신을 한탄해 하면서 죄인 중에 괴수 같다는 말을 왜 했는지를 알겠어요.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애통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는지, 몇 마디의 말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설명하려 했던 값싼 구원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내 안에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정말 위로가 되는 것은요. 우리가 애통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늘 말씀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세요?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유진피터슨의 <메시지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화면/합독)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우리 교우님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보셨습니까?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심으로 혹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경험하신 적 없으십니까? 어떤 분은 건강을 잃고 어떤 분은 사랑했던 가족을 잃으므로 더욱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분명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때야 비로소 진짜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것과 자기 혼자 애통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 없이 애통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의 애통은 자기 앞에서 자기가 우는 것입니다. 애통함을 하나님 없이 나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은 결코 복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통하는 만큼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배이도록 애통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 즉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억에 남는 그림이 하나 있는데요. (화면)
19세기에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겟세마네의 예수>입니다. 여러분, 저 그림을 보세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돌덩어리 위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곧 닥칠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누가 그렇게 얌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을까요? 엎드려져서 애통하고 통곡하며 “제발 이 죽음의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를 마친 후에는 제자들에게 “자, 이제 가자, 일어나라 시간이 되었다”하고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쓰러지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쓰러지세요.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오히려 진짜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애통하는 자의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애통함으로 한 평생을 살면서 많은 시편을 썼던 다윗 그의 인생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그 다음이 뭐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자신의 부정한 죄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도 없이 지나왔던 다윗,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고 왕으로서의 명예가 추락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없던 그가 유일하게 매달렸던 기도는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었기에 한평생을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다윗에게 진짜 소중한 분은 바로 목자이신 주님이셨고 다윗의 유일한 위로는 바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애통함과 이러한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연우 목사님이 쓴 <피로교회를 넘어 필요교회로>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애통함과 더불어 장차 하나님의 선하심이 온전히 드러날 ‘그날’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없다면, 애통함은 포기와 절망, 그리고 냉소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애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것이 최종 마침표는 아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반드시 회복과 구원으로 끝난다. 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애통하지만 소망하며, 소망하지만 애통할 수 있다.”
“애통하지만 소망하며, 소망하지만 애통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그 애통함에는 그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그 위로를 얻게 됩니까? 오늘 애통해하면 내일 위로해 주십니까? 아니요. 진정한 위로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나를 높은 자리에 올려주고 배부르게 해 주는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질 것들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을 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애통하지만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날이 임할 때까지 죄와 싸워 피흘림이 있더라도 소망 가운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등 뒤에서 원망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와 애통하며 통곡하더라도 소망 가운데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때,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는 주님이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아바 아버지
❙합심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웃는 게 복음이고 울음이나 애통은 뭔가 좋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요. 마른 눈이 아닌 젖은 눈을 가진 성도가 훨씬 더 은혜의 깊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죠? 나를 이해하는 분 앞에서 울어야 한다고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슬픔과 고난이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애통을 통해 하나님의 진짜 위로를 경험하시길 원해요. 이 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강퍅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실컷 울고 싶지만 슬픈 영화 한 편 본다고 그것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분 앞에서 울어야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는 이유는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여전히 정결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 때문에 애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가장 소중한 분이신 예수님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애통한 자의 진정한 복인 소중한 주님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또한 여전히 애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반드시 회복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기대하며 애통하지만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가장 소중한 분이신 예수님을 얻기 위한 애통함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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