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바라는 자의 기다림

요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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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43–54 NKRV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여러분은 기적을 바라십니까? 혹은 기적을 바랐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간절히 기적을 바라던 자들이었습니다.
과학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조차도 정말 작은 그 바이러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고, 생명을 잃어갔습니다. 이것이 나와 관련이 없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옆에 있는 누군가는 가족, 누군가는 직장 동료, 누군가는 나의 친구들이 고통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우리의 생활이 위협받고, 경제적 어려움도 커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여파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기도 하고, 수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을 낳은 것이 그 작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순간에 그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는 기적을 바라던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상당히 완화 되었죠.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간절히 기적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기적을 바랬던 적이 있나요?
기적은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위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현대인들은 “기적은 없다”라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 법칙을 무시하는 기적은 바래선 안되고, 바랄 수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 앞에서 일말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들이 다 있다는거죠.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는 순간에는 기적이 쓸모 없어집니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기는 순간 기적은 간절해집니다.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이 시대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기적을 바라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열망과 갈망의 대상을 항상 찾게 되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1.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의 의미 (43-45절)

오늘 본문도 시대를 막론한 기적을 바라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본문 43-45절을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4:43–45 NKRV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오늘 본문 안에서 조금 어색하다고 느껴질만한 내용이 오늘 본문 초반에 나옵니다.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통해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다시 자신의 고향인 갈릴리 가나로 당도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44절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입니다.
왜 이게 이해가 안되냐면 45절을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4절에서 선지자는 분명히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환영받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45절에서 왜 환영받았는가?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명절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조건부가 붙은거죠. 원래 예수님을 영접하던 자들이 아닌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보고 영접하는거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을까요?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하고 있는 자들을 내쫓으시죠.
이 사건은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강력한 정치력의 등장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카리스마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다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부흥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번 다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이 시기에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을 계속 보면,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부딪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그것을 해결할 영혼의 구세주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죠. 오직 정치적 열망을 이루어줄 분 혹은 여러가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춘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거죠. 예수님이 고향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영접받아야 하는데, 고향에서 유대인들은 그냥 능력이 좋은 사람, 혹은 정치력을 갖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2. 기적을 바라는 왕의 신하 (46-47절)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직후에 곧바로 만난 사람도 그와 같은 부류입니다.
46-47절을 볼까요?
요한복음 4:46–47 NKRV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여기서 왕은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고요,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황제가 맡겼던 왕의 권한을 받은 자입니다. “분봉 왕”이라고 하는데, 그 지역의 왕의 권한을 받은 자인거죠.
그 분봉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 신하의 아들이 이제 병에 들었는데 거의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분봉 왕이면 지금의 어떤 행정자치구역의 장들 있죠? 그런 시장, 도지사 이런 권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권한을 자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되고
그 지역 안에서는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모든 통치권을 다 갖춘 자입니다.
그런 분봉 왕의 신하라면 분명히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라도 살리려고 노력해봤을 겁니다.
수많은 의사들, 병에 좋다는 좋은 약들, 음식들 다 먹여봤을 거에요. 그러나 실패한거죠.
그러자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듣고 있던 왕의 신하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럴만한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시잖아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능력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기적을 보여주시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죠. 왜요? 희망은 예수님한테만 이제 남아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그 상황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합니다.
요한복음 4:48 (NKRV)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해야할 말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해결해준다거나, 그것을 위로한다던가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차갑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왕의 신하의 입장은 상당히 간절한 상황이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 앞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을 지적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하가 간절하게 부탁을하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50 (NKRV)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 왕의 신하가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을 믿고 가긴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아들이 살아있다”라고 하신 말을 믿고 간거죠. 여기서 믿는 것은 “아들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애초에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자신의 간절한 무언가를 이루어줄 대상입니다. 그래서 그 간절한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닌 겁니다.
이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1. 아들에게 가는 고뇌와 기다림의 길 (51-53절)

그래서 이 아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길에 왕의 신하의 종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 4:51 (NKRV)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거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겁니다.
요한복음 4:52–53 (NKRV)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아들이 나은 시점이 예수님이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신 그 시점과 일치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오후 1시 예수님과 만난 것이 확실하고, 그이후 종을 만난 시간은 다음 날 새벽 정도일 것이라고 대략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약 10시간 정도를 산길을 걸어가며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모든 의사에게 거절받고 가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으나, 예수님은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만 듣고 치료가 되었다고는 말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다시 귀향하고 있다.
그는 온갖 생각을 다했을 것이다. 만약 아들이 치료되지 않았다면 이제 그에게는 소망은 없다. 예수님을 원망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다. 혹은 그는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아들이 치료되지 않았을 때, 그에게 소망은 없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만약에 아들이 치료됐다면 예수님은 정말 기적을 행하시는 분일 것이다. 근데 만약 아들이 치료 됐다면 어차피 치료시켜주실 것이면서 그 의미심장한 말(기적과 표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거리가 짧았다면 그저 그의 아들의 치료 소식을 듣기 위해서 깊은 생각은 하지 못한체 아들의 치유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거리는 상당히 길었고, 아들에 대한 생각만을 하기에는 꽤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충분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1. 영적 자의식 과잉의 상태

우리의 삶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종종 믿음을 가지게 될만한 충분한 생각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만은 간절히 원하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영적인 자의식 과잉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자의식 과잉이란 "자기 마음의 위치에 신경을 쓰는 자의식 또는 자기에 대한 자각적 의식. 전자처럼 자기의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자의식 과잉이라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일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정신상태이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영적인 일에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자의식 과잉 상태에 빠지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저 멀리에 두고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영적 자의식 과잉 상태에 빠졌다는 증거는 곧 삶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삶의 기적을 바라는 모습들이 있죠.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 간절한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왕의 신하는 기적을 바랬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아들이 고쳐지지 않았었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기적입니다. 도무지 해결이 안되는 일이 해결되는 것을 바라는 것. 기적을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모습은 곧 삶의 문제에 대한 영적 자의식 과잉 상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상당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걱정,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걱정하고 염려합니까? 그 문제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다 놓아버릴 정도가 되게 됩니까?
그것이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렇죠.
물론 왕의 신하의 경우 우리가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왕의 신하의 앞에서 냉정하게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구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거죠.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너가 기적을 보지 않으면 나를 믿지 않는구나”라고요.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1.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믿은 것의 의미 (53절)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을 한번 다시 돌아봅시다.
일단 5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아들에게 가긴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뭐라고 했었죠? 그 아들이 나았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하는 꽤나 긴 몇시간 동안의 시간 중에 아들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했던 반응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 와중에 종들을 만나고, 그가 그렇게나 바라던 아들이 나은 소식을 듣게 되죠.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일 겁니다.
그런데 그 길었던 고뇌와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그가 했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 고민들은 어떻게 빛을 발하나요?
요한복음 4:53 NKRV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아들이 나은 시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했던 고뇌의 시간들이 맞물리면서 마침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믿게 된 것”.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죠.
단순히 기적 자체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행한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기적이 없어도 믿어야하는 분인 것을 믿게 되는거죠.
믿음이 발전했고,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비로서 깨닫게 된거죠.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

1. 우리에게 필요한 고뇌와 기다림의 시간

기적이 필요할 때가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가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난 후에서야 예수님을 찾아가게 될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때부터 여러분은 고뇌와 기다림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은 바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간절히 바랄만한 일이 생기게 하신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팀 켈러는 2012년 갑상선 암 투병 후 이런 말을 남겼다.
“나와 내 아내 캐시는 암 투병 이전의 기도와 말씀 생활로 돌아가고싶지가 않다.”
이는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큰 목적 중 하나를 분명하게 표현하면서도 성화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표현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남기고싶다.
“나는 매일 어제와 같은 기도와 말씀 생활로 돌아가고싶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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