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성숙, 신앙의 슬럼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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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신앙의 슬럼프 앞에서 성숙을 고민하는 우리들
신앙의 슬럼프 앞에서 성숙을 고민하는 우리들
여러분, ‘슬럼프’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어떤 것이 성장, 또는 진행되다가 일시적으로 효과가 나지 않거나 향상되지 않는 정체기를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 대학 2부는 한분 한분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뜨거운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슬럼프인 것 같은 상황에도 여러분을 보며 제가 힘을 얻고 배우고 있죠.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너무 귀한데 뜨거울 때가 있으면 차가울 때가 있듯이, 우리 삶속에서 믿음의 모습은 결국 위를 향하겠지만 때때로 우리는 신앙의 슬럼프를 겪고는 하는데요. 모두가 믿음의 모습을 인정해주나 나는 인정할 수 없는 상태 또는 나조차도 그 인정에 빠져 더 이상 자라나지 않고 오히려 침체되어 가고 있는 상태, 이 신앙의 슬럼프 앞에서 어떻게 우리는 거룩과 성숙으로, 제자의 길로 한단계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과 대립하는 걸까?
이들은 왜 예수님과 대립하는 걸까?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었던 두 가지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을 자르는 제자들을 보며 책망하는 바리새인들과 변론하는 예수님,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예수님과 치유하는 것을 고발하고자 지켜보는 바리새인들, 도대체 바리새인들은 누구길래 이렇게 까지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는 걸까요?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경건에 힘썼던 자들)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경건에 힘썼던 자들)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립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 정당의 당원들을 말합니다. 말라기로 구약이 끝나고 예수님이 오기전인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독실한’ 뜻을 가진 하시딤이라는 헌신적인 집단에서 나온 바리새파는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흩트리고 흡수시키려고 할 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모세 오경’ 즉, 율법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서 강대국들에 맞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었죠. 이들이 이스라엘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열정은 대단했었는데, 모세 율법인 ‘토라’를 좀 더 잘 지키기 위해 이들은 당시 입으로만 전해지던 율법들을 세부적으로 모아 ‘미쉬나’라는 구전율법책을 만들었습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장로들의 전통’ 이라고 표현되어 집니다. 하지만 구전 율법은 원론만 담아져 있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죠. 그래서 이들은 미쉬나를 좀더 세분화하고 잘 지키기 위한 원칙과 해석들을 마련하는데 이 해석들을 모은 것이 바로 ‘게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게마라와 미쉬나를 한곳에 모은 것이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유대교의 가르침인 ‘탈무드’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사람들이게 칭송을 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죠.
이렇게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며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앞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2장 초반에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 가르치는데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사함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바라보며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대립이 이뤄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부터 예수님과 계속 해서 대립하기 시작하는데 특별히 오늘 말씀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안식일’에 대한 부분으로 예수님에게 ‘장로들의 전통’을 근거로 예수님을 깎아 내리려고 시도합니다.
행동보다 그 행동의 의미가 중요하다.
행동보다 그 행동의 의미가 중요하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길을 내기 위해 이삭을 자르고 있었죠.
이때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길을 지나는 데 밀 자르는게 문제인가요? 신명기에 보면 이웃의 밭에서 곡식을 밀고 나가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엄격하게 지키던 ‘장로들의 전통’에서는 안식일에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근거로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어찌 하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보다 더 앞선 성경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막 2: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시장할 때 제사장들만 먹어야 되는 진설병을 먹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상 안되는 일이지만 사무엘상 21장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사울을 피해 도망치던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을 도와 제사장들만 먹어야하는 진설병을 주었던 이야기를 예수님은 꺼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전통’을 엄격하게 지키며 존경받고 있는 그들이 정말 붙잡고 가야할 것임에도 ‘전통’만 따르느라 놓치고 있는 부분을 깨닫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행동이 중요한게 아니라, 안식일이 주어진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인가?- 의미가 중요한 이유
안식일은 무엇인가?- 의미가 중요한 이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중요한 계명중 하나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날 일을 멈추시고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만족하시며 누리신 ‘안식’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눴듯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안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누렸다’ 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계명으로 주신 것에 본 의미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안식일’이 제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전에 노예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밤낮, 쉬지않고 매일 같이 애굽의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6일을 일하고 7일째를 구별하여,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그날 만큼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특별한 은혜들을 공동체가 ‘함께’ 누리고 기뻐하며, 그 날 만큼은 세상적인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하고 성회, 즉, ‘예배’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누리는 공동체 모두가 그 풍성한 은혜들을 ‘누리기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을 어떻게 누리는 것이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격하며, 그 은혜들을 기억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사장들처럼 예배를 섬김으로, 누군가는 준비한 예배를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참여함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서 서로 누리게 해주는 공동체적인 ‘누림’이 바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그 의미는 빠지고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행동, 즉, ‘장로들의 전통’ 원칙만 남은채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변질된 모습을 깨닫고 다시 바로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역으로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거룩은 잘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성숙,거룩은 잘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의미를 놓치고 행동원칙만 남고 그렇게 행위를 정죄하는 것으로 빠지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들의 출발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고민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더 세분화해서 지키려고 애쓰기 까지 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까지 했던 걸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전통에 대한 숙련도로 보입니다. 안식일 준수, 장로들의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서 잘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중요한 포인트는 그들의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으로 바뀌어 있던 것이 중요했던 것이죠.
2장부터 벌어진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지적하는 부분들은 대체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잘 지키고, 믿음의 행위들을 잘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행동해? 그건 잘못된거야”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부분, 잘하고 있는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적하고 있다는 부분이죠.
안식일에 밀을 베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지적하는 것도 결론은 자기들은 잘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열정이 바른 방향으로 향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의미’를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돌아보길 바랬고, 정죄하는 동기는 또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보길 원하셨던 것이죠.
무엇이 믿음이 좋은 것인가?(행동으로 신앙을 판단할 수 없다.)
무엇이 믿음이 좋은 것인가?(행동으로 신앙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음이 좋다’라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어떤 기준에서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걸까요? 대체로 그 사람의 보여지는 행위를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 애초에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한가요?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칭찬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이 더이상 하나님앞에서 고민하지 않고 진짜 성숙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덫’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아버지의 변화를 보고 하나님을 믿기로 했을 때 일입니다. 서울로 상경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얼떨결에 교회의 빈 방에서 지내며 서울 생활을 하던 때에 저는 집도 없는데 교회에서 지내게 해주신게 감사해서 교회 청소도 하고, 하나님 믿기로 결정했으니까 예배 잘 드리고, 노래배우니까 성가대 하래서 성가대도 하고, 주보 프린트 해달래서 같이 프린트하고 그랬단 말이죠.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도 열심히 하고, 춤출때 매일 연습하던 습관이 있어 밤에는 또 열심히 음악 연습하고 그러니까 주변에서 절보고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선일이 참 FM이야, 성실한 청년이야” 선일형제는 참 믿음이 좋은 청년이에요.”
저는 그래서 이게 믿음이 좋은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예수님 믿는다고 잘 말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열심히 살고 예배 잘드리고 열심히 일하면 한 마디로, 교회에서 하라는거 잘 해내면 ‘믿음’이 좋은 것 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대학에 가보니, 대학이 기독교 관련된 곳이라 음악사역하고, 나름 교회에서 믿음있다 평가 받고, 외부사역도 하고 나름 교회사역에 중심에 있는 청년들이 많더라구요. 그 안에서 저는 당연히 수업 잘듣고, 동기들 선배들과 열심히 어울려서 학생회장 후보로 제안도 들어오고, 학교안에서 하는 기도회 잘 참여하고 학교일 잘 도와주니까 또 거기서도 참 믿음이 좋은 학생으로 평가되더라구요.
그런 평가를 받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안에 이런게 생겼습니다. 누군가 기도회 나오지 않으면 “쟤는 교회에서 사역한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모범이 안될 수가 있어?”, 누가 좀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방황하면,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래”, 음악전공을 하니까 교회 예배할 때 음악적으로 좀 맘에 안들면 “아니 예배를 어떻게 저렇게 섬길 수 있지? 어떻게 예배를 저렇게 전문성 떨어지게 드릴 수 있지? ”
온갖 지적을 하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된 중요한 포인트는 이거에요.
저는 사람들이 평가해준 믿음이 좋다고 했던 부분이, ‘제 믿음’이 되었던 것이지, 하나님이 제 믿음의 기준이 아니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의 좋은 평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숙련도가 쌓이면서 제가 잘하고 있는 부분에서만 누군가를 지적하지 제가 못하는 부분, 약한 부분, 그래서 드러나면 불편해지는 부분은 보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믿음이 좋다는 칭찬이 덫이 되어서 더이상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게되고 그 칭찬에 안주하며 ‘거룩과성숙’으로 나아가는 고민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걸 무엇이라고 말하죠? ‘교만’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충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 할 수 있다는 생각, ‘영적 교만’이 제 안에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빠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교만’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 믿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은 분명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뻤을 거에요. 하지만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이 어느 순간 덫이 되어서 더이상 하나님앞에 올바로 서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의 성숙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게 되고, 자신들이 칭찬받는 그 부분에 빠져,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충돌은 믿음의 성숙을 위한 귀한 축복이다.
마음의 충돌은 믿음의 성숙을 위한 귀한 축복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성숙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고민할 수 있는 건가요? 손 마른 자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 여러번 의미에 대한 지적을 받았던 그들에게 특이한 행동이 보입니다.
막 3: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편함에 이제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사람을 고치는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 앞에서 다시한번 질문하십니다.
막 3:3-4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손 마른 사람을 세우시며, 다시한번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시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은 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멘트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깨닫길 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바리새인들은 행동하지 않으나, 마음속에서는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는 것, 불평, 시기, 질투 등 악한 것들이 마음가운데 행동하는 것을 막지 않고 행동하고 있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진짜 의미를 생각하고, 이 손마른 자도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함께 원하고 기뻐하길 바라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듯,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불편하고, 지적하고,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고 그 충돌을 받아들이고 고민하며, 진짜 의미를 깨달아 손 마른 자와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쁨을 같이 누리길 바라셨던 것이죠.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더이상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굳어버린 마음에 노하시며 손 마른 자를 고치십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마지막 행동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끝까지 바리새인들이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던 열정처럼, 하나님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로서길 고민하고,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길 바랬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만과 마음에서 움직이는 악한 마음을 놔두고 결국에는 ‘헤롯당’과 동맹을 맺고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헤롯당’ 유대를 통치하던 로마 헤롯 왕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강점기 때 친일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충돌 될 때, 마음의 충돌을 외면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추구했던 하나님의 백성이길 거부하고, 정체성을 버린 자들과 손을 잡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계획하는 모습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되죠.
우리는 종종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의 충돌을 느낍니다. 그 충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감동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불편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꼭 예배때 선포되는 말씀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많은 불편함들, 마음의 충돌이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성숙을 향한 메시지들이 꼭, 내 마음에 맞아 떨어지고 감동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찔림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격적인 반응까지 나올 만큼 불편감으로 말씀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상황속에 주시는 메시지들과 나의 마음이 충돌할 때, 우리가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돌아봐야할 것은, 오늘 예수님이 끊임없이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의미’가 무엇인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은 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믿음의 성숙은 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행동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믿음의 모습으로 보여질 수 는 있지만 행동 만으로 믿음의 성숙을 확인할 수 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하는지 의미를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서 고민하며 배워나가고 오늘, 내일 하루하루 바뀌어가고 성장해 가는 것이 믿음의 성숙입니다.
때때로 믿음이 좋다는 칭찬은, 우리를 거룩과 성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게 만드는 덫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칭찬은 감사로 받지만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일상속에서, 또는 말씀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불편함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믿음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며 가장 처음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 정체성을 진짜로 추구하고 거룩과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깊은 사랑과 축복을 누리기 원하시기에 때떄로 불편함이라는 포장지 안에 선물을 담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더욱 값지기 때문이죠.
믿음의 슬럼프 앞에서 우리가 할 것은 그 정체기에 멈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안주하며 불평하며 침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충돌을 맞이하고 하나님안에서 겸손하게 끝까지 거룩과 성숙, 제자의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가는 것입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늘 하던 기본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차근차근 밟다보면 어느순간 슬럼프를 넘어 더 성장해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죠.
신앙의 성숙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의 정체기가 찾아올 때 우리는 다시 첫 마음, 그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불편함과 마주하고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그렇게 고민하면서 나아갈 때 어느 순간 믿음의 슬럼프가 깨져 있고 한 단계 성숙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찬양하기 원합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삶의 예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