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3 수요] 여러분의 빛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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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66 어두운 내눈 밝히사, 459 누가 주를 따라 본문 : 눅11:33-36 20년 전만 하더라도 백열전구를 사용하던 집들이 많았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께서 군인이셨기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까지 시골 곳곳을 누비면서 살았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수도시설이 없어서 약수물을 퍼다 쓰던 지역에서도 있어봤다고 하고, 전기가 안들어오는 시골 골짜기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께서는 야간당직하러 나가신 아버지없이, 전기도 잘 안들어오는 집에서 갓난 저를 데리고 긴밤을 두렵게 지내셔야 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오늘날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얼마나 환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당만 봐도 그렇지 않나? 요즘 전구 쓰는 집도 거의 없고, 길다한 형광등도 어두워서 LED 등으로 많이 교체하고 있지 않은가? 참 기술이 많이 좋아졌고,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시대이다. 시대가 변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전구가 만들어졌고, 전등마다 각기 모양도 길이도 다 다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결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그것은 빛의 용도이다.
예전에 사역하던 경남 하동읍 지역은 밤 9시만 되면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이 거의 다 꺼졌다. 24시 편의점도 없고 밤늦게 영업하는 술집도 없었다. 그냥 9시만 되면 거리는 온통 어두워졌고, 10시가 넘으면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릴정도로 고요해졌다. 아마도 새벽 일찍 밭일을 보러가야 했기에 일찍들 주무셨던 것 같다. 도심속 밝은 거리에 익숙했던 저는 그 어둑어둑한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이 참 두려웠었다. 길도 좁고, 양 옆에는 밭고랑이 있어서 자칫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으며, 또한 시야가 좁아서 언제든 고라니와 같은 동물들이 튀어나올 수 있는 길이었기에 엄청 조심하면서 운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럴 때 차의 헤드라이트가 얼마나 소중하던지. 밝은 빛으로 내가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도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빛’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성경 안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킬 때, 둘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리킬 때이다. 반대로 성경 속에서 어두움은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함, 그리스도를 모르는 완악한 불신앙 등의 의미를 가진다. 오늘 본문인 등불비유에 사용되는 ‘빛’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등불 비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빛’, Light 이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한다. 요한복음1:9-11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분, 방금 읽은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참 빛"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마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신다. 빛과 등불은 그 용도가 분명하다.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침침한 곳은 몸을 숨기기도 편하고, 내가 숨기고자 하는 것들을 감추기에도 용이하다. 그러나 밝은 곳에 있다면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밝히 보게 되고, 또한 숨겨진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로 물든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죄악들이 낱낱이 밝히 드러나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이 들고, 창피하고 부끄러워 빛가운데로 들어감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의 치부가 가감없이 드러나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세상에 속한 자들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차이가 나타난다. 나의 치부가, 나의 죄악이, 나의 연약함이 모조리 드러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빛 가운데로 나아간다. 모든 것을 밝히 비추시는 빛 앞으로, 산위의 동네라도 숨기우지 못할 그 밝은 빛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왜? 이 빛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모든 것을 밝히 비추시는 빛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저들은 그 완악함으로 인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을 뿐더러 더욱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복음의 밝은 빛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거부할 뿐이다. 오늘 본문 말씀의 문맥을 먼저 살펴보면, 14절의 사건과 연결되고 있다.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자 무리들이 주님께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보냈다고도 하고, 또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다른 표적을 구하기도 하였다. 악한 세대가 다른 표적들을 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저들의 불신앙과 편견으로 저들의 영적인 시야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고 빛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수 많은 말씀과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완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표적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저들은 왜 그토록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저들의 복음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죄와 탐욕과 편견 등으로 눈이 가리워져서 밝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 3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눅11: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주님께서는 몸의 등불이 곧 눈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의 눈이 무지함, 완고한 불신앙, 편견, 죄악과 탐욕으로 멀어버렸다면 우리는 복음의 밝은 빛, 생명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어떠한 믿음과 진리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수 많은 종교지도자들 역시도 죄로 인하여 저들의 눈이 가리워졌다. 그래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계속 어두움 가운데 거했던 것이다.
눅24:13-31 의 내용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록이 있다. 저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러나 16절에 보면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다. 그러나 떡을 떼어 축사하시며 저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에 31절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역시도 영적 무지함으로 저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들에게 성경을 일일이 풀어주신 후에야 그 눈이 다시 열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방금 읽었던 34절 말씀에 우리의 두 눈이 가려졌다는 것은 영적 무지함, 죄와 편견, 탐욕과 같은 것들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서 결국 온 몸이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신다.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영어 성경에서는 ‘full of darkness’라고 표현하면서 그야말로 완전한 어둠 속에 있음을 표현한다. 반면, 눈이 성하다면 몸의 등불이 성하여서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영어성경에서는 ‘full of light’로 아주 광명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됨을 말씀하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등불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도 등장한다. 마태복음에서의 등불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본문 33절에 ‘집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비춘다. 그 비추는 대상에서 차이가 있다. 이미 ‘집 안에 있는 자’와 지금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자’이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집은 곧 교회를 의미한다. 마태는 이미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염두하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거나, 혹 믿음이 있더라도 아직 견고하지 못한 연약한 자들을 위한 선교적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의 등불 비유는 이미 복음의 밝은 빛이 누구에게나 공개적으로 선포되었으며, 눈을 등불에 비유하여 진리인 복음을 밝히 볼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는 밝히 드러난 복음의 진리를 죄와 편견으로 인하여 어두움에 갇혀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생명의 빛을 보고자 한다면, 진실로 복음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눈을 덮고 있는 영적 어두움을 거두어 내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수 많은 무리들은 어떠하였는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완악한 마음들을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35-36절을 함께 읽어보자. 눅11:35-36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의역해서 말씀드리면 이렇다. “지금 네 안에 있는 빛이 혹 어둠은 아닌지 잘 한번 살펴보라! 만일 너의 온 몸이 어두운 데가 조금도 없이 빛으로 충만하다면 등불이 너에게 비출때처럼 너의 온 몸이 환하게 밝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청중들에게 들려주실 때, 특별히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영적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인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온 몸과 마음이 어두움에 휩싸여 있어서 늘상 어두움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통탄히 여기고 계시는 것이다.
생명의 빛을 만난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데, 여러분의 빛은 어떠한가? 마5:16 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라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여러분의 빛은 어떠한가? 여러분들이 속한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여러분들을 둘러싼 허다한 무리들 앞에서, 여러분의 가진 빛,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빛은 밝게 빛나고 있는가? 그래서 여러분이 비추는 그 밝은 빛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또한 오늘 눅11:33 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아는 그 찬란한 복음의 빛이 ‘복음의 빛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혹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혹은 교회의 새가족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여러분들이 가진 빛을 환하게 비추이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으니까, 과거에 단 한차례 그 생명의 빛을 만났었으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살고 계시지는 않는가?
과거 젊었던 어느날,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통곡하던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머나먼 그 때를 회상하면서, 오늘날은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함에도 그냥 저냥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 여러분의 빛은 어떠한가? 지난 과거에서의 뜨거웠던 나날들의 추억에만 젖어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진단한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린 세대" 라고.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들, 우리가 매 순간마다 구하고 부르짖어야 할 은혜의 요소들,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먹이시고 공급해주셔야 하는 그 은혜들이 없어도, 그냥 저냥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그 영광스러운 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든지, 설령 그 빛이 꺼져가든지, 설령 그 빛이 아예 꺼져버렸든지, 아무 상관없이 그냥 저냥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중에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구별없이 살다가 주일에 교회 와서 기도한다. “하나님, 은혜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보다는 눈에 보이는 돈을 주세요. 아니면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눈에 보이는 진급이나,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주세요. 지금 나는 은혜보다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이게 예수 믿는 삶이 맞나? 한번 스스로 질문해 보라. 단 한순간도 복음의 빛이 비추인 적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믿는 신들에게 이정도는 구한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무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이게 예수 믿는 삶인가? 정작 내 안에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아는 지식의 빛이 꺼져가는데, 그 빛이 사그라들어가는데, 내 영적 상태는 진단하지 못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여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예수믿는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대학교 4학년을 앞두고 러시아로 두달 가량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교회를 다니곤 있었지만 무니만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런 저를 측은히 여기신 부모님께서 단기선교를 통해 신앙의 도전을 받기를 원하셨던 것도 있었다. 겨울방학동안 2달 가량의 단기선교를 위하여 1년 가량을 준비했었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고,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모색했었다. 단기선교를 준비하던 초반에는 사실 큰 기대가 없었다. 그저 외국여행이나 간다는 가벼운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점점 기대감이 생겼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저에게, 단기선교라는 수단을 통하여, 그 머나먼 길을 돌았던 탕자와 같던 나를, 다시 정상적인 궤도로 들이시기 위해 이 1년동안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들을 쏟아부어주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하루에 2시간씩 교회당에 들어가 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게 하셨다. 마지막 한달을 앞두고서는 한나절을 교회에 틀어박혀 말씀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게끔 하셨다. 한 영혼이라도 그 땅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돌아오자는 아주 작은 소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를 떠났다. 당시 대학생 80여명이 속초에서 배를 타고 23시간을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했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3-4시간 정도를 이동해서 외각에 위치한 라즈돌리나 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하니 한밤중이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저녁집회를 가진 후 잠을 잤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현관문이 안열린다. 밤새 폭설이 내렸는데 1미터가 넘는 눈이 쌓여 버린 것이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제설차도 움직이지 못한단다. 결국 함께 선교하러 간 팀원들이 2층 다락방에서 밖으로 뛰어내려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교회와 선교관 주변을 치우는데만 하루종일 걸렸다. 눈이 워낙 많이 와서. 군대에 있을 때도 그 정도 양을 치운 적이 없었는데 선교지까지 와서 눈을 치운다. 그렇게 첫날이 지났다.
둘째날, 이제는 마을의 큰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물집이 생기고, 온몸은 근육통으로 고통스러웠다. 간간이 마을 주민들이 눈 쓸어줘서 고맙다며 젖소에게서 막 짜온 신선한 우유라면서 그 비린내나는 우유를 대접해 주기도 했고, 그 마을 큰 마피아 두목네 집에 초청되어 차접대를 받기까지도 했다. 그렇게 눈만 치우다가 거의 일주일의 시간이 흐를 즘이었다. 사실 우리가 눈 쓸러 러시아까지 온게 아니지 않나? 어느 정도 눈이 치워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교회 전도지와 러시아어로 번역된 사영리 소책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한시간 정도 했을까?
경찰들이 찾아왔다.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가둔 것이다. 물론 요즘에는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색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개신교를 좋게 보지 않았다. 10명씩 조를 나눠서 1시간 정도 노방전도하다가 4시간 가량을 차디찬 유치장에 갇혔다.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는가.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조원들끼리 유치장 안에서 묵묵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귀한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내가 뭐 죄를 범해서 유치장에 갇힌겁니까? 아니면 한달 정도 전도하다가 갇힌겁니까? 거의 일주일 내내 눈만 쓸다가 이제 겨우 전도를 시작했는데 하자마자 갇힌건 너무한거 아닙니까? ” 라고 기도할만한 상황이었다. 충분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당시에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 우리의 생명이라도 필요하시다면 가져 가십시요.” 당시 신앙도 없던 애가 이런 기도를 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제가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리냐면,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이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철없던 당시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날라리 청년이 지금은 반듯한 목사가 되었고, 공부와는 담쌓고 살던 애가 신학 공부까지도 했으며,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애가 이제는 많은 신앙서적들을 보며 유익을 얻으며, 성경은 읽어본 적도 없는 애가 성경도 훨씬 많이 읽으면서 아는 것이 그때보다 많아졌는데, 과거에 비하면 정말 많은 것들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돌이켜보니 그닥지 나아진 것이 없는게 아니던가.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울며 불며 뜨겁게 기도하던 그 때의 모습들,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제 생명이라도 필요하시다면 얼마든 가져가십시요!” 라고 담대하게 기도하던 그 때의 야성들이 온대간대 없어졌다. 그때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고, 그때보다도 풍요로워졌고, 그때보다도 많은 공급을 받고, 그때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때 그 시절보다 지금의 나는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지, 그때 그 시절보다 더 하나님 은혜 가운데 기뻐하며 살고 있는지, 그 때 그 시절보다 하나님 말씀에 목말라하고 있는지, 그 때 그 시절보다 성령의 많은 열매들을 맺으며 살고 있는지, 무엇보다 그때보다 지금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빛을 드러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 쉽게 대답할 수 없더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 중에는 물론 지금도 그렇게 뜨겁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쩌면 과거 어느 시점에 주님을 만났던 그 뜨겁던 시절, 누구보다 뜨겁고, 누구보다 열렬했으며, 누구보다 간절했던 그 시절들이 각자 있으실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그 때 시절만을 회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한때는 그랬던 적이 있었지....” 정도로만 만족하면서 지금 내 눈의 빛은 꺼져감에도 포기한 채로, 주저앉아버린 분들 계시진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빛을 경험하여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그 빛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한번 비취기 시작한 그 빛이 더욱 밝게 타오를 수 있도록, 더욱 환해져서 주변을 밝게 비출 수 있도록 더 더 타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한 때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빛을 만나고 그 빛이 잠깐 타오르다가 도중에 꺼져버리고야 마는 인생들이 더러 있지 않던가?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빛을 세상 가운데 계속해서 비추어야 하는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죄의 유혹들로 인하여, 또한 생각지 못했던 여러 올무들로 인하여 실족하고 넘어져 그 빛을 꺼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인지라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자들이다. 은혜에 둔감해지고, 타성에 젖어들 수 있고, 신앙에 아무런 감동이 찾아오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때일수록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35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원어로는 좀 더 강하게 표현하시는데, “명심해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오래 전 뜨거웠던 어느 한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지금 나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및,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빛이 꺼져가기 직전인줄도 모르고 안일하게 있는 분들은 혹 계시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복음의 빛을 교회로 들어오려는 연약한 자들에게 비추라고 하시는데 진실로 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눈의 빛이 꺼져가는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던 것 동일하게 추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 동일하게 갖고 싶어하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 그대로 나도 살고싶어하는 미련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답답한 인생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 눈 가운데 그 빛이 사그러들고 있고, 설령 그 빛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할지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자. 다시 한번 생명의 빛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그 주님께서 주님을 아는 빛, 주님을 믿는 믿음의 빛을 다시금 우리 가운데 회복시키시기까지, 그 빛이 우리가운데 충만하여져서 이제는 어둔 이 세상을 비추이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자. 한때 한 순간 뜨거웠던 그 순간만 추억하며 살 것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주께서 나의 마음 가운데 복음의 불씨를 다시 일으켜 달라고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길 소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요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60:1-3)” 아멘! 이 회복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빛으로 충만하게 타오르길 갈망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가운데 친히 이루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주여, 지금 내 눈의 빛은 어떻습니까? 언제 타올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과거의 일임에도, 그저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로 만족하며 꺼져가는 불씨를 바라보고만 있는 내 영적 상태는 아닙니까? 지금은 그 불씨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찬 재만 남아있는 내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도 사그라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불씨조차 사라진 지금의 내 눈을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지금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신다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시금 주님만 바라보오니 주여, 우리에게 이 믿음의 불씨를 되살려 주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아는 그 빛을 다시금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온 몸이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여져서 어둔 세상을 밝히 비추기까지 주여, 우리에게 주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시금 내 믿음의 빛을 불태워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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