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0주일예배_빌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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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진정한 위로

본문: 빌립보 2:1-11
Philippians 2:1–11 NKRV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신학자요 동시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한결같이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포함된 빌립보서 역시 예외없이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는 기조로 일관합니다. 예컨대,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 같은 책이 마치 ‘날선 검’과 같은 책이라면 빌립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과도 같은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예리한 신학자로서 면모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자로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그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며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흔히 바울의 선교활동을 생각할 때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팔며 자금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펼친 소위 ‘자비량 선교’의 모습만 연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뒷받침해주는 교회들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후반부에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빌립보교회는 바울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 받은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들밖에 없습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여러 번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이롭게 될 풍성한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4:15~17) 그렇게 각별하게 뒷받침을 해준 빌립보교회이기에 아무래도 그 교우들에게 전하는 서신의 내용이 더욱 각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지금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제자 디도를 통해 절절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두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빌립보서 내용 가운데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 안에 나타난 어떤 문제의 상황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다소간 분쟁과 불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빌립보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로 그 문제부터 지적하며,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을 권면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머리를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이 물음으로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물음들은 새삼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이미 경험한 사실들일 것입니다. 그걸 새삼 환기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을 얻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로를 받는지,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 자비를 베풀며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전해진 말씀이자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간직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 아마도 초대교회에서 널리 통용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찬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내 놓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우리더러 품으라는 이야기는 윤리적 권면 이상을 의미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든지, 겸손하라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 구체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가치를 전환하라는 이야기이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거듭난 삶의 경지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소위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완벽하게 하나 되는 삶입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경지에 이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말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9절 이하에서 이와 같은 삶에 대역전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철저하게 자기를 비울 때 거꾸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죽었던 나는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되살아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누리는 ‘나’입니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얻는 나입니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버렸지만, 이제 거꾸로 나의 모든 것을 인정받고 나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경지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자기부정과 고통만을 동반한다고 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일 뿐입니다. 신앙의 궁극적 경지는 나 자신과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과 기쁨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인 통합의 경지, 그것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는 경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백성의 해방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로 세상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시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그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궁지로 몰아넣고 생명을 빼앗는 악순환을 거부하는 길입니다. 그 길로 모든 사람이 영광을 누리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매일 일상사의 걱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신의 말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3:11~13)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사람은 궁핍함을 겪거나 고통을 겪을 때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거꾸로 부유함을 누리고 배가 부를 때면 한없이 기고만장해집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작아진 느낌이 들고 큰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사람이 그런 심리를 느끼는 데에 어떤 진화 심리적 요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큰 차나 작은 차나 길거리에서 모두 달리는 차로서 똑같은 한몫을 하고 있을 뿐이고, 또한 동시에 모두 다 내 몸을 옮겨 주는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경우에나 모두 그에 맞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당장 주어진 조건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상대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진실을 깨닫습니다. 지금 자기를 자기 되게 하는 것은 지금 처해 있는 조건이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그것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근거이며, 그것이 바로 어떠한 경우에나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근거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진실을 마음에 새김으로 어떠한 경우에나 진정한 위로를 누리고 새 힘을 얻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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