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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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것을 알라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생소할 것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을 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여러분과 비슷한 또래의 나이에 처한 유사한 상황들 때문입니다. 시작하는 딤후 3:1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고통하는 때가’ 있다는 것이죠. 시대를 막론하고 젊은 청년의 삶이나 청소년의 시기가 ‘고통 받고 있다’는 유사한 인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 그런 고통을 자신이나 가족 때문에 고통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잘나가는 ‘마스크 걸’에서 학창시절 부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도 부모를 죽이고 싶다’ 물론 실제로 그런것이 아닌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요즘 시대를 반영한 대사라 생각하니 두렵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러지 못하니 자신을 자해하는 모습은 금쪽같은 내새끼와 같은 프로그램의 단골이고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도 이것을 반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세 번째 그러면 나와 가족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고통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것을 10절 이하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3가지 면이 젊지만 조금은 어린 쪽에 있는 여러분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눅8:19-21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도 어머니와 동생 말그대로 혈연의 관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라고 하신 말처럼 우리가 아버지 자녀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끝난 드라마 ‘연인’에서 딸의 친구를 자신의 친 딸처럼 길러줬고 나중에 보니 법적으로 입양해서 정말 가족이 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드라마이지만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이죠.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계였는데 바울을 만나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출신의 가정은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는 동네에 소문이 나고 그렇다면 얼굴들고 다니지 못하는 늘 주눅들어 있었음을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환경을 그리스도와 연결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회에서 늘 약자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어디 숨어서 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헬라인 공동체에서는 어머니 때문에 반대로 어머니의 유대계에서는 이방인과 결혼한 것은 혐오보다 더 지독한 차별, 저주에 가까운 상태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죠. 다음주 살펴볼 요한복음의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아예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따돌림을 하는데 그 이유가 이방인과 결혼을 해서 이룬 지역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사복음서가 끝나고 이어지는 사도행전부터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을 따돌림 하는 곳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었고 바울은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은 저의 경우는 불신 가정에서 하나님을 모른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늘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마음 한구석에 조심, 또 조심하면서 지냈던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만사가 오케일까요? 아마도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 나는 모태 신앙이지만 그래도 어려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과 같이 겪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 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하고 싶은대로 살지도 못하고 갖고 싶은 것도 갖지 못하고 살거나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뭐 잘되는 건 아니지 않냐’고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아는 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딤전 4:12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당시에 디모데는 생각보다 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리다는 것으로 그를 업신여겼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라고 말 그대로 어렵게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는 것이 행동으로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이유가 아는 건 많은데 행동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쟤는 아직 어린애구만’하면서 업신 여긴다는 것이죠.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의 사람들의 특징은 1)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 는 것이죠. 자기를 사랑하니까 돈으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자들은 특징적으로 ‘교만’하고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한다고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이 보는 것처럼 ‘돈만 있으면’ 갑질을 일삼고 마치 무엇인가 된 냥 허세를 부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모를 거역한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한 영화처럼 없는 상태의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계속해서 이들은 3절에 ‘무정합니다’ 공감대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모함하며’ , 절제가 없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배신하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어린 디모데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모습이 이렇다면 그곳에 함께 사는 나 자신도 쉽게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는 바로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앞서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전6:10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오는데 ‘돈만 있었더라면’, ‘돈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자랑하고 싶은데 명품 가방을 수십개가 아니라 하나라도 있으면, 돈이 많은 이들을 비방하고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나은 부모를 거역하는 곳까지 갑니다. 이것이 바로 ‘미혹’을 받는 것이죠. 교회에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떠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믿음이 없어서이지만 저 멀리 보이는 세상이라는 휘황찬란 여기에 사용된 단어 모두가 (빛날 휘, 빛날 황, 빛날 찬, 빛날란)에 현혹되는 것 요즘 아이들말로 삐까번쩍한 것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얼마 남아 있지 않는 청년들이나 청소년들도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돈이 좋다고 말합니다. 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로 이러한 세상을 아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비밀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시대, 돈으로 모든 가치를 정하는 시대에 보이지 않는 시대를 믿는 것이 뭐 중요하다고 그러신요라고 할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여러분 여름 장마가 심하면 뉴스에서 길 가운데로 걷지말고 벽을 따라 걸으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맨홀에 빠지면 목숨을 잃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 지하차도에 급속하게 물이 차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전에 비가 많이 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사를 단행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불감증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쉽게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위험한 곳, 안전한 곳, 일찍 다니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위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나를 만나서 예수님을 믿으니 너의 삶이 오히려 업신여김을 받는 것 같고 그런 것이 자기 탓 같은 것처럼 여기진다면 그렇지 않다. 네가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야 말로 그런 시대. 즉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무정하고, 절제없고, 사나운 시대를 거슬러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편하게 남들 하는대로 살면 아무런 고통이나 박해가 없습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즐기며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손 바닥만한 핸드폰의 세계에서 머물러도 되고 내 방이라는 세계에 갇혀서 삼시세끼 주는 밥 먹고 살면 될 것같은데 안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묻지마 폭행이나 불특정 다수를 살해하는 이들이 공부도 안한 지식이 없는 이들이 아니고 자기 범행을 사전에 네이버에 물어보고 조사하는 철저한 모습을 일반적인 사람들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첫 번째, 두 번째에 속해 자신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그래서 무차별적으로 화풀이를 해대는 것입니다.
바울은 놀라운 비밀이 마치 숨겨둔 보물지도를 꺼내는 것처럼 매우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0절의 ‘나의 교훈과 행실’ 즉 시간을 보내며 나와 동행하며 자신이 보여 준것, 그래고 보고 배운대로 행한 것 속에 있다. 11절 내가 ‘박해를 받았고’, 고난도 받았던 것을 너는 알고 있고 그런 가운데 나를 건져주신 ‘주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부모가 보여준 일들을 기억해 보라는 것, 부모와 함께 살면서 겪었던 어렵고 힘든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는 믿음이 12절 ‘경건하고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 때 여전히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있지만 올바른 길이이고 13절 세상의 악한 사람, 속이는 사람은 그대로 살것이고 그것에서 떠나 14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15절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바로 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는 사실로부터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험해 봤습니다. 다른 교회도 친구를 따라 가보았고 어떤 경우 재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5년 동안 다닌 교회에서 때로는 말씀이 좋았지만 어떤 경우는 사람의 말로만 들리는 것은 적어도 여러분의 귀가 듣고 반응하는 솔직한 것 즉 어려서부터 알았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아는 것으로만 이기지 않습니다. 딤전 4:12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려면 ‘오직 말과 행실’이 함께 하도록 자신을 깨워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두 장의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장은 진짜 해바라기 밭의 사진이고 한 장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입니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에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흐의 해바라기를 자세히 보면 모양도 이상할 뿐 아니라 어쩌면 시들어 버린 것 같기도 하고 꺽여 있기도 한 그런 해바라기 입니다. 그런데 왜 고흐의 해바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까요? 그림에는 해바라기를 아주 좋아한 고흐의 기쁨이 역설적이게도 화병 안에 넘쳐나듯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지금 시간을 저 자연의 그저 해바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담은 과정으로 성장시켜 가고 있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앞으로 있을 실기 시험 준비를 위한 기간이든 학기의 시작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학교의 생활과 얼마를 벌기 위한 고된 아르바이트의 시간이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날의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고 계시다는 것을 굳게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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