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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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기록목적을 요한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7월부터 요한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계획은 요한복음을 살피면 자연스럽게 구약의 배경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요한복음과 깊은 연관이 있는 출애굽기를 주제에 따라 살펴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매주 출애굽기 성경공부를 유튜브에 업로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했는데 1장에서 세례 요한, 안드레, 빌립, 베드로 그리고 나다나엘까지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고백을 살펴보았고 2장 첫 번째 표적인 물이 포도주를 변하는 표적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제자들에게 드러내셨고 이렇게 드러내는 것을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영광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잔치를 넘어서 민족의 잔치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의 제물을 파는 사람, 돈을 바꾸는 사람을 내어 쫓으며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고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어려운 말씀은 저자가 나중에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미리 설명하듯 말하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 니고데모와 고구마 먹는 것 같은 대화와 예수께서 행하시는 세례를 보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듯 한 대화에서 세례 요한의 올바른 태도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4장에서는 요한복음에서 매우 길게 한 여인과의 대화와 이에 따른 여인의 행동을 다룹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길게 다루는 장이 9장 맹인이 눈을 뜬 사건과 11장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으로 다루는데 요한의 기록 목적이 종합적으로 잘 드러나며 4, 9, 11장을 앞뒤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자인 사도 요한은 사마리아 지역의 여인이 예수를 만난 사건을 길게 다루고 이것이 처음에 말씀드린 기록 목적과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살펴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40-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4:40-42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곧 이것이 믿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소결론적으로 말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비록 긴 이야기지만 플롯은 간단합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1. 예수께서 다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인데 2.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기로 하고 3. 수가 지역에 있는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고 대화를 하셨다. 4. 결과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5. 자신이 속한 사마리아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6.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초청하여 며칠을 거하며 예수의 말씀을 듣고 7. 예수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믿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읽기에는 쉬운 구조이나 여기에는 생각지 못한 함정이 많습니다.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한국에 사는 김모씨가 북한의 평양에서 이모라는 여성을 만나 복음을 전했고 그 여성은 자기 동네로 돌아가 이야기를 전하자 동네 사람들이 김모씨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김모씨가 전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정도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말이야 되겠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듯 오늘 본문이 그렇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왜 사마리아인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 중심에 넓게 자리 잡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야 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 예루살렘으로 가려하자 사마리아 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사마리아 인들을 향한 ‘야고보와 요한’ 의 태도를 보시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고 본문 9절에서 요한4:9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라고 말하는 부분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대하는 모습도 알 수 있습니다. 한쪽만이 아니라 상호간데 이러한 상태는 하루 이틀의 감정이 아니라 오래전 역사로 부터 시작된 민족간의 갈등같은 것입니다. 과거로 거슬러 솔로몬 왕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죠. 이스라엘의 왕조가 시작되고 1대 사울왕 - 2대 다윗왕 - 솔로몬 왕으로 이어지다가 나라가 둘로 분열하게 됩니다. 그때 정통성을 가진 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에,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양분되면서 이때 종교도 서로 분리가 됩니다.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한4:20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이 ‘그리심산’ 인데 이곳에 bc 400년 경 성전을 지었고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중심지가 된 것이죠. 그들 나름대로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은 한 것이죠. 그들은 오로지 모세오경만을 인정했지만 유대인은 성문서와 선지서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나라에 의해 먼저 망하면서 앗수르는 혼혈정책을 시행합니다. 따라서 혈통과 문화, 종교 모두 다른 민족과 혼합되면서 본래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역사를 갖고 있고 반면 남쪽의 남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한 침략은 벗어났지만 뒤 이은 바벨론이라는더 큰 나라에 의해 유다도 망하고 백성들의 상당수가 먼 곳으로 포로로 잡혀갑니다. 여러분 최근 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이때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잡혀갔던 유사한 모습이죠.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잡혀간 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돌아온 유대인들이 다시 이스라엘에 성전을 재건하고자 할때 가장 큰 방해를 한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 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고 이때부터 ‘상종’하지 않게 되는 사이가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땅에서 그것도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배경을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 ‘야고보과 요한’이 하늘에 불을 명해 멸절시키고 싶은 거친 말이 대다수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태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가장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 지역 수가성에 이름도 알리지 않은 체 한 여인이 가장 무더운 정오에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에서 물을 깃고자 합니다. 유월절이 4-5월 즈음이면 5월부터 9월까지는 평균이 30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그 장소에 예수께서 계십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를 가리키는 여섯 시쯤 되었다는 요한의 설명은 가장 무더운 시간 대부분이 쉬는 시간이지만 사람이 없을 시간을 택해 올 수밖에 없는 여인의 모습을 말합니다. 가장 더운 시간 우물에 오는 사람이 없는 시간에 우연한 듯한 만남은 앞서 밤에 의도를 갖고 찾아온 니고데모와 비교가 됩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리로 최고의 그룹에 있었다면, 이 여인은 사마리아 인이면서도 나중에 밝혀지는데 남편이 다섯 그리고 지금 남편이라 부를 수 없는 가장 험난한 개인사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 앞에 인생 최대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떤 시기, 어떤 삶을 살고 있을 때 예수를 만났나요?
그리고 예수께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는 부탁의 말투에 여자는 놀랐고 9절에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앞서 설명한 사마리아의 관계 그리고도 유대인 남자로서 사람의 눈길을 피해 온 여자인 자신에게 그 흔한 물 한 잔의 요구도 심상치 않는 것이죠. 그럼에도 여기 본문에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인간다움입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 형을 앞두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실 때도 저자는 아프다거나, 고통을 호소하시거나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분위기를 주도하시는 분으로 그려나가고 앞으로도 여러분은 그것을 느끼게 될 것인데 여기 본문과 나사로의 죽음을 대하실 때 예수님의 인간다움 곧 ‘피곤하심’, ‘목마름’과 같은 모습을 보이심으로 험난한 삶에 처한 가장 낮은 여인에게 물을 구하는 낮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때 ‘도움 받는 자의 모습’을 요구당합니다. 이럴 때 정말 자존심이 상하게 되죠. 예를 들어 도움 받는 자는 무릎을 꿇어야 하고, 비굴한 모습을 취해야 한다든지 우리 사회에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갑질의 출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정말 ‘물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여인’이었고 예수님은 가장 부드러운 상태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상한 심령을 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음성은 부드러운 것입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 상처 받는 우리의 말과는 질적으로 다르신 분이십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4:10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나 여인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구원’입니다. 예레미야 2:13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나름 신앙을 알고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지만 그들의 구원 약속은 모세오경에 멈춰 있었고 계속되는 역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도 니고데모처럼 11절에 ‘물 길을 그릇도 없다, 이 물은 깊은데 그 생수를’ 어떻게 얻겠냐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곧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니 니고데모는 어떻게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가냐고 말했다면 여인은 지금 현실에 필요한 ‘물’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당장 눈 앞에 일어나는 일이 급하고 누군가 처리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삽니다. 여인 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 역시 험난한 삶 그 자체입니다. 이 여인에게 는 12시에 물을 깃는 것이라도 만족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 야곱의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게 그래서 지금 그 덕을 보며 사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목이 마르면 내일 다시 올 우물이 있는 것이 막연한 미래를 믿고 우물 없이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기인데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하다 떠났지만 3일이 되자 애굽의 고기 반찬을 그리워 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목마름, 매일같이 해가 가장 높은 무더위라도 나와서 물을 길어야 하는 상황이 해결된다면 여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며 지금의 고통 중 하나를 해결하는 것이 됩니다. 15절에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도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지금 손끝에 박혀 있는 가시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인생, 오늘 하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삶은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이 갖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 예수의 말씀만이 진정한 인식의 변화를 주십니다 어려서는 부모가 그 역할을 하지만 성장하면서는 학교 선생님이 꿈과 희망을 심어주던 시대가 변화면서 스승이 필요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것 같은 부모 세대는 잔소리하는 꼰대로 치부되고, 학교의 선생님은 직장인 그 이상도 아닌 시대에서 진정으로 배우고 신뢰할 만한 대상이 없어졌고 그 자리를 유튜버가 대신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느 평범한 일상 우물 곁에서 한마디 건내준 사건으로 인생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일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갇혀 있고 교회 주일 오전 한 시간에 갇혀 버려서 우리 일상에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쁘다고 말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튜브의 또 다른 세상을 찾고 드라마의 간지러지는 시간을 찾을 정도의 일상이라면 예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안되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남이 나를 존중해주는 시대가 아니라 내가 나를 극단적으로 존중한 결과 알아도 못하는 자기 자신 그대로를 가장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이 무너져 깊은 절망으로 빠져 버리는 오늘의 시대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선물’은 매일같이 목마름에 노출된 인간의 본질에 답하는 것입니다. 그 생수를 마셨다면 길거리를 배회하며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고 부하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겨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무엇인가에 목마른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유투브의 영상일수도, 게임 일수도, 사람을 속고 속이는 일일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바람 ‘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바람은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내 눈 앞에 보이는 문제만 바라보고 힘들어하고 나만 당하는 것 같은 좌절감을 맞보고 있나요? 그래서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가치를 벗어나 교정되고 수정되어야 할 나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여기즘에서 멈췄습니다. 밤은 깊었고 자기 삶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아직 밝을 때 여인에게는 더 깊이 자신을 봐야할 시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4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다음 주 계속해서 여인의 삶 너머의 세계 그녀의 믿음에 관련된 시간까지 들어가려 합니다. 이번주도 주님께서 가장 더운 시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우물 곁에서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며 위로받는 시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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