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6 양청] 84-87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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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지난주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악한 죄가 있다는 부분을 배웠다. 이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 라는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제84문] 각 죄는 어떤 보응을 받습니까?
(답) 각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금생과 내생에서 받습니다.
[제85문] 하나님은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하는 그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도록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피하도록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그리고 더불어 그리스도가 구속의 유익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모든 외적 수단들을 근면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제86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하는 은혜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가 복음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대로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만을 받아들이고 의지합니다.
[제87문]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구원하는 은혜로, 죄인은 이것에 의하여 자기 죄에 대해 참으로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되면서 자기 죄에 대해 탄식하고 싫어하며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순종이라는 완전한 목적을 갖고 이를 향해 노력합니다.
84문이 얘기하는 것은 죄에 대한 보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사는 동안에만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과 죽은 이후에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죄에 대한 보응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85문은 우리가 그렇게 아담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해야 피할 수가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셨는데, 그것은 믿음, 회개, 그리고 외적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따라 86문에서는 믿음에 대해, 87문에서는 회개에 대해, 그리고 다음시간에 살펴볼 88문에서는 은혜를 주시는 외적 수단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한다. 이 흐름을 잘 기억해 두시면 좋겠다.
제가 전도사 시절 담당했던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회개"에 대한 주제로 한달 넘게 설교했었다. 그때 어떤 교사 선생님이 예배 후 이런 질문을 하더라. “아니 전도사님, 예수 잘믿으면 되었지, 왜 회개까지 해야 됩니까?” 되도록이면 우리 학생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만 설교해주시면 되지, 왜 회개하라는 식의 부정적인 뉘앙스 설교를 하느냐 이거였다. 이처럼 성도들이 “회개가 신자의 삶에 왜 필요한지"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86문과 87문. 믿음과 회개를 말하는데, 믿음은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모든 죄인들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기가 꿈꿔오던 삶의 방향을 향해, 그곳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분명한 목적이 생겼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 전에는 방향도 목적지도 다 틀려먹었던 삶을 살다가 이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발견했고, 내가 그분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졌는지를 발견하게 되니까, 내가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께로 방향전환이 이뤄지지 않겠나? 삶의 방향전환, 잘못된 길로부터의 돌이킴, 바로 그게 회개이다. 예수믿는 자가 예수 믿기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여전히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예수 믿기 전에 따르던 세상의 가치관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불가능한 일들을 만들어내는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내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 내 목적을 바꾸지 않고 그것들을 마음에 품은 채로 주님을 바라본다. 삶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예수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인도해주세요. 예수님,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도록 힘과 지혜를 주세요. 예수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이루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여러분,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믿는 삶도 아니고,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삶도 아니다.
반드시 믿음의 대상을 발견한 신자는 그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로 향한다. 선교나 목사와 같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내 생업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고, 내 시간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것이다. 그 인생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회개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정리해서 보면 84문에 죄에 대한 보응이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금생과 내세에서 받는 죄라고 했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고생 좀 하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렇지 않다.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다음생에서도 영원한 형벌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멈추질 않는 비참한 영원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찾진 않겠지만,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 말씀하신다. 창3: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이다. 그들이 눈이 밝아지면서 무엇을 보게 된 것인가?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봤는데, 그 눈이 밝아지는 바람에 수치감을 얻게 되었다. 그 친밀했던 사이에 부끄러움과 수치가 스며들기 시작하며 그 관계가 깨어진다.
창3:8 을 보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수치감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피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두려워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부르면 얼른 갔는데 내가 더럽혀진 이런 모습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숨는다. 하나님이 두려운 대상이 되어버렸다.
창3:12-13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너무나도 비겁한 모습이다. 핑계와 변명과 책임전가.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주신 뱀이 나를 꾀었다" 책임을 전가한다. 누가 봐도 가장 이상적이던 부부의 관계가 죄가 들어오면서 그 관계도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가장 완전한 연합, 가장 친밀한 연합이었던 부부의 관계가 무너져내렸다.
창3: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부부의 사랑의 관계가 왜곡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원한다. 더 나를 봐주면 좋겠고, 더 나를 배려해주면 좋겠고, 더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런데 남자는 이런 수준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위에 군림하려 한다. 지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이 남자들의 타락한 본성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내제되어 있는 부패한 죄인의 본성이다. 첫 사람 아담 이후로 범죄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이처럼 경험하며 산다는 것이다.
창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모든 것들이 평화로웠다. 자연과 자연도 조화로웠고, 사람과 자연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었다. 만물과 만물이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마주치면 서로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런 원수지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생겨났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1장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임신과 출산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런 아이를 부담없이 낳을 수 있었다면 이것은 축복이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고대 게르만족 같은 경우 한 여자가 자신의 일생에서 평균 25명의 아이를 낳았단다. 그러니 로마가 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한 여자가 25명씩 아이를 낳는다. 임신과 출산에 고통이 없었다면 자녀를 낳고 기르며 가정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임신과 출산이 고통이 되었다. 심지어 뱃속에서 태아가 유산되는 일들도 빈번해졌고, 출산 중 죽는 산모들도 늘어났다. 산모는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아이를 낳게 되었다. 죄로 인해 이런 고통들이 들어왔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이어지는 17-19절의 말씀을 보면, 아담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이 노동한만큼의 정당한 댓가를 누렸다. 땀을 흘리는만큼의 보상이 주어졌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나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 조화가 깨졌다. 땅은 더이상 노동한만큼의 보상을 주지 않는다. 땅은 늘 아담의 노동력에 저항하며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아담은 음식을 거두기 위해서는 늘 이런 잡초들을 끊임없이 제거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성으로 땅은 점점 괴로워진다. 환경과 생태계가 악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이 땅에서 이렇게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창3:19 를 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죽음에게 지배를 받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걸 의식하며 살아간다. 아직 여러분들은 젊어서 ‘죽음’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지 모르겠지만, 목사인 저에게는 숫한 교회 장례들을 보면서, 그리고 교인들 중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보면서, 늘상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산다. 이 세상 그 어떠한 인생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저주로서의 죽음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창3: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인생을 산다고 말씀한다. 제가 앞서 한번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에덴”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쁨”이다. 그런데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잃어버린 삶이다. 기쁨으로부터 추방된 삶이다.
집에 애완동물 기르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만, 예를 들어서 고양이가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까? 강아지가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살까? 동물들은 인간의 수준만큼 기쁨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보다는 본능에 오히려 이끌려 살아간다. 기쁨을 추구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인간만이 향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기쁨을 원한다. 그런데 진정 인간이 추구하는 그 기쁨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죄인은 내가 찾는 그 기쁨을 하나님께로부터 찾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찾기 시작한다. 내가 그 기쁨을 만들어내려 시도한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인간은 기쁨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하지만, 범죄한 인간은 영원한 기쁨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지 않는 이상 그 기쁨을 얻을 길이 없다. 왜?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이 땅에서만 받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이 땅에서만 고통받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영원토록 상급을 누리는 삶이 있는반면, 영원토록 저주와 고통을 누리는 삶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아야 한다. 건짐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85분에서 하나님은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하는 그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도록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믿음과 회개, 그리고 은혜의 외적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 것이다. 내가 일절 한 것이 없고 오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다 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준비해놓으신, 다 이뤄놓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떤 통로로 주어지는가, 이것을 오늘부터 다음주까지 살펴보게 될 3가지, 믿음, 회개 그리고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보게 될 은혜의 외적 수단을 통해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먼저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교재 2번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구원하는 은혜이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믿음을 내 결단과 내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던가? 내가 예수 한번 믿어봐야지! 라고 결심하면 그날부터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생기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이스 벌코프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외적 증거나 논리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통찰력에 의존하는 실증적 지식이다"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니까 되게 특이하다. 표현이 조금 어려울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믿음은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어떤 통찰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만이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만. 따라서 개나 고양이가 믿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획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신 분 있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영이신데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걸 직접 본 사람이 있나? 이것은 사실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다. 내가 논리적인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내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내가 가방 끈이 길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없이 이를 믿고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내 안에서 믿어진 것이지, 내가 결심하고 내가 뭔가를 해서 믿는 것은 아니다. 믿어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 밖의 복음이 도저히 안 믿어지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중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안 믿어지는 것, 이것이 사실은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믿고 있는 상태라는 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뭔가를 행하셨다는 것 밖에 더 있겠나. 믿음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이제 교재 3번을 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신다면, 그 믿음을 받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성령의 역사로 믿음을 가진 신자는 가장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진정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 그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어서 죄로 인한 인생의 비참함과 허무함을 느낀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니까 내가 걸어왔던 그 모든 행적들이 다 죄이다. 내가 꿈꾸왔던 삶들도 다 죄이고,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들도 다 죄이다. 이렇게 가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깨닫게 되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을 똑같이 못 살겠다. 그 삶이 그렇게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보니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길을 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생각이 없어진다. 너무 비참하고 허무하다. 그럼에도 이 딜레마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괴로운 인생에서 나를 건져주실 이를 필요로 한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들 사모한다. 그래서 C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구주를 필요로 하며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신자들, 성령님의 선물로 믿음을 받은 신자가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믿음에는 크게 네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4번을 보라. 성경은 믿음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이 믿음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잘 보라. 첫째는 역사적인 믿음이다. 이는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과거 세종대왕이란 위대한 사람이 한글을 만든 역사적 사실을 내가 눈으로 보진 않았지만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적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둘째로, 이적적 믿음이 있다. 자신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확신. 혹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적을 베푸실 것이라는 확신. 요2:23 을 보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요2: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여기서 “의탁하다”는 말은 23절에서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믿다”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되는데, 하나는 “믿었다” 라고 번역하고 하나는 “의탁했다”고 번역했다.
이 표현들의 의미는 이렇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안 믿으셨다. 왜? 그들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관계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내 관계이다. 요한복음6장을 보면 오병이어 표적을 베푸신 사건이 기록된다. 무리들은 주님께서 배불리 먹여주시는 이적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고자 했다. 주님은 그들을 피해 밤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셨는데, 다음날 무리들은 주님 계신 곳 까지 찾아왔다. 이때 주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뭐 때문이라고? 먹을 양식 때문이라고. 이어서 그들이 경험한 오병이어의 표적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주님은 설교하셨는데, 이 설교를 듣던 무리들은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주님 곁을 떠나버렸다.
여러분, 이런 일들은 어느 시대나 항상 있다. 이적적 믿음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이적적 믿음이 구원 얻는 믿음으로 가지 않은 경우이다. 마르다가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내 오빠는 이미 죽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 이게 이적을 베푸실 것에 대한 믿음, 이적적 믿음. 그러나 그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었다. 왜? 나중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눅17 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 환자들을 고쳐주신다. 10명 모두 그들의 나병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예수님한테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눅17: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 사람이 이적을 경험했지만, 오직 단 한 사람이 구원 얻는 믿음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들을 이 양문교회 가운데 부어주셔서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하나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셨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그렇게 많이 봤던 그 시대 사람들이 결국에는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모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게 되지 않던가? 따라서 이적을 경험하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음을 보게 된다.
믿음의 세번째 종류로서, 일시적인 믿음이 있다. 돌밭에 뿌려진 씨. 마13:20-21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 사람이 처음에 말씀을 받을 때 어떻게 받았다고 말씀하시는가?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크게, 가장 먼저 아멘으로 받았다. 그러고 세상을 살다가 조금 힘든 일이 생기면 받았던 말씀은 온대간대 없고 그냥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그냥 쓰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일시적인 믿음이라는 것인데, 일시적인 믿음은 참된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일시적인 믿음도 분명 싹이 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고, 우리와 동일하게 거룩한 신앙의 모습을 띄고, 우리와 동일하게 은혜를 경험하는 것 같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척, 거룩하게 찬양하는 척, 경건의 모습을 띄는 척 할 수 있다. 그런데 머잖아 곧장 떨어져나간다. 그에게는 인내의 모습이 없다. 왜? 그의 믿음의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초반에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의 뿌리는 거듭난 생명이고, 이것은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믿음은 인간의 지향성을 바꾼다. 그러니까 지향성을 바꾼다는 거는 당장의 거룩한 변화가 두드러지게 관찰되고, 그의 가치관이나 성품의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는 등의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바뀐다. 인생의 방향이 바뀐다. 이건 정확하게 바뀌는 것이다.
이어서 5번을 보면, 믿음의 종류가 4개가 있다면 믿음의 요소에는 3가지가 있다. 지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이다. 이는 인간이 인격이 없는 로봇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3가지 요소를 가지는 것이다. 먼저 지적인 요소는 지식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대속을 감당하셨다. 이걸 아는 것이다. 믿음에 지적인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믿으면 믿는거지, 뭘 자꾸 배우라고 그러는거야?” 이런 말은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이해가 되는가?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정,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는 것, 전인격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믿음의 내용이 풍성해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지식의 내용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지식의 내용이 없다면 분명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데 정작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도 하나도 모른다. 모르는데도 읽지를 않는다. 성경의 내용도 모르는데 심지어 관심조차 없다면 그게 미신과 뭐가 다르겠나? 새벽녘에 맑은 물 떠놓고 달을 향해서 손바닥 비비면서 “믿사오니 믿사오니”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라고 했다. 그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한다. 배워야 한다. 읽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두 번째로, 믿음에는 감정적 요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적 요소를 오늘날 뜨거운 찬양과 기도, 종교적 황홀경과 헷갈리시면 안된다. 믿음의 요소 중 하나인 감정적 요소란 머리로 깨달은 지식이 내 가슴으로 와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그 감정적인 요소는 내가 지식적으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내가 머리로 배운 것들이 내 마음까지 물밀듯 밀려오는 것, 그런 동의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 믿음에는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 여러분들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해보겠다. ‘믿다’라는 단어 2가지 뭐가 있나? “Believe” 라는 단어가 있고 “Trust” 라는 단어가 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믿으세요!” 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는 “Believe” 이다. “Trust” 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서 그분께 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Trust이다. 따라서 믿음의 세번째 요소인 의지적인 요소는, 내가 멀리 동떨어져서 “그래 나 예수님 믿어!” 이정도 수준이 아니라, 그분께 내 모든 것들을 맡기고 드리는 수준까지 가는 것, 그것을 의지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막8:34 를 보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께서는 “나를 믿으라”라는 수준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수님 믿어요" 라고 하긴 하는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그냥 멀리서 보고 멈춰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성경을 찾아보자. 마10: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그분을 믿는 정도 차원이 아니라, 앞서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을 따르는 제자된 삶을 사는 것, 이게 믿음이다. “예, 주님 믿기는 하는데 주님의 제자는 나중에 되겠습니다" 이런 식의 태도는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믿음은 주님을 따라가는 삶, 주님의 제자된 삶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 예수 믿는 삶이고,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삶은 가짜 믿음이다.
이제 교재 6번을 보라.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구원하는 은혜"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회개”라는 주제를 다룬다. 여러분,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다. 내가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믿음도 마찬가지였다. 성령께서 내 안에 일으키시는 것이다. 회개는 어떠할까? 내가 회개하고 싶다고 회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87문을 다시 한번 보면,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구원하는 은혜로, 죄인은 이것에 의하여 자기 죄에 대해 참으로 인식하고" 라고 말한다. 나의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이생에서와 내세에서 다 영원토록 받아야 할 답이 없는 존재구나!” 이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내가 그정도로 죄를 지었다고? 난 좀 억울한데? 하나님의 심판이 좀 과한데!?”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 성령께서 은혜 베푸셔서 나의 죄인됨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사람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할 저주와 형벌을 억울해 하지 않는다. 자기 죄에 대해 깊이 탄식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죄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한다. 이게 바로 회개이다. 돌아서는 것.
그래서 회개의 종류를 보면 C의 첫번째를 보면,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있는 반면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회개가 있다고 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이다. 그 죄인의 죄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탄식,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회개가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시적인 회개나 감상적인 회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가 아니다.
회개의 특징은 지속적인 열매를 맺는 것이다. 반면 일시적인 회개란 그때 그 순간 뿐이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야 니네들 와서 세례받겠다고 하는데 세례가 중요한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라고 한다. “세례만 받는다고 너네 죄 씻음을 받는 게 아니고 세례가 의미하는 거는 회개를 상징하는 거야! 그러면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열매가 있어야 되는데 일시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게 하나님 찾으시는 회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악어의눈물 흘릴 생각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외친 것이다.
또한 감정적인 회개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부분인데, 회개는 전인격적인 것이고, 반복적인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특성상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반복회개란 예수 믿을 때 한번 하면 되는게 아니라, 회개는 신자의 전 생애에 걸쳐 회개에서 회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더러움을 가지고 그분을 뵐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갈 때, 갑자기 생각나는 나의 죄악들이 있다면 "하나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이런 죄들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 죄를 용서해주세요. 죄로 인해 무너진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세요. 나를 깨끗하게 다시 한 번 씻어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 정말 두려움 없이 사랑으로 경외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세요"이러한 회개는 신자의 평생 하는 것이다. 주일날에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에서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하는 것이다. 이게 신자의 특징이다.
교재 D를 보라.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새로운 순종이라는 완전한 목적을 갖고 이를 향해 노력”하게 한다. 회개를 통해 우리 안에 거룩한 목적이 생긴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는 내 목적이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죄를 설명하는 성경의 단어 중에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반항 혹은 반역,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죄악된 태도이다. 그런데 이랬던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이 들어온다. 순종이다.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절대로 순종은 믿음 없이 불가능하다. 믿음 없이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그러셨고, 그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내 인생길을 끝까지 붙드시겠다고 하시는데, 이를 내가 신뢰하니까 비로소 나는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중생과 칭의라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중생, 곧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도 순간이다. 그런데 성화와 회개는 과정이다. 성화가 과정이라는 건 거의 다 아실 것이다. 그런데 회개도 과정이다.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생각을 해보면, 오늘의 결론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의 보응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첫 사람 아담이 어떤 결과를 초래해서 그걸 다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으며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았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죄의 보응을 끊어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도록 친히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아들을 믿도록 성령께서 믿음과 회개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어떤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반복시키면서 세뇌시키는 것 같이 믿음을 내가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 너무 안믿어지니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믿음이 연약할수록 나를 도우시는 분을 의지하며 나에게 믿음을 달라고 간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에 대해 배웠으니 회개해야지, 이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부어주셔서 내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슬퍼하는 마음을 주십시요! 그렇게 기도해야 주님께서 회개의 마음을 주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주시기를, 늘 우리가운데 회개의 마음을 불어넣어주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죄의 보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 십자가에 하나님께서 친히 못박아 죽이시고 저주하시고 진노하심으로 저희들의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다 주님께 맡기셨고 저희들에게 이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믿음과 회개의 영을 주셔서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하신 거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고 저희에게 회개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저희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져가는 삶을 인생에 주시는 모든 사건과 시간을 통하여 이루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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