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새사람(골 3:12-14)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0 views
Notes
Transcript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새사람(골 3:12-14)
INTRODUCTION:
(Image) 2010년 4월 20일, 영국의 석유회사 British Petroleum이 운영하던 원유 시추시설(Deepwater Horizon)이 미국 Louisiana 주 남동쪽으로 약 60km 가량 떨어진 바다 속에서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로 해저의 원유를 시추하기 위해 팠던 시추공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파괴된 구멍에 뚜껑을 씌울 때까지 87일 동안 약 490만 배럴이라는 엄청난 원유가 바다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하루 원유 소비량이 약 250만 배럴이라고 하니 거의 이틀 치 분량이 대책 없이 바다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고를 해상에서 발생한 최악의 인재(人災)라고 말했습니다.
피해 보상금만 약 200억불, 우리 돈으로 약 24조에 달했고, 사고 이후 멕시코만 바다의 밑바닥을 유령처럼 떠돌던 까만 기름 기둥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원유의 유출이 멈춘 후에도 기름 기둥은 사라지지 않고 바다를 떠돌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자정(自淨, self-cleaning) 능력은 예상보다 뛰어났습니다.
사고 이후 1년이 지난 2011년 4월 한 연구단체에서 그 주변 깊은 바다에서 채취한 170여 개의 표본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다 속을 떠돌던 원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깊은 바다의 기름 기둥이 사라진 이유는 엄청난 수압과 심해의 박테리아 때문이었습니다.
육지에선 물과 잘 섞이지 않는 기름이 막대한 수압이 가해지는 심해의 극한 조건에서는 작은 입자로 부서져 버렸고, 거기에 더해 박테리아들이 그 원유를 다 분해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Nee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과연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고, 사고를 계속 치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과연 나는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까? 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운 큰 일을 저지르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구제불능이라고 단정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더 이상 새롭게 될 수 없는 절망이라는 상자 속에 언제까지나 그렇게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Subject)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4조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만큼 바다의 생태계를 위협했던 기름의 유출처럼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크고 깊은 바다에 잠기면 우리도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 당하면 우리도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2-14은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Text & Preview)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2-14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Identity).
둘째,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이 새 사람인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라는 것입니다(Virtue).
끝으로, 이런 덕목을 갖춘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이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Practice).
BODY:
(Background)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1-4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5-11절을 통해서는 옛 사람의 잘못된 행위는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나와 너의 차별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Exegesis)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12절의 첫 머리는 접속사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성도들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그 새로운 정체성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첫 번째 사실은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I. 성도들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12a, identity).
오늘 본문 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새 사람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들이며, 거룩한 자들이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 시대에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또한 선택했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이집트에서의 탈출, 광야에서의 율법의 수여, 그리고 광야 2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감으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신명기 7:6-7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 구절은 먼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민족 중에 숫자가 가장 적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셔서(qv;x', love), 다시 말해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하나님이 저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저들이 거룩하게(vAdq')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룩은 구별됨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것(distinction for God)’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선택은 선택 받은 백성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 언약시대에 하나님은 너와 나의 구분 없이 각 사람을 친히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그 선택의 배경에도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놓여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이 그 사실을 말씀합니다(cf. 출 19:5-6).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선택 받았고, 선택 받았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12절에서 같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사랑, 선택, 거룩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된 것 또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새 언약백성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여전히 볼품 없지만, 약하지만, 때로는 악하기까지 하지만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결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된 선택 때문에, 이제 우리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감당해 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두 번째 사실은, 새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관계된 것으로,
II. 새 사람은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2b, virtues).
오늘 본문 12절 뒷부분은 새 사람의 신분을 소유한 성도들이 덧입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5절의 죽여버려야 할 땅에 있는 지체 다섯 가지(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와 8절의 벗어버려야 할 마음의 생각과 말 다섯 가지(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입의 부끄러운 말)와 숫자적으로는 일치하면서 내용상으로는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먼저, ‘긍휼’은 자비로운 마음(a heart of mercy, spla,gcna oivktirmou/)을 의미합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신체 부위 중 내장(entrails, bowels, 창자)이 마음이나 감정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자비의 내장’(entrails of mercy)이 되고, 의미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진정으로 동정심(compassion)을 느끼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자비’(crhsto,thj)는 너그러운 마음(generocity)이나 친절함(kindness), 선함(goodness) 등을 지칭합니다.
사실 이 자비 곧 친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식까지도 새로워진 성도들 또한 친절함을 옷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겸손이 내면의 덕목이라면 이 친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외면적인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그래서 관대함(generosity)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는 취향이 전혀 다른 사람도 넉넉하게 받아주는 것이 자비 곧 친절입니다.
‘겸손’(tapeinofrosu,nh, humility)은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골로새교회 안의 거짓 선생들은 자신의 몸을 학대함으로써 겉으로 보이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겸손을 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보이는 겸손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낮고 천한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런 겸손을 의미합니다.
‘온유’(prau<thj, gentleness, considerateness)는 상대방에 대해 부드럽고, 배려심이 많은 것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지나칠 정도로 내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인양 착각하지 않는 것이 또한 온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게도 저주나 악담 대신 진정한 도움을 주기 위해 따끔한 충고를 할 수 있는 것이 온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덕목은 ‘오래 참음’(makroqumi,a, patience, steadfastness)’입니다.
무조건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시간이, 어색함의 시간이, 실패의 순간이 그저 막연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하루의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것이 인내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인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언젠가는 인간들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방치하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중에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계획을 성실하게 준비하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누가 이 땅에서 이 다섯 가지 성품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진정으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셨고, 불순종하는 우리를 향해서도 언제나 친절한 인도자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3:14에서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cf. 갈 3:27).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까지도 새로워져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며, 예수님이 소유한 성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답게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이와 같은 새 사람의 성품을 소유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으로,
III.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3-14).
다섯 가지 아름다운 성품으로 옷 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의 삶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13b).
여기서 ‘용납’(avne,cw, endure, put up with)은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면에서 부족하고 못마땅하지만 끝까지 참아주면서 그 사람이나 환경이 성숙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자녀들이 여러 번 실수를 반복하며 부모들의 속을 썩이지만 끝까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용납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모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공동체를 성숙시켜 가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용납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집니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나, 이기적이고 교만한 나, 주목 받지 못하고 소외된 나, 절제되지 않은 감정표현으로 좌충우돌하는 나, 성공체험은 없고 실패만 거듭하는 나,
그런 나 때문에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만, 그런 나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면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을 경험하는 나로 변할 수 있다고 믿고, 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이 또한 용납입니다.
한편, 용서(cari,zomai, forgive, show oneself to be gracious)는 어떤 것입니까?
용납과 비슷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상대방이 구체적인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불만’(momfh,, blame)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용서해 줄 가치조차 없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용서입니다.
사실 속이 밴댕이 속처럼 좁은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며 나의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면 우리도 용서의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13b)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4절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avga,ph)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더하라는 것은 ‘사랑의 옷을 입으라’(put on love)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의 다섯 가지 덕목,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의 옷 위에 새로운 외투를 하나 추가해야 하는 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하는 역할을 14절의 뒷부분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전하게 매는 띠”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띠’(su,ndesmoj, sinews, fetter)는 단지 어떤 물건을 다발로 묶는 데 사용하는 ‘줄’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뼈에 붙어 있어 뼈들을 서로 작동하게 하는 ‘힘줄’(sinews)을 의미합니다.
또한 죄수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고정된 무엇인가에 단단하게 묶어두는 ‘족쇄’(fetter)를 의미합니다.
사랑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덧입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구비하고 용납과 용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이 새 사람의 성품으로 온전히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을 매개체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진정한 용납과 용서도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4:8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허물)를 덮는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다른 외모, 성품,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용납’입니다.
진정한 헌신이 그 속에 있다면, 공동의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 서로 다른 섬김의 모습까지도 기꺼이 용납해야 합니다.
설령 좌충우돌하며 실수를 반복해도 참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성실한 교회의 일꾼으로 키워내는 데는 그만한 기회비용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감정으로는 도무지 용서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가슴에 여러 명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우리를 욕하는 지체들을 우리가 결코 정죄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대부분도 사실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가진 이런 연약함 속에서도 이제 우리는 용납을 넘어 용서를 연습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의 힘으로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용납과 용서 위에 서로 온전하게 매어주는 사랑의 띠를 더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Application) 그렇다면 이런 진리를 깨달은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새 사람의 성품을 온전히 입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돈만 있으면 옷은 백화점에 가서든지 인터넷을 통해서든지 언제든지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의 성품은 하루 아침에 결심한다고 해서 쉽게 덧입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사람의 쓴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재발하면 우리의 옛 성품도 그 때 그 때 다시 발동해서,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격(character)은 변화시킬 수 없고, 관점(perspective)만 변화시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결코 아닙니다.
도덕 교육이나 사회운동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심지어 교회의 신앙교육도 한 사람을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세우는 일에 역부족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속 사람까지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넓고 깊은 바다와도 같은 하나님의 품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내가 완전히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kaino,j)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구절을 몇몇 헬라어 고대 사본들은 ‘모든 것(ta. pa,nta, all things)’이라는 말을 추가해서 “보라 ‘모든 것’ 이 새 것이 되었도다”(All things are become new, KJV)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 다시 말해서, 우리의 겉과 속이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도록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누군가를 용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면 우리가 안고 있는 관계의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보다 내가 받은 상처가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고 피해의식에만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새 사람의 좋은 성품을 제대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자꾸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다니면 악순환의 고리를 좀처럼 끊어버릴 수 없습니다.
혹시 근래에 아니면 오늘 아침 내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단지 미안하다고만 말하지 말고,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나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겠지만 저와 아내가 싸우면 100번 중 두 세 번을 제외하고는 제가 먼저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말합니다.
아내는 그러면 지난 번도 잘못했다고 말해 놓고는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며, ‘도대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냐?’고 저를 몰아붙입니다.
물론 그 중에 많은 부분이 진짜 제 잘못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편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저는 일단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하곤 합니다.
필요하면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내의 화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저도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으면 같이 맞붙어 싸우지만, 그래 봐야 서로 영혼의 코피가 터지고,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연애하던 10년, 더불어 살아온 지난 27년을 돌아보면 부족한 제가 더 많이 잘못했고, 더 많이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오늘 여기에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를 용서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혹시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용기 있게 고백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CONCLUSION:
(Closing Image)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 중 “내게 남은 날이 일주일 밖에 없다면”(And the Angels Were Silent)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지상생애를 뒤돌아보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표현 중에 이런 표현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모든 걱정일랑 벗어둔 채 힘껏 팔을 벌리겠습니다. 그분이 나를 편히 안으시도록”
(Closing Repetit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입니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의 옷을 입은 새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용납과 용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바다보다 넓고 깊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에 압도당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손에 붙잡고 있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히 안으시도록 하나님을 향해 힘껏 우리의 두 팔을 벌릴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멕시코 만의 기름 기둥이 다 사라졌듯이 하나님의 바다 같은 깊고 넓은 은혜에 압도 당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이 다 분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온전한 새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용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가가서 용서해 달라고 용기 있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우리 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예수님의 온전한 성품을, 예수님의 때 묻지 않은 의를, 예수님을 자신을 옷 입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후로 예수님을 옷 입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삶을 계속 연습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