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살전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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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9월 13일 수요일
제목 : 소확행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
결단찬양 : 행복
1.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우리
1) 소확행 :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다들 소확행에 대해서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풀어 해석하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하루 하루 바쁜 패턴에 치여 행복을 놓치고 살다보니, 아주 작은 행동에서도 행복함을 누리게 되었고 이를 소확행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운동을 좋아 하는 분들은 퇴근 후 헬스나 필라테스를 하며 행복함을 누리기도 하고, 집돌이-집순이 분들은 퇴근 후 이불 속에 들어가 과자 한 봉지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며 행복함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니지만 그것으로부터 하루의 행복을 찾곤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소확행은 무엇입니까? 제게도 최근 어떤 소확행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니, 확실하게 떠오른 소확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근 김기락 목사님이 언급했던 언더독 정찬성 선수를 응원했던 일 입니다.
사실 정찬성 선수와 일면식 하나 없는 사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격투기에 있어서 전문적 지식이 제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누구와는 다르게 한국 사람을 응원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정찬성 선수의 패배로 다음 날 패션후르츠 에이드를 그 누군가의 책상 위에 올려 두어야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보다 그저 응원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2) 대확행 : 대놓고 확실한 행복
반대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확행 말고, 대확행, 즉 대놓고 확실한 행복은 없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게 있어 대놓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대놓고 확실하게 하는 행복’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과 대놓고 확실하게 하는 행복에 대해서 공유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행복,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
1) 하나님의 행복 : 스스로 행복하신 하나님,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다
그럼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우리는 어디서 알 수 있으며, 어디서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다, 이런 생각을 또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일까? 또 예수님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행복과 예수님의 행복을 우리가 알고, 또 그것을 따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대놓고 확실한 행복’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하다보면 많이들 이 구절을 떠올리시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섯 째날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구절을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행복은 비로소 사람을 통해 완성이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행복하시고자 우리를 창조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충분히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사람을 통해 채우기 위해서 창조 하셨습니까? 아니면 너무 무료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자 창조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우리를 창조하지도 않으셨고,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스스로 행복하셨기 때문에 무료함에 우리를 창조하신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누리는 그 행복을 우리와 함께 누리게 하시고자 창조 하셨습니다. 자신이 누리는 그 기쁨, 그 행복을 우리게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하나님을 보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의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창조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드셨지요. .. 하나님은 완벽하게 행복하시므로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자기충족적이시며 남을 위해서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님은 스스로 행복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보시며 또 행복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 :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죄인된 우리의 구원
또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은 무엇 이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표현은 종종 등장하는데, 웃었다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웃을 일이 없으셨을까? 예수님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이 듭니다.
일부 학자들은 늘 행복하셨기 때문에 늘 웃고 계셨고, 이를 굳이 기록할 이유는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100%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게 있어 조롱과 핍박과 채찍질에 분명 아파 하셨고, 고통 가운데 신음 하셨음을 보면 늘 행복했다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본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했고, 예수님의 최대 행복이 무엇 이었는지를 찾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대 행복이자 기쁨은 명예와 부가 아닌,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하나님 말씀의 성취로 죄인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예수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이지요.
3) 우리의 대확행? 구원받은 그 사실 자체로부터 오는 행복을 누리는 것!
하나님의 기쁨도 예수님의 기쁨도 곧 하나로 귀결 됩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은 자녀라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우리가 확신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구원 받았음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신하십니까?
또 그러한 확신이 필요하거나 또는 그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이 되십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그런 고민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제안 합니다.
3.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소확행 하라
1)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 1. 소그룹으로 모이기에 힘쓰라
구원받음으로부터 찾아오는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날마다 누리기 위해서, 먼저는 ‘소그룹으로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만나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이들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더라도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이 모임에 내가 참여하는지, 왜 내가 이 사람을 만나야하는지 우리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사실 그 경우 또한 어쩌면 주제 없는 대화들을 그저 하는 목적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만나려 했습니다. 또 왜 만나 왔습니까? 이들이 만나는 목적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사단의 방해로 당장 만날 수는 없지만 이들의 만남의 목적은 바로 “복음” 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 나를 은혜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나누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적 이었습니다.
과거 나홀로 신앙 생활하는 크리스천들을 보며 ‘군중 속의 고독’이라 표현하며 혼자 하는 신앙이 외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혼자 하는 신앙이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체에 속하기 보다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단어는 더 이상 고독이라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기를 선택했고, 혼자 밥 먹기나, 혼자 영화보기 등은 더 이상 외롭다 표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홀로 라는 표현은 꽤나 긍정적인 표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공동체를 지향 합니다. 왜요? ‘나홀로 라이프’ 시대 속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동체의 역할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과 25절은 공동체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공동체는 서로 돌아보는 곳입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돌보고 죄를 나누는 곳이 바로 공동체 입니다.
또 고린도교회에서 ‘내가 더 잘났네, 내가 더 귀하네’ 논하니 사도 바울이 공동체는 이런 곳이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의 모든 건 다 중요해. 손도, 발도, 눈도. 다 중요해. 각자 따로 생존하는게 아니라 함께 생존하는게 바로 교회야.” 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요, 공동체 구성원 다 중요하고 복음을 나누는 것 참 중요한데, 그래도 충분히 나 혼자 신앙 생활 할 수 있어요.’ 라고 여전히 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전도서 4장 9절부터 1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공동체의 필요를 평상시에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추운 겨울이 찾아올 때, 고난이 찾아올 때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 합니다. 추울 때 함께 있어 줍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 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계속 교제하기를 원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며 서로의 어려움을 위해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기 위해서.
공동체는 단순히 모이는게 핵심이 아니라, 교제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 누리는 행복을 날마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옆 사람과 이렇게 인사 합니다. “당신과 함께 예배드림이 행복입니다”
2)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 2. 확신하라
또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두 번째는,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확신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에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질문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구원의 확신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이 질문에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답하며 확신하는 자도 있겠다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런 생각을 하겠죠. “아? 나는 구원의 확신이 없나?”
오히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찾으면 찾을수록 혼란이 옵니다. 확신 하지만, 동시에 내 모습, 내 생각을 보며 ‘진짜 구원의 확신이 있나?’ 고민합니다. 어느 한 목사님은, 계속 혼란이 오고, 계속 싸우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자라감에 있어 사춘기를 겪듯, 우리의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얻는 길 가운데 혼란이라는 사춘기가 오며, 이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역반에서 한 성도님이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눌림’이 온다고 말입니다. 그 표현이 너무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 눌림을 통해 구원받은 자로써 보일 수 있는 행복이 제게 느껴져서 제게 도전도 되고 너무 좋았습니다.
날마다 구원받음의 행복을 누리길 소망하십니까? 끊임없이 다가오는 혼란 가운데, 끝까지 싸우십시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확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며, 그것은 곧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승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3)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 3. 행동으로 나타내라
대놓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번째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받은 백성임에 받은 은혜를, 모여 나누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감동과 감격하여 확신으로 매일을 채워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행동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부터 11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들을 향해 권면 합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를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미 충분히 서로 사랑하며 잘 달려가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지금껏 달려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달려가길’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음을 위해, 구원받은 자로써 행동하길 권면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위해 섬김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섭니다.
구원 받은 자는 삶에서 부터 다름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안드레와 야고보도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들이 구원의 확신을 얻자 삶부터 달라짐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저는 이 변화의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도 이뤄지길 원하며 또 그것을 충분히 누리며 기쁨 가운데 거하길 바랍니다.
4. 결론
기쁨과 행복이 줄어들어 가는 오늘 날, 날마다 얻는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게 구원이라는 가장 큰 행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괴로움과 갈등과 고민 가운데 갇혀 힘들어 하십니까? 그보다 더 우위에 계셔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시며 반드시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의 선포’ 그리고 그 선포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행복을 충만히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행복
[기도제목]
1) 예수를 잘 믿고, 구원 받은 백성에 확신을 가진 삶이 우리의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르심 받아 살아감에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흔들림 없는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2) 우리의 삶에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갇혀 괴로움 가운데 지쳐가는 삶 보다, 선의의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되게 하소서. 우리의 눈 들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발걸음 하는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소서. 주를 위해 살아가며, 주를 위해 일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3) 우리의 가정과 주변에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아감에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누린 구원의 확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그 한 영혼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허락하사 마음 문을 열게 하시고, 그들이 말씀을 들어 주님 앞에 나오는 새 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